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2 09:05:01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척계광 편: 제3회 왜구의 섬멸

(사진설명: 척계광 석상)

제3회 왜구의 섬멸

군주의 은혜 보답하고자 평생 남과 북을 달렸네(南北驅馳報主情)

강변의 꽃 변방의 달은 나를 비웃었지만(江花邊月笑平生)

일년 삼백 육십일(一年 三百六十日)

나는 창 들고 말 잔등에서 보냈네(都是橫戈馬上行)

척계광(戚繼光)은 선비의 풍모를 지닌 장군이자 시인이었다. 척계광의 시작인 이 <마상작(馬上作)>은 그의 넓은 흉금과 호방한 성격, 문학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이 시는 또한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그의 진실된 생활도 설명한다.

가정(嘉靖) 40년(1561년) 5월, 만 명에 달하는 왜구가 대주부(臺州府)를 범해왔다. 왜구는 두 갈래로 나뉘어 대주와 녕해(寧海)를 점령하고자 시도했다.

“척가군의 원앙진법을 훈련해보려던 참에 잘 왔구나.”

이렇게 말한 척계광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명령을 내렸다.

“소수의 병력만 대주에 남기고 주력부대는 나를 따라 녕해로 가서 왜구를 막는다.”

도저(桃渚)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여인을 겁탈하고 방화를 저지르던 왜구는 척가군이 천병(天兵)처럼 갑자기 눈앞에 나타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척가군은 막을 수 없는 예기로 일거에 도저의 왜구를 격파했다. 왜구의 패잔병이 혼비백산해서 배에 올라 도주하는 것을 본 척계광은 용산(龍山)으로 향했다. 이 때 척후병이 7백여 명의 왜구가 신하성(新河城)으로 간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척계광이 냉소를 지었다.

“좋다. 그 놈들 성미 사나운 한부(悍婦)의 맛을 보라고 하자.”

척계광이 말하는 한부는 바로 신하성을 지키는 척부인 왕씨(王氏)를 말한다. 장군의 가문에서 태어난 왕씨는 어릴 때부터 칼과 창을 좋아했고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병서를 읽고 군사(軍事)를 주시했다. 왜구가 공격해오는 것을 본 그녀는 성안의 여인들에게 군복차림을 하고 성벽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게 했다. 그러자 왜구는 성안에 주력부대가 매복한 줄 알고 신하성 가까이에 오지도 않고 방향을 돌려 도주했다.

왜구가 대주성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척계광은 즉시 대주성으로 향했다. 척계광의 전법은 융통성이 있고 임기응변에 강했다. 왜구들이 성벽 아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본 척계광은 먼저 화포로 공격하고 이어 대군을 거느리고 공격했다. 척계광은 몸소 병사들의 앞장에 서서 적진으로 돌격했으며 병사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왜구는 척가군의 드높은 기세를 막을 수 없자 약탈한 보물을 척가군이 공격해오는 길에 던졌다. 척가군의 병사들이 보물을 줍는 사이에 반격을 가하고자 하는 심보였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의 척가군 병사들은 땅바닥에 가득한 보물을 무시하고 여전히 돌격하며 왜구의 목을 베었다. 왜구 308명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패잔병은 바다에 빠져 숨진 대신 척가군은 3명만 전사했다. 척가군은 식사 한 끼 시간의 전격전(電擊戰)을 통해 왜구를 전멸했다.

40여일 간 지속된 대주전투에서 척가군은 9전9승의 전과와 왜구 6천의 목을 베는 전례 없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와 동시에 유대유(兪大猷)도 복건(福建)에서 왜구와 3전 3승의 승리를 거두었다.

가정 41년(1562년), 왜구가 또 다시 복건을 범해왔다. 위급한 상황에서 조정은 척계광을 복건에 보냈다. 녕덕(寧德)에 군사를 주둔한 척계광은 왜구의 소굴인 황서(黃嶼)을 공격하기로 했다.

