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0 08:57:49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척계광 편: 제1회 왜구의 우환

(사진설명: 척계광 동상)

일대의 명장 척계광

그는 왜구(倭寇)와 싸우기 위해 태어났고, 왜구와의 싸움에서 평생을 보냈으며, 왜구를 평정하는 길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을 쌓았다. 그가 바로 명(明) 나라 때 중국의 바다를 지킨 일대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이다.

중국역사에 불후의 무공으로 사서에 길이 남은, 장군의 성씨로 명명된 군대는 두 개뿐인데 그 중 하나는 남송(南宋)의 애국명장 악비(岳飛)의 성씨로 명명한 악가군(岳家軍)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척계광의 성씨로 명명한, 용맹함으로 유명한 척가군(戚家軍)이다.

척계광은 척가군을 거느리고 피와 살로 철의 장성을 쌓아 조국의 바다를 지켰다. 그는 또 만리장성을 축조해 명(明) 나라 장성의 군사적 방어체계의 완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일대의 명장 척계광(戚繼光)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왜구의 우환

명(明) 가정(嘉靖) 연간(1522년~1566년), 중국 동남연해의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끼었다. 왜구들이 태풍처럼 떼를 지어 몰려 다니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굶주린 이리, 호랑이처럼 시시로 연해지역의 마을에 들어와 살인과 강탈, 강간과 방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연해지역의 백성들은 언제 왜구가 들이닥쳐 여인은 겁탈당하고 노인은 죽임을 당하며 재산은 다 털리고 집은 한 줌의 재로 변할지 몰라 매일 두려움과 슬픔의 지옥에서 살았다.

가정 25년(1546년)의 어느 날, 애처로운 소라 소리가 어두운 밤 하늘에 울려 퍼지자 절강(浙江) 연해의 백성들은 왜구가 상륙한 줄 알고 두려움에 떨며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들을 업고 급급히 산으로 들어갔다.

백 명도 안 되는 왜구는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살인과 방화, 강탈을 감행하며 항주(杭州) 북신관(北新關)을 넘어 순안현(淳安縣)을 지나 안휘(安徽) 흡현(歙縣)에 진입했으며 무호(蕪湖)를 통해 남경(南京)을 돌아 말릉관(秣陵關)으로 향해 의흥(宜興)에 이른 다음 다시 무진(武進)으로 퇴각했다. 이 왜구들은 마지막에 소멸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이렇게 많은 곳을 경유하면서 살해한 백성은 4천명에 달했다. 그리고 당시 유도(留都) 남경성(南京城)에 주둔한 명(明)의 군대 12만명은 유명무실해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란이 빈발해 일본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내전에서 패한 일부 장병들이 봉건 제후들의 자금지원을 받아 일부 일본 낭인(浪人) 및 상인들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의 연해지역까지 이르러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명나라 백성들은 이런 일본강도들을 왜구라 불렀다. 만력(萬曆) 연간(1573년~1620년)에 이르러 왜구의 구성은 더욱 복잡해서 중국의 해적과 매국노들도 왜구와 결탁해 부정축재를 하기 모으기 위해 살인과 강탈을 일삼았고 왜구들에게 소굴을 제공하기도 했다.

왜구는 뛰어난 전술과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있었다. 쌍도(雙刀)를 휘두르는 그들은 또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호응하며 공동작전을 펼쳤다. 두령이 접선을 위로 쳐들면 부하들은 즉시 칼을 위로 쳐들었다가 명의 군사들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진 틈을 타서 갑자기 칼로 상대의 목을 친다. 왜구들은 5자 길이의 쌍도를 휘두르며 눈깜짝할 사이에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이와 반면에 관군의 전투력은 아주 낮았다. 당시 엄숭(嚴崇) 부자가 권력을 독점하면서 조정에 먹구름이 끼었고 연해지역을 지키는 장병들은 기본적인 보장도 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군영을 탈출했다. 또 병역 전문가구들로 관군을 조성하는 명 왕조의 군호(軍戶)제도로 인해 병사들의 자질이 낮아 관군은 싸움을 두려워했으며 특히 격투를 두려워했다. 결과 관군 10명이 왜구 1명과 맞섰음에도 늘 패전을 면치 못했다.

