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08:50:40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정화 편: 제2회 동양원정에서 성과를 올리다

(사진설명: 정화의 석상)

제2회 동양원정에서 성과를 올리다

영락(永樂) 3년(1405년) 정월 초하루, 영락제(永樂帝)는 경수사(慶壽寺) 밀실에서 요광효(姚廣孝)와 반나절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락제가 은사(恩師)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이 2년간 연해의 성(省)들이 어명에 따라 3백 척의 큰 배를 만들었습니다. 위풍당당한 해상의 군대를 만들만한 규모입니다. 올해 여름 계절풍이 불면 장병들이 서양원정을 할 수 있습니다. 정화에게 이 2만여명의 수군(水軍)을 통솔하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락제의 말에 요광효가 반문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방대한 수군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십니까?”

“짐의 조카 윤문(允炆)의 생사를 지금도 모르고 그 옥새도 행방불명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가 옥새를 가지고 해외로 도주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짐이 위풍당당한 선단을 무어 서양에 가면 해외의 그 나라들이 간담이 서늘해서 벌벌 떨 텐데 감히 윤문을 받아 주겠습니까? 그 기회에 윤문을 포박해서 우리 수군에 바쳐 포상을 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폐하의 수군이 그렇게 드높은 기세로 서양에 간다면 건문제(建文帝)가 정말로 서양의 나라에 숨어 있다 해도 놀라서 더 멀리 도망칠 것인데 폐하께서 이렇게 애쓰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폐하께서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시지요?”

요광효의 말에 영락제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은사님 안목이 예리하십니다. 짐의 고충을 보셨군요. 아아, 세상 사람들이 건문제를 대신해 억울함을 호소하니 짐이 건문제보다 더 잘해야 사람들이 감복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방대한 규모의 수군을 조성한 것은 바로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러 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공을 바치러 오는 나라가 많을수록 짐이 좋은 황제라는 것을 밝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요광효도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그 이유라면 그럴듯합니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 방대한 수군을 야망이 있는 장군에게 맡기면 서양에서 강대한 국가를 세워 천자의 나라 대명(大明)에 대항할 기회를 주는 것이고 그렇다고 천군만마를 통솔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면 위풍이 당당한 이 수군은 순식간에 쟁반에 흩어진 모래처럼 오합지졸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충성심도 있고 신뢰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겨야 하는데 그런 사람을 찾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관상가 원충철(袁忠徹)에게 물으니 그는 이 수군을 정화에게 통솔시키면 어떻겠느냐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화가 풍채가 늠름하고 용모가 준수한 장군감이라 그럴 능력이 있다고 하는데 은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말이 틀림이 없습니다. 수군을 통솔해 서양원정을 가서 천자의 나라를 대신하는 것은 어느 개인의 일이 아니라 나라의 일입니다. 천자의 나라 사절을 통솔하려면 반드시 위풍이 당당하고 용모도 잘 생겨야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두려워하고 존경심이 생길 것입니다. 저도 정화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불교가 아니면 이슬람교를 신앙하는데 마침 정화는 이 두 가지 신앙을 다 가지고 있으니 서양 여러 나라 국왕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역시 그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여건입니다.”

요광효의 말에 영락제는 크게 기뻐서 말했다.

“정화는 또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견식이 넓고 총명하고 예지로 넘쳐 무슨 일이 닥치든지 늘 느긋합니다. 망망한 바다에서 대풍을 만나거나 해적과 조우해도 그는 기필코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할 것입니다. 보아하니 정화 말고는 이 중임을 떠멜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광효가 물었다.

“정화는 금방 왜국(倭國)에 사절로 갔다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동양원정 사명을 잘 완수했습니까?”

“이번에 정화는 왜국에 사절로 가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법으로 왜인들을 대처했습니다. 일본국왕이 우리 나라 연해에서 살인과 강탈을 저지른 왜구(倭寇)를 잡아다 바쳤는데 그는 일본국의 법령에 따라 그들을 처리했습니다. 불을 지피고 왜구를 포박한 다음 시루에 쪄서 죽였지요. 그야말로 통쾌한 일이고 일본국왕도 할 말을 잃었습니다. 정화는 또 막부장군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에게 어지를 전하며 왜국의 법에 의해 스스로 해상의 왜구를 소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또 아시카가 요시미쓰더러 대명(大明)의 하사품을 받고 천자의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게 했으며 ‘감합무역조약(勘合貿易條約)’을 체결하고 왜국이 속국의 명의로 우리와 조공무역을 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와 위엄을 병행한 결과는 심히 좋습니다. 짐은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했고 그는 회답서한에서 자신을 대명의 신하 일본국왕 아시카가 요시미쓰라고 칭했습니다. 하하하, 정화가 서양원정을 가면 서양의 여러 나라들도 동양의 왜국처럼 우리 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로 칭할 것입니다. 그럼 위풍이 당당한 이 수군과 이토록 방대한 선단을 만드는데 돈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럴 가치가 있지 않겠습니까.”

요광효가 영락제의 말을 받았다.

“정화는 확실히 인재입니다. 그는 또 내시이기 때문에 절대로 역모를 꾀해서 왕이 될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아하니 선단을 이끌고 서양 대원정을 떠날 사람은 정화 한 사람뿐입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브루나이 동쪽의 해양을 동양(東洋)이라 하고 브루나이를 기준으로 그 서쪽의 바다를 서양(西洋)이라 불렀다. 당시 동양의 주요 나라는 일본이어서 중국 민간에서는 지금도 일본인을 동양인이라 부른다. 정화가 오늘의 중국 남해와 인도양을 망라한 서양으로 원정을 떠난다는 것은 중국과 최소 지구 반 바퀴 거리를 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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