보루가 지어져 있는 바닷가의 외로운 섬 황서는 녕덕성에서 10리(里, 1리=0.5km)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밀물이 질 때면 섬의 주변이 온통 망망한 바다이고 썰물이 지면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척계광은 썰물을 이용해 원앙진을 유지하며 잔등에 풀을 쓰고 포복 전진할 것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삼면으로 황서에 이른 병사들은 일거에 공격을 들이대서 혈전을 벌여 보루를 점령하고 왜구의 소굴에 불을 질렀다. 번개가 하늘을 가르듯, 폭우가 대지를 휩쓸 듯 척가군은 왜구의 소굴을 깡그리 제거했다. 이 전투에서 왜구 2천 6백을 베어 왜구의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왜구에게 잡힌 3천 7백의 백성을 구했다.

이와 동시에 척가군은 우전(牛田)을 급습하고 임돈(林墩)을 수복했으며 흥화성(興化城)을 공격하여 또 6백 8십여명의 왜구를 소멸하고 수 천명 왜구의 항복을 받았으며 잡혀간 남녀노소 9백 5십여명을 구했다. 흥화성의 평원대(平遠臺)에 올라선 척계광은 저 멀리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고 귓가에 들리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얼마 전에 무이산(武夷山)에서 지은 시 <무이산에 붙이며(題武夷)>를 읊었다.

검이 허공 가르니 밤하늘엔 별빛 하얗고(一劍橫空星斗寒)

평북으로 가서 다시 왜구를 정벌하였네(甫隋平北複征蠻)

과거엔 제후로 봉하는 인장을 찾아 다녔지만(他年覓得封侯印)

이 산에 은거하며 배움을 구해야 하겠네(愿學幽人住此山)

그리고 척계광은 평원대의 바위에 이 시를 새기라고 명령했다.

가정 42년(1563년), 척계광은 유대유, 유현(劉顯)과 함께 복건 평해위(平海衛) 전역에서 완승을 거두었다.

가정 43년(1564년), 척계광은 복건총병(福建總兵)으로 임명되었으며 선유(仙遊) 전역의 승리를 거두었다.

척계광 부부가 어전에서 성은에 사의를 표할 때 황제는 척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면서도 남편이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말했다.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不孝有三) 후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無後爲大)’”라고 했소. 척장군이 지금까지 후손이 없으니 짐이 여인 두 명을 척장군에게 내려 후손을 번창케 하겠소. 부인이 만약 동의하면 좋고 그렇지 아니하면 짐이 내린 독주를 드시오.”

황제의 말에 척부인은 두말 않고 독주를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황제가 큰 소리로 웃으며 물었다.

“독주의 맛이 어떻소?”

왕씨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신 맛이 납니다.”

“식초를 마셨으니 어찌 시지 않겠소?”

난처해진 척계광이 얼른 나서서 아뢰었다.

“소신 감히 폐하께 아룁니다. 아들을 낳기 위해 소신은 군영에서 첩 한 명 들였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아들을 낳지 못해 한 명 더 들였는데도 아들이 없었고 세 번째 첩을 들여 서야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장남이 출생한 후 다른 두 첩실도 연이어 아들을 낳아 소신에게 이제 아들 다섯이 있습니다. 소신 이제 첩을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말에 황제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고 왕씨는 놀라서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전이라 감히 화를 내지 못한 왕씨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제 돌아가서 네 놈을 죽이지 않으면 내 성씨를 갈겠다!”

집에 돌아오자 왕씨는 과연 칼을 갈았다. 하지만 칼을 갈던 왕씨는 조건을 낮추었다.

“그 여인들을 집에 들이면 네 놈을 죽이겠다.”

척계광이 용서를 구했다.

“이미 엎지른 물인데 나를 죽여서 무슨 소용이 있겠소? 좋소. 당신 말대로 하리다. 그녀들을 집에 들이지 않겠소. 하지만 내가 아들들을 데려올 테니 당신이 골라보오. 당신이 좋아하는 아들을 당신의 양자로 들이오. 그러면 당신이 노후를 잘 지낼 수 있지 않겠소?”

왕씨가 놀라며 말했다.

“맞는 말입니다. 늙으면 확실히 아들이 있어야 하겠군요.”

왕씨는 양씨(楊氏)의 차남 안국(安國)을 양자로 들였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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