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조적)
제3회 북벌에 성공하다
북벌을 시작한 조적은 노주(蘆洲)에 진입했다. 그의 난제는 오랑캐 석근(石勤)이 아니라 가짜 예수자사였다. 천하가 대란에 빠지자 예주 일대의 세력들이 군사를 일으켜 장평(張平)은 스스로를 예주자사로 봉하고 번아(樊雅)는 초군태수(譙郡太守)로 자처하며 각자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평은 스스로 예주자사가 된 가짜였지만 사마예가 임명한 4품 장군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조적은 참군(參軍) 은예(殷乂)를 파견해 함께 북벌해 오랑캐와 싸우자고 장평을 동원했다.
선비 가문의 출신인 은예는 장평을 멸시해 그의 저택에 들어서자 조롱조로 말했다.
“장군은 어이하여 마구간에서 기거하는 거요?”
이어 은예는 큰 가마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저질의 솥으로는 화살촉이나 만들 수 있겠소.”
장평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하지만 은예는 여전히 붙는 불에 키질했다.
“스스로 자사로 봉하다니. 곧 죽은 목숨이 될거요.”
대로한 장평이 검을 빼서 은예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외쳤다.
“나는 조적과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다! 관문을 막고 조적의 군대가 북상하는 것을 막으라!”
조적은 일을 망친 은예와 큰 뜻을 생각지 않는 장평을 탓하며 이간계를 쓸 수 밖에 없었다. 조적은 몰래 장평의 부하인 사부(謝浮)를 매수해 장평만 제거하면 조정에 보고해서 장평을 대신해 그를 4품장군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사부는 긴급 군사사항을 보고할 일이 있다는 구실로 야밤에 장평을 찾아가 그를 죽인 다음 군대를 거느리고 조적에게 항복했다. 조적은 또 환선(桓宣)을 파견해 번아의 항복을 권유해서 초성(譙城)을 점령했다.
예주에 발을 붙인 조적은 이로써 북벌의 통로를 장악한 것이다.
당시 석근은 역사적으로 후조(後趙)라 부르는 조(趙) 나라를 건국하고 스스로 조 왕이라 자처하면서 유요(劉曜)의 전조(前趙)에 맞서고 있었다. 태흥(太興) 2년(319년), 조적은 3천명의 북벌군사를 거느리고 후조 석호(石虎)의 5만명에 달하는 기병과 준의(浚儀)에서 혈전을 벌였으나 패해 회남으로 퇴각했다. 석호는 예주를 피로 물들인 후 도표(桃豹)를 남겨 준의를 수비하게 했다.
이듬해 조적은 도표의 군사가 서대(西臺)에 주둔한 것을 보고 남문으로 준의에 진입해 동대(東臺)를 점령했다. 그리고 두 군대가 40여 일간 대치하면서 모두 군량 공급이 긴박해졌다. 한 가지 꾀를 생각한 조적이 군량 수송관에게 말했다.
“모래를 식량 주머니에 담아 1천 명의 군사들로 하여금 군량을 수송하는 것처럼 보이며 모래를 동대 위로 옮기라. 오랑캐들이 발견하면 몇몇 사람을 시켜 군량을 메고 뒤에 떨어져 오다가 오랑캐들에게 군량을 빼앗기게 하라. 군량을 오랑캐들에게 빼앗기면 성공한 것이다.”
군량 수송관은 조적의 명령대로 배치했다. 배를 곯던 도표의 부하들이 보니 군량을 수송하는 조적의 군대가 줄지어 오고 있었다. 도표의 부하들이 가까이 다가가니 군량을 수송하던 조적의 군사 몇몇이 급히 군량을 버리고 도주했다. 도표의 군사가 주머니를 열어 보니 하얀 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은 이런 쌀밥을 먹는데 우리는 겨로 된 죽도 먹지 못하다니. 이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싸우겠는가.”
기아에 허덕이던 흉노 군사의 사기가 전에 없이 저하되었다.
도표의 군사가 꾀임에 넘어간 것을 본 조적은 몰래 기뻐하며 기습을 계획했다. 이 때 정찰병이 들어와 보고했다.
“큰 일 났습니다. 석근이 부장(部將) 유야당(劉夜堂)을 파견해 1천 마리의 나귀에 군량을 실어 도표에게 보냈습니다!”
그 말에 조적이 웃으며 말했다.
“마침 잘 왔다. 유야당이라는 이 군량 수송관이 참으로 고맙구나.”
조적은 당장 부장(部將)들인 한잠(韓潛)과 풍철(馮鐵)을 준의를 오가는 변수(汴水) 기슭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군량 수송대오를 급습해 군량은 물론이고 나귀까지 전부 노획했다. 자신들의 군량 전부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도표는 더는 대치상태를 유지할 수 없음을 알고 야밤에 동연성(東燕城), 오늘날의 하남(河南) 연진(延津)으로 퇴각했다.
그것을 보고만 있을 조적이 아니었다. 조적은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추격을 명령했다.
“함잠은 봉구(封丘)로 가서 도표의 군대를 막고, 풍철은 동대와 서대를 점령해서 적군의 반격을 방어하라. 나는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옹구(雍丘)를 수비하며 여러 도시에 주둔한 석근의 군대와 결전을 벌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적의 군대가 연속 승전고를 울리자 후조의 여러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석근의 군대는 분분히 백기를 들고 동진(東晉)에 항복했다.
정권의 몰락을 포기하기 싫은 석근이 1만 명의 정예군사를 파견해 조적과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만반의 준비를 한,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북벌군사에 의해 크게 패했다. 1년 여의 시간을 들여 조적은 북벌이래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조적은 소수의 군대로 석근의 주력부대를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의 한(漢) 족 무장세력을 단합해 북벌군의 지휘를 받는 그들이 오랑캐와 싸우는 유력한 무장력이 되게 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기에 조적은 항상 주도적인 지위로 싸움마다 승리를 거두었으며 황하(黃河) 이남의 빼앗겼던 넓은 땅을 되찾아 세상에 명성을 날렸다.
잃었던 땅을 되찾은 조적은 농민들의 농경회복을 격려했으며 북벌군대도 농사를 지으면서 싸움에 임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조적은 또 솔선수범해 검소한 생활을 하고 사적인 부를 쌓지 않았으며 그의 가족들도 농사를 짓고 땔나무를 베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조적은 길가에서 유골을 보면 모두 걷어서 장례를 치르라고 군사들에게 명령했다.
조적이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고 장병들을 예의로 대한 만큼 백성과 장병들도 조적을 지지하고 따랐으며 그로써 북벌군의 위망은 점점 더 높아지고 군대의 규모도 점점 더 커졌다.
한 번은 조적이 현지의 백성들을 초청해 만찬을 차렸는데 한 노인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 생명의 은인입니다! 우리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은 조적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다행이어라 예주에 남겨진 백성들 적군에 생포되지 않았으니(幸哉遺黎免俘虜)
예주의 백성들 다시 빛을 본 것은 자애로운 어버이가 있어서이네(三辰旣朗遇慈父)
술은 담백하고 음식은 조촐하지만 노고는 잊을 수 있는데(玄酒忘勞甘瓠脯)
어떻게 그대를 칭송할까 우리 노래 부르고 춤을 추세나(何以咏恩歌且舞)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