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08 16:02:22 출처:cri
편집:李仙玉

[조적 편-1] 전란에 벼슬을 받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문계기무)

북벌의 영웅 조적

동진(東晉)의 유명한 북벌 장군 조적(祖逖)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몸 다 바친 지사(志士)이다. 그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북벌(北伐) 전쟁을 진행해 침략자를 내쫓고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조적은 백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그의 사후 사람들은 너도 나도 상복을 입고 슬퍼했으며 사당을 세워 그를 영원히 이 땅에 남겨 기념했다.

한 밤중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칼춤을 춘다는 사자성어 문계기무(聞鷄起舞)는 어려움과 싸우는 조적의 정신을 대표하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뜻 있는 청년들을 격려하고 있다.

북벌의 영웅 조적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전란에 벼슬을 받다

사마염(司馬炎)이 바보 멍청이 사마충(司馬衷)을 태자로 삼고 포악한 가남풍(賈南風)을 태자비로 선택한 것으로 인해 ‘팔왕의 난 (八王之亂)’이 유발되어 16년간 지속되었다. 팔왕의 난으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비극이 펼쳐지고 팔왕의 난을 이용해 북방의 오랑캐가 남침해왔다. 이로써 진(晉) 나라는 중국을 통일한지 36년 만에 광활한 북방의 땅을 잃고 반 만 남은 국토를 지배했다.

나라가 사분오열되고 아사자가 속출하는 난세에 큰 뜻을 가진 조적이 나서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북벌전쟁을 일으켜 잃은 땅을 되찾으며 감격적인 영웅의 서사시를 썼다.

대지는 아직도 어둡고 닭은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곧 동녘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날 밝기만 기다리던 조적도 닭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조적은 발치에서 잠자고 있는 유곤(劉琨)을 깨웠다.

“닭이 울었네. 닭 울음소리가 과히 듣기 싫지 않군 그려. 우리 빨리 무예를 연마하세!”

두 젊은이는 마당에 나가 검을 뽑아 들고 서로 마주 보며 무예를 연마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독수리가 하늘을 나는 듯, 때로는 군계일학의 모습을 보이며 두 사람은 검을 휘둘렀다. 어슴푸레한 새벽 빛에 하얀 검의 빛과 차가운 검의 그림자만 보이고 그 사이로 용이 나는 듯 호랑이가 뛰는 듯 날렵한 두 사람의 모습이 엇갈렸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자 무예 연마를 끝낸 조적과 유곤은 땀을 닦고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잠깐 쉬었다.

조적이 먼저 물었다.

“현재의 정세를 봐서 천하가 반드시 어지러워질 텐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 조적과 유곤은 모두 낙양(洛陽)에서 사주수부(司州主簿)로 있었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마음도 잘 맞아서 함께 먹고 자며 서로 마음속 말을 나누었다.

유곤이 대답했다.

“현재 권세가들이 정권을 독차지하고 횡포한 세력이 도처에 있어 백성들이 살 길이 막막하니 난이 일어나면 천하는 반드시 혼란에 빠지게 될 걸세. 우리 함께 곧 일어날 중원의 전란을 피해야 하네.”

조적이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천하를 위해 살아야 하네. 그 때 가서 우리 서로 도와주면서 한 마음으로 나라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백성들을 어려움에서 구합세.”

유곤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그래야지.”

영가 5년(永嘉, 311년), 낙양이 흉노 두령 유연(劉淵)의 군대에 공략되어 백성들은 오랑캐를 피해 분분히 황하 강을 건너 남쪽으로 도주했다. 하북(河北)의 명문가인 조적의 가문도 핍박에 의해 수 백 가구의 식솔을 거느리고 남하했다. 속담에 “태평세월의 개가 될지언정 난세의 인간이 안 되겠다”는 말이 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산을 싣고 떠난 조적의 가문은 남하 길에서 풍찬노숙하며 온갖 어려움을 다 겪었다.

원래 마음이 따뜻한 조적은 남하하는 길에서 늘 노인과 어린이들을 보살피며 방법을 대서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풀어주어 조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은 또 조적을 유랑 대오의 두령으로 선출했다.

일행이 사구(泗口), 오늘의 서주(徐州)에 이르자 조적은 가족들을 안치하고 마차에 앉아 쉬면서 ‘문계기무’의 지난 일과 ‘팔왕의 난’후 부평초처럼 떠돌아 다니며 유곤의 행방도 모르는 현실을 머리에 떠올렸다. 과거의 호언장담은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데 오늘날 두 명의 열혈청년은 난세를 떠도는 유랑민이 되었던 것이다.

조적이 슬픔에 잠겨 탄식하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누가 찾아왔어요.”

조적이 머리를 드니 동생인 조약(祖約)이었다.

“이 낯선 곳에서 누가 나를 찾는다는 거니?”

이 때 한 낯선 사람이 다가와 물었다.

“그대가 조사치(祖士稚)입니까? 랑야왕(琅邪王)의 부름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치는 조적의 자(字)이다. 조적은 급히 마차에서 뛰어 내리며 물었다.

“랑야왕께서 어디 계십니까?”

그 사자(使者)가 대답했다.

“현재 랑야왕께서는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건업(建業)을 지키고 계십니다. 랑야왕께서 그대를 서주태수(太守)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자는 조적에게 임명장을 넘겨주었다.

진 나라의 여러 왕들이 서로 황위를 빼앗기 위해 혼전을 벌이는 바람에 오랑캐들이 그 틈을 타서 중원을 공격했다. 그래서 이에 앞서 범양왕(范陽王) 사마효(司馬虓)와 고밀왕(高密王) 사마략(司馬略), 평창왕(平昌王) 사마모(司馬模),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등이 조적을 불렀으나 그는 모두 거절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하고 오랑캐가 쳐들어온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사나이가 세상을 휩쓸면서 나라와 백성을 구할 때였던 것이다. 어깨의 중임을 느낀 조적은 랑야왕 사마예(司馬睿)의 임명을 받아 들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마예는 조적을 군자제주(軍咨祭酒)로 임명했다. 부임하러 떠나기 전에 조적은 가족을 경구(京口), 오늘날의 진강(鎭江)에 정착시켰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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