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3 09:19:2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곽수경 편: 제3회 어렵게 새 역법을 제정하다

(사진설명: 곽수경 동상)

제3회 어렵게 새 역법을 제정하다

곽수경(郭守敬)의 천문기기도 성공적으로 만들어지고 왕순(王恂)과 곽수경이 네팔에서 온 기술자 아니고(阿尼哥)와 협력해 만든 새 천문대(天文臺)도 대도(大都)에 세워졌다. 곽수경은 신나서 모든 기기들을 새 천문대로 옮겼다.

“곽 형, 이제 우리의 사해관측(四海觀測)을 시작할 수 있겠지?”

왕순의 물음에 곽수경이 대답했다.

“모든 준비를 다 마쳤으니 어명만 떨어지면 되겠네. 이번에 우리의 천문관측은 범위가 넓어 동쪽으로 고려에 이르고 서쪽으로 전지(滇池)에 다다르며 남쪽으로 주애(朱崖)를 넘고 북쪽으로 철륵(鐵勒)까지 닿네. 그러니 27개 관측소를 세워야 하고 그래서 사해관측이라 하는 게 아닌가. 전대미문의 대 규모 천문관측인데 이렇게 설계는 다 했지만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하니 폐하께서 후원해주셔야 하네. 그대는 빨리 이런 상황을 폐하께 말씀드리게! 폐하께서 윤허만 하신다면 바로 시작할 수 있네.”

“폐하께는 내가 소를 올리겠으니 곽 형은 세부적인 행동 방안을 만들게.”

“걱정 말게. 벌써 다 계획했으니. 우리는 대도(大都)에 사천대(司天臺)를 두어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상도(上都)와 낙양(洛陽) 등 다섯 곳에 천문기기를 두고 천체를 관측하는 감후관(監候官)을 두어야 하네. 그리고 각지에서 천문관원을 선정하고 그들에게 관측기술을 가르쳐야 하네. 왜냐하면 모두 새로 만든 기기라 교육을 받지 않으면 정확하게 사용할 수 없으니 말이네. 그들이 천문관측기기 사용과 관련 기술을 다 익히면 각지의 천문관측소에 파견해야 하네.”

“많은 관측소가 편벽한 산중에 있어서 그 곳으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걱정이네 그려.”

왕순의 우려에 곽수경이 웃으며 대꾸했다.

“폐하의 어명이신데 누가 감히 거절하겠는가? 명단도 벌써 다 작성했네.”

왕순도 함께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이네. 폐하의 어명이라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라 해도 감히 거절할 사람이 없을 것이네.”

“우리가 일부러 천문관측관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대원(大元)의 땅이 당(唐) 때에 비해서도 더 넓기 때문이네. 국토 전체를 포함할 수 있는 관측소를 두지 않으면 우리의 측량결과가 정확하지 않고 당 왕조 일행(一行) 대사의 수준에 머물러 있게 되네. 이 점을 폐하께 말씀 드리면 폐하께서 윤허하시고 더 많은 지원을 주실거네.”

원세조는 새 역법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지만 준비작업을 이렇게 많이 해야 하고 또 이렇게 많은 인력과 물력이 필요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곽수경의 견해에 찬성하면서 넓은 땅을 가진 원(元)이라면 대국적이어야 하고 전무후무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당시 원(元)은 국력이 강하고 국고에도 금은보화가 가득했으며 각지의 인재들도 모두 원 왕조에 귀순해 사해관측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에 원세조 쿠빌라이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천문관측행동을 윤허했다. 그는 또 곽수경이 제공한 명부에 따라 14명의 천문학자를 지정해 각 관측소에 가서 천문수치를 수집하게 했다. 누가 감히 황제의 어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황제의 지목을 받은 천문학자들을 모두 공손하게 대도에 와서 교육을 받은 다음 곽수경이 준 정방안(正方案)과 환표(丸表), 현정의(懸正儀), 좌정의(座正儀)를 받아 가지고 각자 관측소로 갔다. 곽수경도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대도로부터 상도, 상도에서 낙양을 거쳐 각 관측소에 가서 몸소 관측을 지도했다. 그 바람에 곽수경은 살도 빠지고 많이 노쇠해졌다. 당시 그는 금방 반백을 넘겼는데 보기에는 환갑이 넘은 듯 했다.

관측소와 관측소 간의 거리가 너무 멀고 관측소들이 너무 편벽한 곳에 위치한 원인으로 천문관측은 아주 어려웠다. 당시 곽수경이 선택한 관측소들 중 남해(南海) 관측소는 7백년 후의 오늘날 그 경위도(經緯度)로 계산하면 중국과 베트남 국경의 서사군도(西沙群島)에 있었다. 또 남해관측소가 오늘날 중국과 필리핀 간 영토권 분쟁이 있는 섬 황암도(黃岩島)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7백년 전에 곽수경이라고 하는 중국의 천문학자가 남해관측소를 황암도에 두었으니 이는 황암도가 중국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이와 동시에 당시 천문학자들이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는지도 알 수 있다.

사해관측을 위해 곽수경은 많은 연구를 했고 그 연구결과를 관측관원들과 공유했다.

“높이 측정에서 해수면(海水面)을 기점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바다 수면이 영(零)이고 그 수면에서 얼마 더 높으면 그 수치가 바로 해발(海拔)입니다.”

이 ‘해발’은 곽수경이 창조한 또 하나의 세계 최초이다.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해발’이라는 개념을 제출한 것이다.

사해관측을 통해 태사원(太史院)은 많은 수치를 얻었다. 왕순과 곽수경은 다른 동료들과 분업·협업으로 정밀한 계산을 시작했다. 2년의 어려운 계산과 편찬을 거쳐 지원(至元) 17년(1280년), 태사원은 끝내 <수시력(授時曆)>이라는 위대한 공정을 완수했다. 곽수경은 백성들에게 정확한 절기(節氣)와 농시(農時)를 제공함으로써 농경을 지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새 역법을 <수시력>이라 명명했다. 원 조정은 지원(至元) 17년(1280년) 6월에 <수시력>을 세상에 알리면서 이듬해 정월부터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따스한 봄 바람이 불고 설을 맞이하는 폭죽소리가 요란한 때 <수시력>이 시행을 시작했다. 왕순과 곽수경은 이 어려운 사명을 순조롭게 완수한 것을 축하해 술잔을 들었다.

왕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낙양성에 봄빛이 무르녹는데 낙양의 재자는 타향에서 늙어가는구려. 오늘 새 역법이 발표되었으니 나는 부친을 뵈러 고향에 돌아가봐야겠네.”

이 때 부친이 타계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한 왕순은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눈길이 멍해지고 끝없는 슬픔의 늪에 빠진 왕순의 심정은 즐거움의 최고점에서 슬픔의 빙점으로 떨어졌다. 왕순은 급히 집으로 향하면서 부친상을 당해 3년간 수제(守制)하겠다는 자신의 소를 대신 황제에게 올려달라고 곽수경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곽수경은 또 불행한 소식을 들었다. 절친 왕순이 부친상을 당한 후 너무 깊은 슬픔에 빠져 시름시름 몇 달을 앓다가 47살의 나이에 부친의 뒤를 따라갔다는 것이었다.

그 날 황제는 곽수경에게 왕순의 후임으로 태사령(太史令)을 담임하라는 어지(御旨)를 내렸다. 하지만 곽수경은 전혀 기쁘지 않았고 벗을 잃은 슬픔에 눈물만 흘렸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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