가정 23년(1544년), 척계광이 부친의 직위를 승계해 등주위(登州衛) 지휘첨사(指揮佥事)를 맡았다. 장군의 가문에서 태어난 척계광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라며 어릴 때부터 왜구가 살인하고 재물을 약탈한 일들을 많이 들었으며 16살 때 ‘후작으로 책봉되는 것은 이 내 소망이 아니요(封侯非我愿) 다만 해변의 우환을 하루 빨리 제거할 수 있기를 바랄 뿐(但愿海波平)’이라는 시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척계광은 왜구에 맞서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의 인생의 포부는 왜구를 소멸하고 바다에서 관군의 위력을 떨쳐 바다에 더는 파도가 일지 않고 평화와 안정이 깃들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가정 34년(1555년), 척계광은 절강(浙江)의 둔정(屯政)을 관리하는 도사첨사(都司佥事)를 맡게 되었다. 절강은 당시 왜구의 유린을 가장 심하게 받는 지역이었다. 그런 절강에 부임하게 된 척계광은 이제 왜구를 섬멸한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척계광이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를 정비하며 왜구와 싸울 만반의 준비를 하는데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명장 장덕(張德)과 유대유(兪大猷)가 절강 가흥(嘉興)에서 대승을 거두어 2천명에 가까운 왜구의 목을 벴다는 것이었다. 이는 관군이 왜구와의 싸움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하지만 장덕은 엄숭의 앞잡이인 조문화(趙文華)의 모함으로 처형을 당했다.

그날 저녁 척계광은 날밤을 샜다. 장덕의 이야기가 그의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장덕은 복건(福建) 송계(松溪) 출신이다. 몇 년 전, 왜구가 운제(雲梯)를 이용해 송계성을 공격했다. 왜구가 성을 점령하면 사람이 죽고 고향이 폐허가 된다는 것을 잘 아는 송계성의 백성들은 한 마음으로 송계성 보호에 나섰다. 그들은 분분히 성에 올라 성벽을 올라오는 왜구에게 돌을 던지거나 장대로 왜구를 찌르며 성을 지켰다.

운제를 이용해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왜구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없었고 그 중 적지 않은 왜구는 돌과 막대기의 저항을 넘어 성벽 꼭대기에 올라섰다. 이 위급한 관두에 장덕이 도끼를 휘두르자 왜구의 목이 떨어지고 운제도 풍비박산이 났다. 사기가 높아진 사람들이 장덕을 따라 성벽 위까지 올라온 왜구들과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자 왜구들은 분분히 두려움이 떨며 투지를 잃고 성벽을 내려가 도주했다…

척계광은 몸을 뒤척이며 이렇게 생각했다.

“장덕은 원래 힘이 장수인 목수였다. 왜구에 대한 원한으로 사무친 그는 자발적으로 유대유 장군의 군에 입대해 위험한 왜구와의 싸움에 생명을 바칠 각오를 했다. 그런데 왜구의 손에도 목숨을 잃지 않았던 그가 오늘 간신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강직한 성품으로 간신들의 눈에 난 유대유 장군도 수차 무공을 세웠지만 탄핵을 받거나 좌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능을 펼치지 못한다. 보아하니 내 이 포부를 실현하고 왜구라는 이 우환을 뿌리 뽑으려면 철의 군대를 훈련시키는 동시에 조정의 대신들을 구슬려야겠다. 속담에 조정에 지인이 있으면 벼슬하기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참으로 맞는 말이다.”

후에 척계광은 이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해 절세의 기이한 무공을 쌓았으나 이와 동시에 그의 명성에도 해를 끼쳤다. 아아, 암울한 시대에 포부를 실현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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