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왕희지 사당의 일각)
제2회 스스로 벼슬을 내놓다
사람들은 회계내사(會稽內史)와 영우장군(領右將軍)을 지낸 왕희지를 왕우군(王右軍)이라 불렀지만 왕희지는 벼슬에는 관심이 없이 여전히 일편단심 서예에만 빠져 있었다.
어느 하루,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王獻之)가 못물이 검게 변한 것을 보고 놀라서 외쳤다.
“아버님, 못물이 다 검게 변했어요! 우리가 너무 서예 연습에 빠진 게 아닐까요?”
아들의 말에 왕희지는 머리도 들지 않고 여전히 붓을 놀리며 말했다.
“이게 뭐 큰일이냐? 장지(張芝)는 연못 가에서 서예를 연습하며 붓을 연못에 씻었는데 연못 물이 모두 검어졌다고 들었다. 우리가 장지처럼 서예에 빠지고 장지처럼 글쓰기에 열중하면 장지처럼 멋진 서예를 써서 후세 사람들이 모사하는 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왕희지 부자가 마당에서 서예를 연습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왕희지의 사촌형 왕열(王悅)이 들어왔다.
“너는 꾀 부리지 말고 계속 연습하거라.”
왕희지는 왕헌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왕열을 안내해서 거실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왕열이 입을 열었다.
“그 날 폐하께서 제사를 떠나시면서 축사를 널판자에 쓰라고 너에게 명하신 다음 그대로 조각하게 하시지 않았냐? 그 조각사는 너의 먹물 흔적을 따라 널을 깎았는데 널 속에 스며든 먹물이 아무리 깎아도 계속 보여 널을 세 푼(三分)이나 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각사는 너의 필력이 대단하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해서 사람들은 너의 서예가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고 웅혼하고 힘 있는 너의 필력이 입목삼분(立木三分)했다고 칭찬한다.”
왕희지는 조용하게 사촌 형의 말을 들으며 얼굴에 희색도 띄우지 않았다. 그리고 왕열의 말이 끝나자 담담하게 물었다.
“오늘 이 말씀하러 오신 건 아니지요?”
“물론 아니지. 다른 일을 알려 주려고 왔다. 회조(懷祖)가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임명됐다. 네가 그의 부하가 된 거지.”
그 말에 깜짝 놀란 왕희지는 어디서 큰 돌이 날아와 가슴을 누르는 듯 가슴이 답답하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열은 왕희지의 얼굴색이 어두워지자 탄식했다.
“회조는 솔직하고 덕행이 너와 이름을 나란히 한다지만 그 급한 성격이 어떻게 너의 대범함과 비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그가 너의 머리 위에 올라가 너의 상사가 되다니? 너의 기분을 알만 하다.”
왕희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왕열이 말을 이었다.
“너에게서 이런 얼굴색을 본적이 없구나. 기분이 아주 더러운 거니? 이제 그만 말하자. 너에게 빨리 이 일을 알려줘야 될 거 같아서 왔다. 미리 준비하라고 말이다.”
왕희지는 왕열을 문 앞까지 배웅하며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그의 부하가 된다는 일이 그냥 창피할 뿐이에요.”
왕열은 말 없이 미소를 머금고 마차에 올라 돌아갔다.
자가 회조인 왕술(王述)은 당시 왕희지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고상하고 솔직한 군자였다. 어느 날, 왕희지가 왕술을 찾아 그의 집에 가니 그는 마침 식사 중이었다. 왕희지는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왕희지가 곁에서 왕술이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리는데 왕술은 마침 젓가락으로 삶은 달걀을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달걀을 제대로 찍지 못하자 왕술은 화를 내면서 손으로 달걀을 집어 바닥에 던졌다. 그런데도 달걀은 터지지 않고 바닥에서 뱅뱅 돌며 멈추지 않았다. 왕술은 더욱 화가 나서 나막신으로 마구 밟았으나 그래도 계란을 터지지 않고 대굴대굴 굴렀다. 왕술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을 듣지 않는 계란을 노려 보더니 손으로 계란을 집어 입에 넣고 잘게 씹었다가 다시 뱉어내고는 헐떡거리며 말했다.
