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8:56:50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정화 편: 제4회 항해가, 바다의 품에 잠들다

(사진설명: 정화의 동상)

제4회 항해가, 바다의 품에 잠들다

집채 같은 파도가 밀려오고 바다와 하늘이 하나가 되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이 남해를 휩쓸었다. 여섯 번째 서양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던 정화(鄭和) 선단은 고향을 눈앞에 두고 태풍과 조우했다. 거대한 보선(寶船)은 마치 흉악한 해신(海神)의 수중에 든 장난감처럼 파도에 부딪치고 바람에 밀렸다. 이번에는 영락없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고 생각한 많은 장병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 때 복건(福建) 출신의 한 부장(副將)이 바다의 여신 마조(馬祖) 상을 꺼내 놓고 함께 기도하자고 말했다. 신기하게도 마조참배를 마치자 바다는 갑자기 포효를 멈추고 해수면도 다시 고요해졌다. 절망 속에서 깨어난 장병들이 높은 소리로 합창했다.

“마조! 마조!”

선덕(宣德) 5년(1430년) 5월의 어느 날, 유도(留都) 남경(南京) 수비(守備) 정화는 예와 마찬가지로 유명무실한 관아에 앉아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과거와 눈부셨던 자신의 여정을 돌이켜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성조(成祖) 선황(先皇)께서 붕어하신지 7년이 지나고 인종(仁宗) 선황께서 붕어하신지도 6년이 흘렀다. 북경(北京)의 황궁에 계시는 선덕(宣德) 폐하께서는 남경에서 죽기를 기다리는 이 정화를 기억이나 하실까? 인종 선황께서는 국고가 비고 재력이 딸린다는 이유로 서양원정을 윤허하지 않으셨다. 머리 속에 바다만 있고 바다를 떠날 수 없는 나는 비록 유도의 최고 관직에 있기는 하지만 매일 할 일 없이 허송세월하며 마음은 죽은 지 오래다.”

나이 예순을 바라보는 정화는 마음이 죽었다고 탄식하면서도 여전히 선단을 이끌고 재차 서양원정을 떠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네 번째 서양원정에서는 고리(古里)를 지나 페르시아까지 이르렀으며 다섯 번째 원정에서는 흑인들이 사는 곳에 이르러 상서로운 짐승인 기린까지 폐하께 찾아 드렸다. 그 번에 귀국할 때는 17개 나라의 사절들이 함께 우리 대명(大明)에 와서 조공을 바쳤다. 그들은 기린과 코끼리 등 기이한 짐승을 폐하께 진상해서 폐하께서는 심히 즐거워하셨다. 이제 또 서양원정의 기회가 있으면 흑인의 나라와 그 서쪽의 나라에까지 가서 천자의 나라 대명의 위세를 떨치고 싶은데 언제 또 원정을 떠날 수 있을까.”

정화가 말하는 흑인의 나라들이 바로 오늘날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케냐, 모잠비크이다.

정화가 추억에서 깨어나자 마침 선덕황제의 어지가 남경에 도착했다. 선덕황제는 조공을 바치러 오는 서양 나라들이 다소 감소된 원인이 해외에서 천자의 나라 대명(大明)의 위세가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재차 선단을 거느리고 서양원정을 해서 대명의 위세를 진작시키라고 정화에게 명령했다.

이에 정화가 신바람이 나서 준비하는데 같은 내시이자 절친인 왕경홍(王景弘)이 찬물을 끼얹었다.

“정 형, 정 형은 이제 곧 회갑을 맞게 됩니다. 이번에 갑자의 해에 원정을 떠나면 또 몇 년이 걸릴 텐데 천애지각에서 죽을까 두렵지 않습니까?”

왕경홍의 말에 정화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성조 선황께서는 북원(北元)을 완전히 격파하기 위해 노년에 불편한 옥체도 마다하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막북(漠北)까지 갔다가 사막에서 붕어하셨는데 내 목숨이 뭐 대수인가? 선황의 성은이 망극하시어 내가 수군과 선단을 이끌고 여섯 번이나 서양원정을 해서 대명의 덕정을 널리 선양해 사면팔방에서 조공을 바치러 오게 하지 않았소? 지금 폐하께서 나를 잊지 않으시고 재차 서양원정을 하라고 하시는데 저 하늘과 바다 끝에서 죽는다 해도 그건 내가 원하는 바이오! ‘청산 곳곳에 충성을 다 한 병사들이 묻혀 있는데(靑山處處埋忠骨) 굳이 말에 시신을 싸서 돌아갈 필요가 있겠는가(何必馬革裹屍還)!’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보기에 ‘뼈를 묻는데 왜 반드시 고향이어야 하겠소(埋骨何須桑梓地) 인생에서 청산이 아닌 곳이 없는데(人生無處不靑山)!’”

정화의 말에 감동된 왕경홍은 감탄만 연발했다.

선덕 5년(1430년) 12월 초엿새, 6개월의 준비를 거쳐 정화는 2만 7천 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61척의 선박을 이끌고 남경 용강관(龍江關)에서 기항해 일곱 번째의 서양 대원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즉시 바다로 나가지 않고 유가항(劉家港)에서 1개월간 머물며 마조를 기념하는 천비궁(天妃宮)을 축조했다.

선덕 6년(1431년) 2월 복건 장락항(長樂港)에 이른 정화의 선단은 그곳에 또 6개월간 머물며 마조의 고향 미주섬(湄州嶼)에 올라 미주 천비궁을 개축했다. 그리고 장락현 남산(南山)의 삼봉탑사(三峯塔寺) 곁에 장락 천비궁을 짓고 <천비영응지기(天妃靈應之記)> 비석을 세웠으며 구리로 종을 주조하고 종에 ‘영원히 공양하리니 서양원정의 평안을 보우하기를 기원하나이다. 대명(大明) 선덕 6년 한여름의 길일에 내시 정화와 왕경홍이 장병들과 함께 마음으로 종을 주조함’이라는 내용의 명문을 새겼다.

정화는 여러 곳에 마조묘를 짓고 비석을 세우고 종을 주조하기 위해서만 육지에 그렇게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계절풍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계절풍이 불어야 그 바람에 힘입어 순풍에 돛 단 배가 되기 때문이었다.

정화는 마지막 서양원정에서 17개 나라와 지역에 이르렀음은 물론이고 홍해의 아단(阿丹, 오늘의 예멘)에까지 이르러 이슬람교를 신앙하는 장병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순례를 가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길에 올랐을 때는 선덕 8년(1433년)이었다.

선덕 8년 5월, 인도양의 날씨는 유난히 더웠고 정화는 끝내 몸져누웠다. 선단이 고리국에 이른 후 정화는 선창 밖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에 마지막으로 눈길을 던지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두 눈을 감았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4살이었다. 왕경홍의 말대로 그는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화의 시신은 날씨가 너무 더워 오래 보존할 수 없었다. 왕경홍은 하는 수 없이 정화의 시신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삼보롱(三寶壟)에 묻었다.

영원히 바다를 마주하고 저 멀리 조국을 바라보는 곳에 묻힌 정화, 원정에 평생을 바친 항해가 정화로 말하면 진정으로 ‘뼈를 묻는데 왜 반드시 고향이어야 하겠는가?’ 바다의 품 속에서 영원히 푸른 바다와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유종의 미였을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