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1 09:13:01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곽수경 편: 제1회 수리에 능한 천재

(사진설명: 곽수경 석상)

별로 남은 천문학자 곽수경

밤하늘을 바라보면 끝도 깊이도 알 수 없는 하늘이 무궁한 매력으로 넘친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별자리를 보며 정확한 역법(曆法)을 창제했다. 고대 중국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오래 시행된 역법은 바로 <수시력(授時曆)>이다.

원(元) 나라의 천문학자이자 수리학자이며 교육자인 곽수경(郭守敬)이 편찬한 <수시력(授時曆)>은 당시 세계적으로도 가장 선진적인 역법이었으며 그가 만든 천문기기 역시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기술을 자랑했다. 또 세계적으로 ‘해발(海拔)’ 개념을 처음으로 제출한 사람도 바로 곽수경이다.

인류의 과학사에 거대한 기여를 한 곽수경을 기념하기 위해 사람들은 달의 한 산을 ‘곽수경산’으로 명명하고 또 2012번 소행성(行星)을 ‘곽수경별’로 명명했다.

별로 남은 천문학자 곽수경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수리에 능한 천재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혈혈단신이 된 곽수경은 불행중 다행으로 그는 조부의 손에서 부러울 것 없는 배움의 동년을 보냈다. 그의 조부 곽영(郭榮)은 오경(五經)을 통독하고 수학과 수리도 정통했다. 그런 조부의 손에서 자란 곽수경은 어려서부터 책을 읽기 좋아하고 또 박식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조부는 곽수경을 자신의 절친인 유병충(劉秉忠)의 집에 보내서 공부하게 했다. 유병충은 당시 원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차지한 관리이자 시와 문장에 능한 문학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곽수경은 조부가 유병충에게 하는 말을 엿들었다.

“아아, 전쟁이 끊이지 않으니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석교도 그 화를 면하지 못했네. 지금 다리가 없어서 강을 건너려면 배를 타야 하니 아주 불편하구려. 하지만 다리를 다시 놓으려 해도 기존의 교각을 찾지 못하겠네. 그래서 모두들 걱정이네.”

조부의 말을 마음에 둔 곽수경은 쉬는 틈을 타서 강가에 나가 교각을 찾았다. 강변을 따라 걸으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리는 적당한 곳에 놓는데 그런 곳이라면 필히 수면이 좁고 강물이 옅으며 물살이 급하지 않은 곳일 것이다.”

이런 특징에 근거해 물길을 따라 앞뒤로 나아가며 찾으니 금방 교각의 위치를 판단할 수 있었다.

과연 사람들은 곽수경이 가리킨 곳에서 교각을 발견하고 진흙 속에 묻힌 석교의 일부분도 찾아냈다. 모두들 이 젊은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명한 시인인 원호문(元好問)도 이 일을 알고 특별히 비문을 써서 이 일을 기념했다.

곽영이 으쓱하며 말했다.

“수경이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놀음을 탐하지 않고 어려운 문제 해결을 무척 좋아했지 뭔가. 그가 열다섯 살 때 내가 가지고 있던 연꽃모양의 물시계 그림을 보고 혼자 끙끙거리고 연구하더니 물시계의 원리와 만드는 방법을 깨닫고 똑같이 만들어 오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나는 깜짝 놀랐었지.”

유병충이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대단하네. 이 아이는 머리기 비상해. 그 연꽃 모양의 물시계는 송(宋)의 천문의 대가 연숙(燕肅)이 고대의 물시계를 개조해서 새롭게 만든 것인데 원리도 간단하지 않고 구조는 더욱 복잡하고 필요한 부품도 아주 많지 않은가. 그런데 수경이가 그림 하나로 그 물시계를 복제하다니, 후에 이 아이는 천문학에서 반드시 큰 일을 할 걸세.”

얼마 지나지 않아 유병충이 원세조(元世祖) 쿠빌라이의 부름을 받고 벼슬길에 올라 국도(國都)로 떠나자 곽수경은 조부의 다른 절친인 장문겸(張文謙)의 사사를 받았다. 이 때 곽수경은 자주(滋州) 서부의 자금산(紫金山)에서 후에 지기가 된 왕순(王恂)을 만났다. 곽수경보다 4살 어린 왕순은 수학의 귀재였고 당시 그도 장문겸 대인(大人)의 수하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장문겸이 대명로(大名路)에 가서 수리(水利) 업무를 관장하게 되자 곽수경도 그를 따라 다니며 수리시설을 보수하고 지세를 측량하며 많은 과학지식과 수리업무 경력을 쌓았다. 곽수경이 보기 드문 인재라고 느낀 장문겸은 중통(中統) 3년(1263년), 황제 쿠빌라이에게 곽수경을 천거했다.

“곽수경이 나이는 어리지만 총명하고 기민하며 생각이 깊습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특히 수리에 있어서 유능한 인재입니다.”

장문겸의 천거에 쿠빌라이가 당시 원 나라 국도였던 상도(上都), 오늘날의 내몽골 시린거러(錫林郭勒)맹 상도진(上都鎭)으로 곽수경을 불러 만났다.

“현재 시급히 시작해야 할 수리시설은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가?”

