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8:54:07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정화 편: 제3회 서양원정을 수차 행하다

(사진설명: 정화의 동상)

제3회 서양원정을 수차 행하다

망망한 바다는 끝없이 넓었다. 영락(永樂) 7년(1409년) 10월, 48척의 보선(寶船)으로 조성된 방대한 선단이 해상에서 항행했다. 돛은 활짝 펼쳐지고 깃발은 총총했다. 정화(鄭和)는 요광효(姚廣孝)와 함께 갑판에 서서 바다경치를 구경했다.

정화가 입을 열었다.

“스님, 우리의 보선은 길이가 44장(丈,1장=10자) 4자이고 너비는 18장입니다. 선실도 4층이고 돛대는 9개, 돛은 12개입니다. 단정코 이 세상에 우리 이 보선보다 더 큰 배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망무제한 바다에서는 이렇게 큰 배도 그렇듯 미미해서 마치 낙엽처럼 망망한 천애지각을 떠도는 듯 합니다. 바다를 마주하면 저는 늘 감개무량해집니다.”

75세 고령의 요광효가 탄식했다.

“그래. ‘하루살이가 광활한 천지에 놓이고(奇蜉蝣於天地) 좁쌀 한 톨이 창해에 떠 있는 것과 같구나(渺滄海之一粟)’. 짧은 인생에 어찌 끝없이 망망한 바다와 무궁한 우주에 감개무량하지 않겠느냐? 너는 벌써 세 번째로 서양원정을 떠나는데도 이렇게 느낀 바가 많느냐? 칠십고래희(七十古來稀)의 나도 첫 서양원정에서 망망한 바다에 몸을 두니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게 되는구나.”

“서양원정은 한 번 떠나면 2년이 걸립니다. 처음 서양원정을 떠날 때도 태창(太倉)에서 출발했는데 그 때 서양에 들어선 후 저는 눈물이 글썽해졌습니다. 동양이 아니라 서양으로 원정을 떠났으니 말이죠. 바닷길은 멀고 마음 속에 두려움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는 서른 네 살이었는데 지금 벌써 마흔을 바라보는군요. 인생은 참으로 찰나에 그칩니다.”

“네가 처음으로 서양원정을 떠날 때 구항(舊港, 오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근처에서 해적을 만나고 자바에서는 내전에 맞닥뜨리지 않았느냐. 심히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네가 해적 두령 진조의(陳祖義)를 생포하고 자바 토착민들의 오해를 풀었지. 그래서 폐하께서 너를 치하하셨지.”

“당시 자바국의 동왕(東王)과 서왕(西王)이 내전을 벌여 동왕이 패전하고 서왕이 동왕의 땅을 차지했습니다. 우리가 무역을 하려고 상륙하자 서왕은 우리를 동왕의 사람으로 잘못 알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장병 170명이나 목숨을 잃었죠. 후에 서왕은 자기가 죽인 것이 동왕이 아니라 천자의 나라 군사인 것을 알고 아주 두려워하면서 황금 6만냥을 배상금으로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그 때 만약 제가 침착하지 않고 복수에 급급해했다면 필연코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우리가 그들을 침략하러 간 줄로 잘못 알게 되겠지요. 그 번에 저는 2만 8천명의 군사를 거느렸는데 비밀리에 이 일을 폐하께 말씀 드렸습니다. 폐하께서는 기왕 오해라면 복수도 하지 말고 배상금도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서왕은 감동되어 그로부터 우리 대명(大明)의 우방(友邦)이 되었습니다. 그는 해마다 사절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습니까.”

이 때 부사(副使) 왕경홍(王景弘)이 다가와 말했다.

“곧 만라가(滿剌加, 오늘의 말레이시아 말라카)에 이르게 됩니다. 갑판에는 바람이 세니 스님께서는 선실로 돌아가시지요.”

정화는 요광효를 안내해서 선실로 돌아가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론산(錫蘭山, 오늘의 스리랑카)에 가서 불아(佛牙)를 맞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만라가의 두령을 왕으로 책봉하고 무역 중계소로 사용하기 위한 창고도 지어야 합니다. 만라가에서는 침향목(沉香木)과 황숙향(黃熟香)이 아주 유명합니다.”

“그럼 만라가에서 좋은 침향목을 가져다 불상을 만들고 싶은데 되겠느냐?”

요광효의 말에 정화가 얼른 대답했다.

