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1 09:27:09 출처:cri
편집:李仙玉

[두예 편-1] 새로운 법률의 제정

(사진설명: 두예가 쓴 주해)

박학한 명장 두예

두예(杜預)는 <좌전(左傳)>에 주해를 쓴 학자이다. 동시에 그는 또 오(吳) 나라를 멸한 서진(西晉)의 통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한 선비가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가서 승리를 거두었으니 제갈량(諸葛亮)의 풍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는 또 수리시설을 만들고 운하를 파서 장강(長江)의 물난리를 해결했으며 형주(荊州) 남북의 수운을 개선해 현지의 백성들은 그를 친절하게 ‘두부(杜父)’라 불렀다.

고대 중국의 유명한 군사가와 학문가인 두예는 또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법률사상 최초로 ‘율(律)’과 ‘영(令)’을 구분하고 ‘율’과 ‘영’에 대해 처음으로 정의를 내렸다.

박학한 명장 두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새로운 법률의 제정

“사마소의 야심은(司馬昭之心) 세상 사람이 다 안다(路人皆知)”는 말은 조설근(曹雪芹)의 선조인 조모(曺髦)가 한 말이다. 가충(賈充)이 부하를 시켜 사마소와 판을 가르려는 황제 조모를 시해하자 진(晉) 왕 사마소는 12세의 조환(曺奐)을 꼭두각시 황제로 세우고 자신이 여전히 위(魏) 나라의 대권을 장악했다. 그는 또 향후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가충과 배수(裵秀), 정충(鄭忠) 등 대신들에게 법률과 관제(官制), 예의(禮儀)의 개편을 위임했다.

정충이 사마소에게 물었다.

“진 왕께서는 두원개(杜元凯, 두예의 자)의 재능을 높이 사셔서 여동생까지 그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시작한 예의와 법률 개편에 박식한 인재가 가장 필요한데 왜 두무고(杜武庫)에게 이 큰 일을 시키지 않으십니까?”

사마소는 정충이 두예를 두무고라 부르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대는 어이하여 선비인 원개를 무고라 부르시오?”

“원개의 머리 속에는 천문과 지리, 경서와 병서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조정 안팎에서는 모두 그를 무고라 높이 부릅니다. 무고라는 별명은 제가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소. 원개의 조부는 위무제(魏武帝)의 심복이라 부친은 죽을 때까지 그를 감금했고 원개의 부친은 강직해서 항상 모함을 받아 역시 중용되지 못했소. 내가 권력을 잡은 오늘날 원개 같은 현자를 당연하게 중용해야지. 안 그러면 왜 나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 보냈겠소? 그대 말에 일리가 있소. 이런 큰 일에 원개가 참여해야지.”

당시 하남(河南) 태수(太守)로 있던 두예는 이렇게 도읍으로 올라와 새로운 법률의 제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소가 붕어하고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마염(司馬炎)이 몇 달 후 보위를 내놓도록 조환을 핍박하여 국호를 진(晉)이라 하고 스스로 진 왕조의 개국황제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명의로는 가충이 주관했지만 사실상 두예가 제정한 새로운 법률도 제정되었다. 새 법률은 이름하여 <진율(晉律)>이다.

사마염이 고모부 두예를 불러 물었다.

“우리 이 <진율>의 새로운 점이 무엇인지요? 좀 들어봅시다.”

“<진율>에는 율(律)은 형벌제도로 죄명을 판정하는 기준이고 영(令)은 규칙제도로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준칙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원칙에 근거하여 제정된 우리의 진율은 기존의 한(漢)이나 위(魏)의 법률에 비해 경계가 더 뚜렷하고 체계가 더 보완되어 있습니다.”

두예는 자신의 이 설법이 중국의 법률사상 최초로 ‘율’과 ‘영’을 구분한 것임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율’과 ‘영’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율’은 죄명을 판단하는 기준, ‘영’은 사회가 따라야 할 규칙이라고 구분한 것이다.

사마염이 또 물었다.

“그럼 <진율>은 무슨 특징이 있는지요?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법률이란 관리가 형을 정하는 기준입니다. 이치를 말하는 책이 아니라 목수가 사용하는 먹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률조문은 글자수가 많지 않아야 하며 백성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통속적인 문자로 씌어져야 합니다. 또 백성들이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도록 제정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한율(漢律)>은 법률조항이 많아 도합 2만 6천조항에 달하고 글자수도 770여만자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법률을 백성들은 기억할 수가 없고 관리들은 또 이를 이용해 비리를 저지릅니다. <위율(魏律)>은 이런 작폐를 다소 개혁하기는 했지만 큰 변화가 없습니다. 우리의 <진율>은 기존의 법률을 대폭 삭제하고 시비 기준을 확실하게 정해 임의로 해석하는 현상을 근절시켰습니다. 우리의 <진율>은 도합 2천 9백여 조항에 글자수는 12만 6천자에 그칩니다. 아주 많이 간단해 졌습니다.”

두예의 설명에 아주 만족한 사마염은 즉시 새 율령을 전국적 범위에서 시행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황제가 아주 만족해하는 것을 본 두예는 그 기회에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설명했다.

“사공(司空) 배수가 관제(官制)를 개혁하면서 관직의 준칙과 조례가 있어야 각 급 관리들이 자신의 직책이 무엇인지 알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소신은 이 개혁이 아주 중요하다고 사료되어 저의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신은 관리라 함은 반드시 고과(考課)제도에 따라 실적을 평가 받고 관리의 우열에 따라 상과 벌을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먼저 심사감독기관을 내와 덕성과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이 고과제도를 집행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공적이 있는 관리들이 배척을 당하지 않고 일부 관리들의 명성이 실제 공적을 초과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암흑하고 부패했다. 사마염은 자신이 황제 보위에 오르는 것을 지지한 명문가들을 방종했고 각 급의 관리들 다수도 이런 명문가의 자손들이 담당했다. 명예와 이익만 챙기고 서로 눈감아 주는 그들의 실적을 평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마염이 웃으며 말했다.

“고모부의 제언은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몇 년 후에 다시 봅시다!”

사마염의 말에 두예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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