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10:11:20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해서 편: 제3회 선행을 쌓아 좌천되다

(사진설명: 해서의 생가)

제3회 선행을 쌓아 좌천되다

융경(隆慶) 3년(1569년), 서계(徐階)가 은퇴했다. 서계는 귀향에 앞서 해서를 응천부(應天府) 순무(巡撫)로 극력 천거했다. 해서는 그의 생애 중 최고의 관직에 올랐다. 순무는 권력이 막강했고 응천부 산하에는 당시 중국에서 경제가 가장 앞선 소주(蘇州)와 상주(常州), 진강(鎭江), 송강(松江) 등 십여 개 부가 있었다.

56살의 해서는 머리는 하얗게 세였지만 웅심은 여전해 임명장을 받자 즉시 남경으로 갔다. 이와 동시에 해서보다 더 빨리 움직인 사람들도 있었다. 응천부의 부자와 크고 작은 관리들이 해서가 순무로 온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주홍색의 대문을 검정으로 다시 칠했으며 횡령을 일삼은 관리들은 벼슬을 내놓고 가족을 거느리고 야반도주를 했다. 심지어 황궁에 납품하는 견직물을 관리하는 강녕직조(江寧織造) 담당 내시도 8인교(八人轎)를 4인교로 바꾸었다.

그들은 모두 해서가 엄격하게 규정에 따라 일하고 누구의 체면도 보지 않는 대공무사하고 강직·청렴한 관리라는 것을 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원장(朱元璋)은 명(明) 왕조를 세우면서 예제(禮制)에 따라 엄격한 등급제도를 정했다. 이런 신분제도에 따르면 붉은 주홍색 문은 돈이 있다고 다 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관리라고 모두 8인교를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강직과 청렴의 화신인 해서가 순무로 오니 규정을 어긴 사람들이 어찌 급급히 각자 신분에 맞는 것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새로 부임한 관리라면 모두 의욕에 넘쳐 일을 추진한다는 의미로 ‘신관상임삼파화(新官上任三把火)’, 즉 횃불을 지피듯 뜨겁고 강하게 일을 밀고 나간다는 말이 있다. 해서가 지핀 세 개의 햇불 중 하나는 <독무조약(督撫條約)> 36조항을 발표한 것이다. 그러자 응천부의 정치풍기와 사회의 풍기가 참신하게 변했다. 관리들이 더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가마를 타지 않고 등급을 초과하는 호화로운 저택에 살지 않았으며 공금으로 사사로운 잔치를 베푸는 일도 없고 관리 접대비용도 대폭 줄었으며 행정비용도 줄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경감되었다. 결과 ‘해청천! 우리의 해청천!’ 이라는 백성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해서가 지핀 두 번째 횃불은 수해를 해결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축조하는 것이었다. 수리시설 비용이 부족하자 그는 조정의 자금지원도 받고 공부(工部)와 이웃지역의 도움도 구해서 자금난를 해결하고 인력이 부족하자 몸소 부하들을 이끌고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업무를 보았다. 이로써 다년간 장마철만 되면 넘쳐나 피해를 끼치던 오송강(吳淞江)과 백모당(白茆塘)의 수해를 해결하고 정리된 땅에는 13만명의 이재민을 안치했다. 이 일로 조정이 해서를 표창하고 백성들이 해서를 칭송했으며 심지어 많은 관리들도 해서의 비범한 실적에 감탄했다.

해서가 지핀 세 번째 횃불은 토지합병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명 왕조는 선비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어 거인(擧人)에 급제하기만 하면 그 집의 밭은 농지세를 내지 않아도 되었다. 또 거인이 되었다는 것은 벼슬길에 올랐음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신동시(神童詩)>의 제1편인 <권학(勸學)>의 서두에는 ‘천자는 영웅과 호걸을 중시하지만(天子重英豪) 문장가들은 학동을 가르친다(文章敎爾曺). 모든 것은 다 하찮은 것이니(萬般皆下品) 오로지 독서와 벼슬만이 고귀하다(唯有讀書高)’고 적혀 있다. <범진(范進)이 과거에 급제하다>에도 보면 범진이 과거시험에 급제하자 많은 사람들이 자의든 타의든 모두 범진에게 돈을 갖다 바치거나 집이나 땅을 선물했다고 나온다.

과거시험에 합격한 후 관직을 얻은 선비들은 돈이 있으면 첫 번째로 땅을 사들였다. 왜냐하면 땅이 아무리 많아도 농지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명 왕조 때에는 무릇 관리가 되면 지주(地主)가 되었다. 한 가문에서 연속 거인이나 진사(進士)가 나오면 그런 가문은 통상 모두 엄청난 땅을 보유한 대지주가 되었다.