“왜 안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저에게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다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시암(暹羅)의 속지인 만라가는 인구가 적어 늘 인국의 괴롭힘을 받았는데 우리가 그들의 두령을 국왕으로 책봉하고 만라가 왕국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들은 고마운 마음에 우리에게 제일 좋은 향료를 조공으로 바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화의 군사들은 만라가에서 너비 아홉 자, 길이 아홉 장(丈)에 달하는 침향목 여섯 그루를 얻었다.

이 기이한 보물을 본 요광효가 말했다.

“침향이란 고목에서 분비된 수지(樹脂)를 말하는데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도 이 세상에 이렇게 크고 이렇게 향기로운 침향목이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구나. 이 침향목으로 불상을 조각하면 반드시 자자손손 전해지는 국보가 되고 가장 소중한 불상이 될 것이다.”

만라가를 출발한 선단은 실론산에 이르러 명 황제의 명에 따라 실론산사(錫蘭山寺)에 금은기물을 보시하고 <보시석란산불사비 (布施錫蘭山佛寺碑)>를 세웠으며 그 과정을 기록해서 문자로 남겼다.

그리고 선단은 마지막 도착지 고리(古里)에 이르러 무역을 하고 귀로에 올라 불아를 영접하기 위해 실론산으로 다시 돌아왔다. 실론산 국왕은 정화의 배에 기이한 보물이 가득한 것을 보고 흑심이 생겨 전국의 힘으로 정화의 선단을 포위해 선단과 보물을 빼앗으려고 작심했다. 실론산 국왕은 정화와 왕경홍, 요광효 등을 궁중 잔치에 초대한 동시에 암암리에 5만의 군대를 파견해 정화의 선단을 포위하게 했다. 그리고 통나무로 길을 막아 정화가 선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도 했다. 주연이 시작되자 정화는 실론산 국왕의 얼굴에 당황하는 기색이 어리고 마음도 딴 데 가 있는 것을 보고 필경 무슨 꿍꿍이가 있다고 판단해서 술에 취한 척 하며 앞당겨 잔치를 파했다. 그날 저녁 정화는 2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왕성(王城)을 급습해 국왕과 그의 가족을 생포했다. 한편 정화의 선단을 포위하려던 실론산의 군사는 포위는 고사하고 선단을 지키던 군사의 공격에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영락(永樂) 9년(1411년) 6월, 정화의 선단은 온갖 보물을 가득 싣고 귀항했다. 요광효는 불아를 경수사(慶壽寺)에 공양해 명나라와 서양 각 나라들간 종교교류의 역사를 열었다.

정화가 실론산 국왕과 그 가족을 황제에게 넘기자 조정의 문무대신들이 모두 ‘천자의 나라를 범했으니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락제는 실론산 국왕이 아직 개화되지 못해 무지한 것을 가엾이 여겨 그와 그의 가족을 모두 살려주었다. 영락제는 또 예부(禮部)에 명해 실론산국에서 현자(賢者) 한 명을 물색해 실론산 국왕으로 책봉하고 그가 원 실론산 국왕과 그 가족을 실론산으로 데려가게 했다.

만라가의 국왕이 왕후와 신하 등 5백여 명을 데리고 정화의 선단을 따라 조공을 바치러 왔다. 영락제는 그들에게 많은 실크와 도자기를 선물로 주고 배까지 하사했다. 이로써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서 명 왕조의 성망은 날로 더 높아졌고 조공을 바치러 오는 나라도 점점 더 많아 30여개국에 달했다.

정화의 서양 대원정은 사면팔방에서 여러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러 오도록 하기 위한 영락제의 기상천외한 행동이며 명 왕조의 체면을 위한 공정으로 밑지는 장사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서양원정을 한 번 떠나면 엄청난 물력과 인력이 소모되었고 서양의 많은 소국이 조공을 바치러 왔지만 황제가 그들에게 내린 선물은 통상 조공 물품에 비해 몇 십 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이런 견해도 다소 이치가 있지만 정화의 서양원정이 명 왕조 영락연간 인구가 많고 군력이 강하며 과학기술이 앞서가는 중국의 국력을 보여주고 또 세계 대항해시대의 선구자인 정화를 만들었으며 중국인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정화의 선단은 군력이 아주 강해서 이르는 곳마다 대적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정화는 성을 점령하고 국토를 넓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정화는 침략자가 아니라 평화의 사절이었다. 이 점이 바로 정화의 서양원정이 콜롬보의 아메리카 대륙발견과 다른 점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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