2024-03-28 09:13:07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황도파 편: 제4회 평생을 면방직에 기여하다

(사진설명: 황도파가 발명한 베틀)

제4회 평생을 면방직에 기여하다

세월은 무정하고 사람은 늙어갔다.

천애해각(天涯海角) 애주(崖州)에서 30년을 보내며 반백을 넘긴 아황(阿黃)은 낙엽이 뿌리를 찾아가듯 끝내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 묘령의 처녀가 은발의 노부가 되어 돌아오니 감개가 무량했다. 고향말씨는 여전히 그 사투리였으나 고향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니었고 고향 마을도 전에 없이 스산했다. 또 아황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은 몇몇 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들마저 백발에 노쇠하기 그지 없었다. 시부모는 벌써 세상을 뜨고 어린 남편마저도 이생에 없었다. 몇 십 년 동안 도교 사원에 익숙한 아황은 고향에서도 사원에 기거했다. 아황이 도교 사원에 자리를 잡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황도파(黃道婆)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이름처럼‘도교사원의 황씨 할머니’가 된 것이다.

아황이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목화는 많이 재배하지만 물레는 여전히 과거 자신이 쓰던 삐걱거리는 낡은 물레를 쓰고 있었다. 황도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는가. 내가 가진 재능을 관속에 넣어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황도파는 고향의 여인들에게 자신이 발명한 알면기(軋棉機), 씨아의 사용법을 가르쳤다. 목화의 씨를 뽑는 이 도구는 나무로 만든 틀 안에 축이 달린 쇠로 된 기둥 하나와 나무 기둥 하나를 세웠다. 상대적으로 가는 쇠 축과 좀 굵은 나무 축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해서 그 사이에 목화를 넣으면 두 축이 엇갈려 돌면서 솜은 앞으로 빠져 나오고 씨는 뒤쪽으로 떨어졌다. 이 씨아를 사용하니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목화 씨를 뽑을 때보다 효율이 열 배 이상 높아졌다.

황도파는 또 자신이 보완한 솜활도 고향 사람들에게 전수해서 고향 사람들은 그때부터 모두 대자 솜활로 솜을 타면서 효율을 높였다. 황도파의 발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목화씨를 뽑는 씨아나 솜을 타는 솜활보다도 실을 뽑는 물레 삼정각답방차(三錠脚踏紡車)다. 이런 물레는 원래는 손으로 돌리던 물레를 발로 돌리게 해서 힘도 덜 들고 남아 도는 두 손으로 실을 뽑을 수 있으며 원래는 하나만 쓰던 방추를 세 개로 늘려 동시에 세 갈래의 실을 뽑을 수 있게 만들었다. 방적의 효율이 세 배 증가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방적기였다. 황도파가 방직의 비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람들은 신의 한 수 같은 황도파의 재능에 감탄하며 그녀를 여도사라 불렀다. 인적이 드물고 미개발 지대인 천애해각에서 이렇게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방직도구들을 만든 그녀는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을 만 했다.

황도파는 살아 있는 한 창조와 발명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창조는 계속되었다. 강남의 비단에 꽃과 새, 산수를 비롯해 온갖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베틀을 개조해서 면포에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넣기로 작심했다.

황도파는 배색과 씨줄의 색깔을 연구하고 면방직의 숙련공을 찾아 경험을 배웠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황도파는 나뭇가지와 찻잎, 바둑판, 문자 등과 같은 무늬의 면포를 짜는데 성공했다. 황도파의 대담한 기술적 혁신으로 고향의 방직업은 빠른 발전을 가져와 ‘오니경피(烏泥涇被)’라 불리는 면직물은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빨리 퍼져나갔다.

당시 한 시인은 오색찬란한 꽃이 피어난 오니경피가 비단을 방불케 하고 면포 같지 않게 마치 어느 화가가 그린 예술작품과 같은 것을 보고 혀를 차며 즉흥적으로 시까지 읊었다. 이는 면방직분야에서 창조한 황도파의 기적을 형상적으로 잘 보여준다.

애주의 면포 아름다운 오색의 실을 켜서(崖州布被五色)

운무 같고 꽃 같은 아름다운 천을 짜네(組霧雲燦花草)

돛배 타고 바다 건너 갔다 바람 타고 돌아와(片帆海得風歸)

하늘을 뛰어넘는 오경 면포 만들었네(千軸烏奪天造)

오니경의 사람들만 황도파에게서 앞서가는 방직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송강부(松江府)는 물론이고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사람들도 모두 황도파를 찾아왔다. 그로부터 강남의 면방직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강남은 당시 중국 면방직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송강의 면포 이 세상 으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황도파의 창조와 혁신이 있었기에, 황도파의 기술 도입과 전파가 있었기에 당시 경제는 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수공업은 면방직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어 비싼 비단을 사지 못하는 서민들이 더는 베옷으로 추위를 막지 않아도 되었다. 면포로 지은 옷이 일상의 의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지 10년이 가까워졌다. 황도파의 눈에는 자신의 얼굴에 갑자기 주름이 늘어난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늘 배가 붓고 식사를 못해 손과 발이 바싹 여윈 것만 보였다.

어느 날 저녁, 침상에 누워 창 밖으로 달을 바라보던 황도파는 갑자기 30년 전 애주에서 살던 때를 기억에 떠올렸다. 정신이 몽롱한 중에 황도파는 여(黎)족의 여인들과 물레를 돌리며 누가 실을 더 빨리 뽑는지 내기를 하는 자신을 보았다. 하얀 실은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많아지다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 하얀 구름으로 변했다. 황도파가 그 구름을 잡으려고 팔을 뻗치니 자신의 몸이 둥둥 떠서 구름을 따라 저 멀리 하늘가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황도파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이루었다. 그녀에게는 자손이 없었지만 그녀의 고향사람들은 그녀의 제사를 지내고 선면사(先綿祠)와 황모사(黃母祠)를 지어 자자손손 그녀를 기린다. 7백년 동안 황도파는 강남의 신앙이 되었고 선면사에는 오늘날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또 어린이들은 지금도 황도파를 노래하는 <황파파(黃婆婆)> 민요를 부른다.

황 할머니(黃婆婆), 황 할머니(黃婆婆), 우리에게 실 타는 법 가르쳐 주고(敎我紗) 베 짜는 방법도 가르쳐 주세요(敎我布). 하루에 실 두통 내고 베 두필 짜도록 말이에요(兩只筒子兩匹布).

황도파는 이름도 없는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었기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판을 치고 과학창조를 무시하던 당시 정사(正史)에는 그녀의 전기(傳記)가 기록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중국의 문명사를 위해 거대한 기여를 한 황도파는 오늘 중국의 과학기술역사에 기록되고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오래도록 전해지고 후세에 길이 길이 남는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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