황제의 질문에 곽수경은 서두르지 않고 당당하고 차분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중도(中都)에서 통주(通州)까지의 물길을 보수하고, 둘째, 하북(河北)에서는 형대(邢臺) 각 도시의 용수문제를 해결하며, 셋째, 하북의 관개용 수로를 건설하고, 넷째, 자주(磁州)와 한단(邯鄲)의 수리시설을 축조하며, 다섯 째, 중원(中原)에서는 심하(沁河) 강물을 합리적으로 활용하고, 여섯 째, 하남(河南)에서는 황하(黃河) 북쪽 지대의 수로를 보강해야 할 것입니다.”

곽수경은 한 가지 조목을 말할 때마다 현장 답사를 통해 정한 자신의 계획까지 곁들여 설명했으며 심지어 물길이 경유하는 곳과 수혜 면적도 손금 보듯 환하게 꿰뚫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곽수경이 한 조목을 말할 때마다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구나!”

곽수경의 생각을 다 듣고 나서 원세조 쿠빌라이는 당장에서 그에게 수리를 담당하는 제거제로하거(提擧諸路河渠) 관직을 내리고 1년 후에는 또 그를 은패(銀牌)를 소지한 부하거사(副河渠使)로 승진시켰다.

원세조의 말이 맞았다. 곽수경은 수리관을 맡은 몇 년 동안 대단한 일을 했다. 그는 관개와 수운, 홍수 방지 등 기능을 갖춘 복합공정을 처음으로 건설하여 세계 수리사의 기적을 창조했고 통혜하(通惠河) 물길 공사에서는 백부언(白浮堰)이라는 독특한 제방을 쌓았으며 수위차를 해결하기 위해 24개의 갑문도 쌓았다.

그럼 곽수경이 어떻게 관개와 수운, 홍수방지 기능을 다 갖춘 수리시설을 축조했는지 살펴 보자!

지원(至元) 2년(1265년), 곽수경은 도수감(都水監)으로 승진했다. 중흥주(中興州)의 황하(黃河) 나루터에서 배에 오르면 나흘 만에야 동승(東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안 곽수경은 이 물길을 정비해 수운능력도 향상시키고 수해도 방지하려고 했다.

노구하(卢溝河)의 지천인 금수하(金水河)는 금구(金口)의 동쪽과 오늘의 베이징(北京)을 말하는 연경(燕京) 북쪽의 넓은 토지를 관개하는 물길이었는데 원(元)의 군대가 연경에 입성한 후 안전을 위해 물길을 막아버렸다. 곽수경은 막혔던 물길을 열어 금수하 상류 서산(西山)의 물자가 수로를 통해 하류로 수송되게 했으며 그 하류를 연경의 수로와 연결시켰다. 그는 또 금구의 서쪽에 분수거(分水渠)를 파서 강물이 서남방향으로 흐르다가 다시 금수하에 흘러 들게 했다. 곽수경은 분수거는 반드시 넓고 깊게 파야 강물이 불 때 홍수가 연경에 흘러 들지 않는다고 인부들에게 신신당부했다. 곽수경은 이렇게 관개와 수운, 홍수방지를 다 감안한 것이었다.

지원(至元) 28년(1291년), 곽수경은 현지답사를 통해 란하(滦河)의 물길이 막히고 노구하로 배가 다닐 수 없어 수운이 큰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곽수경은 북산(北山) 부천수(浮泉水) 물길을 끌어 들여 먼저 서쪽으로 흐르게 하다가 다시 북쪽으로 한 동안 흐른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옹산박(瓮山泊)을 거쳐 서수문(西水門)으로 연경성에 입성해 적수담(積水潭)에 흘러 들게 했다. 또 적수담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남쪽으로 흘러 남수문(南水門)을 통해 성을 나가 기존의 운량하(雲粮河)에 흘러 들게 했다. 이 과정에 수위차가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곽수경은 1리(里, 1리=0.5km)에 하나씩 갑문을 두어 수문의 개폐로 수위를 조절함으로써 선박의 원활한 통행을 담보했다.

지원(至元) 30년(1293년), 원의 황제는 적수담을 지나다가 돛대가 숲을 이루고 꼬리에 꼬리를 문 선박들이 수면에 꽉 차있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서 그 물길의 이름을 통혜하(通惠河)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곽수경에게 1만 2천 5백 관(貫)의 돈을 상으로 내렸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작은 일이 하나 있다. 대덕(大德) 2년(1298년) 원성종(元成宗)은 상도(上都) 근처에 물길을 빼고자 곽수경을 현지답사에 파견했다. 곽수경은 그 곳은 강우량은 적지만 큰 산과 가깝기 때문에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50~70보 너비로 수로를 조성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공사 담당자는 곽수경이 지나치게 신중하다고 생각해 임의로 수로의 너비를 60%로 줄였다. 수로공사 완공 후 1년도 안 돼서 폭우가 내려 산사태가 발생났는데 물길이 좁아 홍수의 범람으로 큰 피해가 조성되었으며 하마터면 행궁(行宮)까지 물에 잠길 뻔 했다. 원성종은 하는 수 없어 수해를 피하고자 상도를 떠나기까지 했고 수로공사 담당 관리는 곽수경의 예언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곽 태사(太史)는 과연 신인(神人)이구나! 애초에 그의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후회막급이로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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