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2 09:28:51 출처:cri
편집:李仙玉

[두예 편-2] 능력 과시의 시작

제2회 능력 과시의 시작

두예는 사마의의 딸인 고육(高陸) 공주와 혼인하면서 재능을 펼칠 기회를 가졌으나 올곧은 성품으로 인해 늘 권세가에 밉보여 여전히 가끔 배척과 모함을 받았다.

태시(泰始) 6년 (270년), 두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예교위(司隶校尉) 석감(石鑒)에게 밉보여 하남 태수의 직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그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오자 진무제(晉武帝)는 그를 변방의 요새에 보내며 경거장군(輕車將軍)을 맡겼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두예가 새로운 임명을 받고 장안(長安)에 이르러 보니 석감이 그의 상사였다. 때는 6월이라 북쪽의 벌판에는 풀이 살찌고 선비인(鮮卑人)들은 기세 사납게 남침해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두예에게 군사 3백과 군마 1백 필을 주었다. 안식(安息) 장군 석감이 두예에게 명령을 내렸다.

“좌천되자마자 다시 승진하는걸 보니 당신은 참으로 능력자구만. 당신이 황실의 친척이고 금지옥엽과 혼인한 것을 나도 알 있소. 하지만 장군이라면 나라에 한 몸 바쳐야 하지 않겠소. 당장 군사를 거느리고 선비족 오랑캐들을 물리치시오.”

두예는 맹목적인 출전을 반대하며 말했다.

“싸움에서는 시기와 형세를 잘 살피고 상대와 나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출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첫째, 선비인의 군사가 강하고 우리 군사가 약해 지금 출전하면 달걀로 돌을 치는 격으로 승산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선비인의 군사가 사기 드높게 올 때는 그 서슬을 피해야 합니다. 셋째, 지금이 풀이 살찐 6월이라 병사가 용맹하고 군마라 날랜 선비인과 맞서 싸울 때가 아닙니다. 넷째, 적은 병력의 우리 군사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섯째, 병력을 집중하고 군량을 모아 내년 봄에 정벌해야 할 것입니다.”

두예가 출정을 거절하자 석감은 벌써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는데 두예가 거기다가 출정에 불리한 이유를 조목조목 말하니 더욱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두예는 여전히 당당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출전에 불리한 이 다섯 가지 이유 외에도 출전할 필요가 없는 네 가지 이유도 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석감은 두예의 말을 듣지 않고 호령했다.

“그만 닥쳐! 여봐라! 항명하는 안서군사(安西軍司) 두예를 죄수 호송차로 경성으로 보내 정위(廷尉)의 처분에 맡겨라.”

석감이 두예에게 많은 죄명을 씌우는 바람에 두예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정위의 유죄 판결을 받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공주와 혼인한 것으로 인해 당시 법률의 ‘팔의(八議)’ 규정에 따라 두예는 후작의 신분으로 죄를 상쇄할 수 있었다. 결과 두예는 옥살이를 면하는 대신 해직당하고 작위를 잃었다.

하지만 며칠이 안 지나 변경에서 석감이 선비인의 기마병과 싸우다가 완패하고 소수의 패잔병을 거느리고 요행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모든 결과가 두예가 예상한 것과 딱 들어맞았다. 조정의 대신들이 너도나도 두예를 칭찬했다.

“두원개의 예상은 참으로 정확하군! 석감은 공적인 일에서 두원개에게 사적인 울분을 풀었네.”

일부 대신들은 황제에게 소를 올리기도 했다.

“두원개는 전술전략에 능합니다. 마땅히 그의 관직을 회복시켜 조정을 위해 일하게 해야 합니다.”

그 때 마침 흉노 장군 유맹(劉猛)이 군사를 일으켜 병주(幷州)로부터 하동(河東)의 평양(平陽)까지 쳐들어와 서진을 범했다. 황제는 먼저 두예에게 산후(散侯, 영지나 직위가 없는 후작)의 신분으로 궁중에서 계책을 내게 했고 곧 그를 오늘의 재정장관에 맞먹는 도지상서(度支尙書)로 임명했다.

두예가 ‘두무고(杜武庫)’라 불리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가 도지상서로 있으면서 한 일을 보면 모두들 왜 그를 두무고라 불렀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짧은 몇 년 동안 두예는 군사와 나라 대사에 관해 50여 가지의 제안을 내놓았는데 그의 제안은 전부 조정에 의해 채용되었다. 적전(籍田)의 설립으로 변경의 안정을 기하고, 상평창(常平倉)의 건설로 곡물의 가격을 확정하며, 식염의 수송 관리로 세금을 제정하는 등 그의 제안들은 안으로는 나라의 경제에 이롭고 밖으로는 변경의 건설에도 도움이 되는 빈틈 없는 계획이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주예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과시했다. 주예가 역서(曆書)의 오차를 수정해 제정한 <이원건도력(二元乾度曆)>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최초로 배수와 관개 기계를 개발한 그는 또 중국 농업 기계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그는 또 백 년 간 실전되었던 기기(欹器)를 복원했다. 이 기기는 물이 가득 차면 뒤집어 지고 물이 적으면 기울어지며 물이 절반 정도 차야 반듯하게 놓이는 그릇으로 중국 문화 중 ‘중용(中庸)의 이치’와 ‘중화(中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도예가 복원한 이 기기는 황제의 곁에 놓여 중용을 지킬 것을 시시각각 황제에게 타이르는 역할을 했다.

이밖에 두예는 또 낙양 지역에 최초의 황하(黃河) 대교를 건설했다. 두예는 황제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맹진(孟津) 지역의 도하과정에 늘 배가 전복되어 아주 위험합니다. 부평진(富平津)에 다리를 놓아야 할 것입니다.”

대신들이 반대했다.

“낙양지역은 상(商)나라와 동주(東周)의 도읍으로 수천 년 동안 다리를 놓지 않은 데는 필히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두예가 그 말을 반박했다.

“옛 사람들은 조주위량(造舟爲梁)이라고 말했습니다. 위량이 바로 강물에 다리를 만드는 것을 말하니 배를 만드는 것과 다리를 놓는 것은 예로부터 있었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곳의 강물에 다리를 놓지 않은 것은 옛 사람들이 그럴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놓은 후 황제가 신하들을 거느리고 현장에서 다리를 보고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황제가 잔을 들며 치하했다.

“원개가 없었다면 이 다리도 없었을 것이오.”

두예가 대답했다.

“폐하의 안목이 없으셨더면 소신은 이 작은 재능을 펼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예는 도지상서를 담임한 7년 동안 나라에 크게 기여해 조정 안팎의 칭찬을 받았다. 대신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두예를 높이 평가했다.

“두무고라는 이름이 참으로 명불허전이로구나!”

하지만 나라에 대한 두예의 엄청난 기여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두예의 가장 큰 공은 오 나라를 공략해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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