당시 응천부(應天府) 최대의 지주는 금방 은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서계(徐階)였다. 서계의 가문은 몇 세대에 걸친 축적으로 농경지 십여 만 무(畝, 1무=666㎡)를 보유하고 있었다. 재자(才子)가 많이 나는 강남에는 한 가문에서 진사 네 명이 나오고 상서(尙書) 세 명이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으니 강남의 토지합병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융경(隆慶) 연간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몇 만 무에 달하는 토지를 보유한 지주가 많았고 이와 반면에 반 이상의 농부들은 부칠 땅이 없어 유리걸식했다.

사람과 사람 간에 이해관계가 생기면 가족이나 벗이라 해도 척을 지는 법이다. 해서가 그런 벼슬아치이자 대지주들의 이익을 범하려 하는데 적을 만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서가 보기에 세 번째 횃불을 지피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태조(太祖)가 정한 규정을 따르는 방법이었다. 태조 주원장은 애초에 ‘누구든 왕실이나 귀족, 조정의 대신, 관아에 아무런 이유 없이 땅을 선물로 줄 수 없다’고 명시했다. 해서는 이 규정에 따라 받은 땅을 원 주인에게 상환할 것을 지주들에게 요구했다. 그는 ‘무릇 빼앗은 땅이나 선물 받은 땅은 모두 기존의 주인에게 돌려주라. 각로(閣老)의 가문이든 상서의 가문이든 모도 법에 의해 이 규정을 집행하라’는 공고를 발표했다.

명 왕조 때 각로는 수보대신(首輔大臣)을 지칭했다. 해서는 그의 은인인 서계를 지목했던 것이다. 공고를 본 서계는 깜짝 놀랐다.

“뭐야? 내가 배은망덕한 인간을 구해준건가? 어쩌면 이건 고공(高拱)이 꾸민 꿍꿍이일 것이다.”

서계는 토지합병과 같은 큰 일은 해서가 사사로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반드시 현임 내각 수보대신 고공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서계는 이렇게 생각했다.

“고공이 뒤에 숨어서 나를 비웃고 있구나. 내가 천거한 사람을 시켜 나를 골탕 먹이다니 참으로 수단이 좋다! 지금 응천부의 대지주들은 모두 내가 어떻게 그들을 대신해 해서와 싸울지 나만 바라본다. 내가 그렇게 바보냐? 나는 앞장 서서 해서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맞서더라도 다른 사람을 앞장 세워야지.”

서계는 자신이 가진 토지의 1/10에 달하는 1만 2200무의 땅을 상환했다. 천지가 들썩했다! 지주들은 크게 실망하고 빈농(貧農)들은 아주 흥분했다. 해서가 순무관아의 문을 열자 농지상환을 요구하는 농부들의 소송장이 눈송이처럼 날려 들어왔다. 해서의 세 번째 햇불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계는 해서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들이밀 줄 몰랐다. 해서는 반 이상의 땅을 상환하라고 서계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서계가 보유한 토지의 반이면 6만무에 달하는 땅이었다. 서계는 더 이상은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해서는 서계에게 서찰을 보냈다. 해서는 서찰에서 자신이 이렇게 하는 것은 서계를 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서계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빈부차가 너무 크면 민란을 유발할 것이고 그 때면 지주들이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해서는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것은 백해무익하다는 교훈이 많습니다. 반에 달하는 땅을 상환하라고 하는 것은 나리께서 세상을 뜨신 후 평안을 얻게 하고자 함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계는 더는 양보하지 않았다. 그는 몇 세대에 걸쳐 모은 재산을 하루 아침에 버리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해서는 농지 상환을 요구하는 농부들이 매일 서계의 저택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격다짐으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서계는 하인에게 인분을 몇 통 마당에 퍼다 두고 누가 들어오면 그에게 뿌리라고 시켰다. 과거의 수보대신이 이런 졸렬한 방법까지 생각하다니, 그의 위망은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서계는 고공에게 서찰을 보내 화의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제부터 더는 고공과 맞서지 않겠다고, 과거의 부하들이 고공을 지지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서계가 머리를 숙이자 고공도 대범한 척하며 답신을 보내 서 각로의 지지를 고맙게 생각하며 자신도 해서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고공은 답신에 이렇게 썼다.

“해서가 지나치다고 생각은 합니다만 수보대신으로써 직접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해서는 수리시설을 건설하면서 그 실적이 정상에 이르렀고 조정에서 모두 그를 치하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퇴전령(退田令)을 발표한 후 조정에 그를 치하하는 관리가 한 명도 없습니다. 조정의 관리라면 지주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적지 않은 사람들은 해서를 거꾸러뜨리려 하지만 서 각로의 생각이 어떠신지 몰라서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공의 답신을 보고 그의 뜻을 안 서계는 즉시 자신의 측근을 불러 해서를 탄핵하고 해서의 관직을 파면시킬 것을 조정에 제안하도록 시켰다. 고공이 탄핵서에 ‘동의’라는 두 글자를 쓰자 해서는 곧 응천부 순무에서 파면되어 남경 총독양저(總督粮儲)로 좌천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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