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갈홍의 석상)
도가의 학자 갈홍
동진(東晉) 단양(丹陽) 출신의 갈홍(葛洪)은 고대 중국의 유명한 도가(道家) 학자이자 연단술사이며 의학자이다. 그는 한 때 관내후(關內侯)에 책봉되었으며 후에는 나부산(羅浮山)에서 연단술을 연구하면서 저서도 펴냈다.
연단술사로서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화학반응의 변화를 발견했고 의학자로서 그는 중국 최초로 천연두 증상을 기록했으며 도교의 이론가로서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원시 도교(道敎)을 종말 짓고 신선(神仙) 도교를 창립했다.
학자로서 그는 또 중국에서 처음으로 문장 자체의 가치를 제시하면서 문장과 품행이 모두 중요하다고 인정했으며 예술은 아름답고 다채롭다는 미학적 관념을 제출했다.
도가의 학자 갈홍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관리에서 연단술사로
골육상잔의 내분으로 낙양(洛陽)의 황궁에 검은 구름이 드리우고 조정은 날로 몰락했다.
복파장군(伏波將軍) 갈홍은 석빙(石氷)의 난을 평정한 무공으로 조정으로부터 큰 상을 받았으나 모든 상을 거절하고 더 많은 학문을 쌓고자 기서(奇書)를 찾아 낙양으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전란이 일어나 도읍의 객사에 머물 수밖에 없던 갈홍은 달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팔왕(八王)의 난으로 북으로 가는 길이 끊어지고 진민(陳敏)의 역모로 남으로도 갈 수 없게 되었구나.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달빛을 밟으며 거닐던 갈홍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나는 날 때부터 욕심이 없고 책만을 좋아했으며 놀이를 싫어했다. 또 비록 선비 가문에서 태어났고 부친이 소릉태수(邵陵太守)라는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여러 해 전에 부친은 돌아가고 우리 가문은 몰락했다. 어릴 때 나는 산에 올라 땔나무를 해다 팔아서 공부에 필요한 종이와 붓을 장만했지. 나는 지금까지 바둑판에 가로 세로 몇 개의 줄이 있는지도 모르고 도박판에서 주사위를 어떻게 던지는지도 모른다. 나는 늘 집안에 들어박혀 책만 읽고 손님이 오는 것도 싫어하며 함께 여행을 떠날 벗도 없다. 아, 나는 정말 말주변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사람이구나. 하지만 나는 서적의 참 뜻을 탐구하기 위해 노고도 마다하고 먼 길을 떠나려 한다. 또 많은 책을 탐독하고 특히 신선의 도가 양생술을 좋아해 적지 않은 성과도 거두었다. 나는 정은(鄭隱) 도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모든 도술(道術)을 다 배웠으며 또 남해태수(南海太守) 포현(鮑玄)을 스승으로 모셔 점으로 앞날을 알 수 있기를 환상했다. 포현 스승님께서는 말주변이 없는 나를 아주 예뻐하시어 사위로까지 삼으셨다. 스승님께서는 또 나의 의술을 좋아하시어 내가 세상 사람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으셨다. 아, 스승님들은 모두 난을 피해 심심산중으로 들어가셨는데 나만 단양(丹陽)에 남아 무슨 난을 평정한다고? 그러다가 지금 봐라. 벼슬하기 싫어서 기서를 찾아 낙양으로 가려는데 이 곳에 발이 묶여 가도 오도 못하게 되지 않았는가…
갈홍은 전란에도 칼과 창의 숲을 뚫고 배를 세내서 고향으로 가려고 나루터에 갔다가 지인 혜함(嵆含)을 만났다. 혜함은 갈홍이 발이 묶여 오도 가도 못한다는 말을 듣자 아주 기뻐했다.
“이는 운명적인 만남이지 않나? 내가 지금 광주자사(廣州刺史)로 가는데 자네를 참군(參軍)으로 요청해서 함께 가면 좋지 않겠나?”
갈홍은 저 멀리 영남(嶺南)에 위치한 광주에 가면 중원(中原)의 전란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흔쾌히 동의했다.
“좋네. 함께 가세. 정치 중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광주가 지금은 세상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겠네.”
하지만 광주도 중국의 성읍(城邑)이지 무릉도원이 아니었다. 혜함은 광주자사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복수하러 온 곽려(郭勵)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갈홍은 더더욱 부귀도 뜬 구름이고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는 생각에 빠져 속세를 떠나 도술을 연마할 일념으로만 차 있었다.
혈혈단신으로 광주에 발이 묶인 갈홍은 생계를 위해 의술을 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는 높은 의술을 가지고 있었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재도 도처에 있었다. 그 바람에 갈홍은 어쩌다가 광주에서 명성이 자자한 의사가 되었고 돌림병에 대해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날씨가 무더운 광주에는 돌림병이 많았고 이는 사고하기를 좋아하는 갈홍에게 많은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 동진(東晉)의 새 정권이 세워졌고 갈홍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땅이 넓지 않은 강남은 사회가 그나마 안정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갈홍에게 뜻밖에 벼슬 운이 터졌다. 진원제(晉元帝)가 과거 갈홍이 세운 공을 생각해 그를 관내후(關內侯)로 책봉하고 구용(句容)의 2백 가구를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그를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부르고 저작랑(著作郞) 간보(干寶)가 그를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추천했음에도 갈홍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교지(交趾)에서 주사가 난다는 말을 듣고 구루현령(句漏縣令)으로 가게 해달라고 주청을 올렸다. 하지만 황제는 갈홍의 주청을 받아 주지 않았다.
“문무를 겸한 그대 같은 인재를 어떻게 그렇게 궁벽하고 먼 곳에 있는 작은 현의 현령으로 가게 하겠소? 그러면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격이 아니겠소? 그대는 갈 수 없소.”
갈홍이 다시 주청을 올렸다.
“소신은 교지의 부귀와 영화를 탐내서가 아니며 일부러 도읍을 멀리 떠나고자 함도 아닙니다. 소신은 다만 그곳에서 주사가 난다는 말을 들었는지라 금단(金丹)을 만들어서 세상에 복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소신이 뜻을 펼 수 있도록 폐하의 윤허를 바랍니다.”
진원제는 갈홍의 요구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 그제서야 갈홍의 주청을 받아주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