“이 작은 계란 따위가 감히 나에게 대들다니. 정말 미치겠네!”
그 과정을 지켜본 왕희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성격 하나 급하네. 점잖지 못하고!”
그로부터 왕희지는 왕술을 하찮게 보았다. 그리고 성격차이가 현저한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지낼 수가 없었다.
왕술은 회계내사가 된 후 병사한 모친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왕술의 직위를 이어받은 왕희지는 왕술의 집으로 한 번 조문을 갔다 온 후 두 번 다시 왕술과 만나지 않았다. 부모상을 당해 집에서 근신하던 왕술은 마음이 슬퍼 손님이 오는 소리만 나면 왕희지가 보러 오는 줄 알고 기다렸다. 하지만 왕술이 모친의 묘소를 지키는 몇 년 동안 왕희지는 한 번 왔다간 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왕술은 그런 왕희지가 원망스러웠고 거기다가 왕희지가 지인에게 “회조는 상서(尙書)감에 그치는데 회계내사가 되어 우쭐거린다”고 말한 것을 듣고 더욱 분노했다.
그런데 그 왕술이 지금 양주자사가 되어 왕희지가 곧 그의 부하가 되게 된 것이니 왕희지가 어찌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마음이 울적해난 왕희지는 며칠 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양주로 부임하러 떠나기에 앞서 왕술은 회계군을 한 바퀴 돌며 지인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그들의 축복을 받았는데 유독 왕희지만은 찾지 않았다. 그날 저녁 왕희지는 갑자기 창피를 당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날이 밝자 부하 관리를 불러 명령했다.
“지금 당장 도성에 올라가서 조정에 요구를 제출하라.”
부하 관리는 금방 잠에서 깬 듯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무슨 요구요? 저는 요구가 없는데요.”
“나에게 요구가 있다. 네가 가서 대신 말하거라. 우리 회계군이 너무 크니 회계군을 양주에서 분리해서 월주(越州)라는 새로운 주(州)를 하나 더 만들겠다고 말이다. 지금 곧 출발하거라.”
왕희지의 부하가 금방 떠나자 왕술이 왕희지를 찾아왔다. 마음이 불편한 왕희지가 어떻게 왕술에게 축하를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왕술이 차도 받지 않고 겉치레로 말만 했다.
“이제부터 우리 함께 양주에서 조정을 위해 일해야 하겠소. 그러니 일소(逸少)형이 많이 지지해주시오! 지금 곧 부임하러 가야 하니 이제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 오리다. 그럼 그만 물러갑니다!”
말을 마친 왕술이 왕희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휙 나가는 바람에 왕희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왕술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물론 조정은 왕희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 사람들이 왕희지를 비웃었다. 수치를 느낀 왕희지가 아들들에게 말했다.
“나는 회조보다 못한 게 없는데 왜 직위는 그보다 이렇게 낮은 거냐? 혹시 너희들이 회조의 아들들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
왕헌지가 승복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는 모두 서예가가 아닙니까? 그 왕탄지(王坦芝)는 입만 번지르르 하구요.”
왕희지가 화를 냈다.
“‘훌륭한 덕성을 가진 자는 치가빈(郗嘉賓)이요 왕문도(王文度)는 강동(江東)에서 독보적이라’는 민요를 들은 적이 없느냐? 보아라! 강동독보(江東獨步)! 왕탄지가 말솜씨만 가지고 이런 평가를 받겠느냐?”
왕희지의 말에 왕헌지는 할말을 잃었다.
왕희지는 병을 핑계로 회계군을 떠났다. 부모의 묘소에 이른 왕희지는 부모에게 제사를 지낸 후 이렇게 맹세했다.
“지금부터 내가 만약 벼슬을 탐내고 직위를 가진다면 불효자일 것이다! 나의 이 맹세는 진실되고 솔직함이 하늘에 뜬 태양과 같을지어다!”
왕희지는 부모의 무덤 앞에서 맹세한 후 벼슬을 그만 두었다.
(다음 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