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2 08:47:54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정화 편: 제1회 내시, 정화로 개명하다

(사진설명: 정화의 석상)

대원정의 항해가 정화

인류의 항해사에는 7번에 걸친 서양원정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30여개 나라와 지역에 이르는 인류 탐험사의 위대한 쾌거를 이룩한 뛰어난 항해가가 있다.

그는 또 해상 실크로드의 개척자이다. 그는 6백여년 전 방대한 선단을 거느리고 실크와 도자기, 약재 등을 남해와 인도양 연안의 여러 나라들에 가지고 간 평화의 사절이기도 하다.

그가 바로 명(明) 나라의 유명한 항해가 정화(鄭和)이다. 정화를 기념하기 위해 남사(南沙) 제도의 한 섬은 정화섬으로 명명되고 중국인민해방군의 훈련함과 대만해군의 한 순방함(巡防艦)도 정화함으로 명명했으며 미국 보잉사의 첫 지구 일주 항공기도 정화호로 명명했다.

대원정의 항해가 정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내시, 정화로 개명하다

“신장은 9척(尺), 허리둘레는 10위(圍), 얼굴은 네모나고 코가 작으며 미목이 뚜렷하고 귀가 크며 치아는 조개 같이 하얗고 걸음은 날렵하고 목소리는 우렁차다…”

이는 명 나라 어용 관상가 원충철(袁忠徹)이 정화를 형용한 말이다. 이 말에서 정화는 풍채가 늠름하고 몸집이 장대한 미남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10여 년 전에 그는 거세를 당하고 내시가 되었다. 명 왕조는 정복을 당한 전 왕실의 가족 중 남자애는 내시로 만들고 여자애는 관기(官妓)로 보냈다.

때는 홍무(洪武) 14년(1381년) 겨울이었다. 곤양성(昆陽城)의 하늘에는 구름이 끼고 비가 그칠 줄 몰랐다. 원(元) 왕조 함양왕(咸陽王)의 제6세 손이자 세습 전양후(滇陽侯)인 마하지(馬哈只) 일가가 화를 당하게 되었다. 부통수 남옥(藍玉)이 이끄는 명 왕조의 군대가 곤양성에 쳐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남옥은 전양후의 차남인 10살의 마삼보(馬三保)가 준수하게 생긴 것을 보고 거세시킨 후 연왕(燕王) 주체(朱棣)에게 선물했다.

그로부터 마삼보는 연왕의 내시가 되었다. 다행히 마삼보는 어릴 때의 참상을 잘 기억하지 못하고 연왕에게 충성하며 그를 따라 다녔다. 연왕이 명 왕도의 국도인 금릉(金陵)에 있을 때도, 봉지인 북평(北平)에 갈 때도 그는 언제나 연왕부에서 지내며 연왕의 신변을 지키는 호위가 되었다.

그 후 정난(靖難)의 변에서 기민하고 지혜와 용기를 겸한 마삼보는 생사를 넘나들며 수차 공을 세워 연왕의 눈에 들었다.

정난의 변에서 성공적으로 황권을 탈취한 연왕이 보위에 올라 영락(永樂)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봉지인 북평을 북경(北京)으로 개명하고 명 왕조의 국도를 금릉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겼다.

영락제는 자신이 연왕으로 있을 때의 다른 부하들은 모두 승진되어 조정의 중요한 대신이 되었지만 유독 마삼보만이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열등한 내시로 있는 것을 보고 개명으로 그의 신분을 향상시키고 그에 대한 자신의 은총을 표시했다. 마삼보가 하북(河北) 정주(鄭州), 오늘날의 하북 임구(任丘)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것에 비추어 영락제는 그에게 정씨 성을 하사하고 정화라 개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영락제는 또 정화를 품계 4품에 속하고 사례감(司禮監)에 버금가는 내관감총관(內官監總管)으로 승진시켰다.

영락제에게는 포상을 줄 수 없는 또 다른 한 명의 은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법명을 도연(道衍)이라고 하는 스님 요광효(姚廣孝)이다. 주체는 바로 요광효의 끈질긴 부추김과 기획에 의해 정난의 변을 일으켰고 궁극적으로 황권 탈취에 성공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광효가 없으면 주체는 보위에 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주체는 황제가 되었지만 요광효는 아무런 포상도 요구하지 않고 여전히 경수사(慶壽寺)에서 기거했다. 미안한 마음이 든 영락제는 요광효를 태자소사(太子少師)로 책봉해 태자의 학문을 돕게 했다.

그 날 황제의 어명에 의해 불경 진본(珍本)을 전달하러 절에 온 정화를 보고 요광효가 말했다.

“그대들 색목인(色目人)은 모두 회교도(回敎徒)요. 그대 부친은 메카에 참배도 다녀왔기에 순례자라는 의미로 ‘하지’라 불리는 것이오. 마(馬)라는 성씨도 무함마드의 한역(漢譯)이오. 그대는 아랍 부하라 국왕 무함마드의 자손이오.”

“스님께서는 참으로 견문도 넓으시고 학문도 두터우십니다. 저도 모르는 제 조상의 내력까지 손금 보듯 환하게 꿰뚫고 계시는군요. 참으로 감복하여 마지 않습니다.”

“폐하께서 성은이 망극하게 그대에게 정(鄭)씨 성을 하사하셨는데 나를 따라 불교에 귀의하겠소?”

요광효가 제왕의 스승이자 황제의 유일한 벗이며 영락제가 그의 말을 가장 잘 듣는다는 것을 영락제의 신변에서 20년을 보낸 정화가 모를 리 없었다. 총명한 정화는 얼른 대답했다.

“스님의 입문(入門) 제자가 될 수 있다면 저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고 삼생(三生)의 행운입니다!”

정화의 이 말은 아첨을 위한 빈말이 아니었다. 10살 때부터 연왕부에서 살아온 정화에게 이슬람신앙은 머나먼 기억에 불과하고 찰나의 꿈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찌 머나먼 꿈을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겠는가? 거기다가 황제의 영향을 받은 정화도 박식하고 불교의 이치를 심오하게 파악한 요광효에게 진심으로 탄복하고 그를 존경했다. 그러니 그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정화로 말하면 인생의 행운이었다!

요광효는 정화가 이렇게 선뜻 대답하자 신나서 말했다.

“오늘부터 나는 너를 제자로 받아 들인다. 보살계(菩薩戒)를 받게 하고 복선(福善)이라는 법호를 내린다. 어떠냐?”

“제자 정화 스승님께 인사 드립니다!”

정화는 고마운 마음으로 급히 요광효에게 세 번 큰절을 올렸다.

(다음 회에 계속)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