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3 09:07:48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척계광 편: 제4회 평생의 공적

(사진설명: 척계광 생가의 일각)

제4회 평생의 공적

척계광(戚繼光)과 유대유(兪大猷)는 15년에 걸친 왜구와의 싸움을 거쳐 끝내 약 백 년간 중국의 동남 연해지역에 피해를 끼치던 왜구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만 리 바닷가에 끝내 푸른 하늘이 펼쳐지고 연해지역 백성들도 평안한 생활을 되찾았다.

척계광은 가장 눈부신 삶을 왜구와의 싸움에서 보냈고 가장 눈부신 업적을 왜구와의 전투에서 쌓았다.

흉악한 왜구는 머나먼 바다로 사라졌으나 척계광은 전장에서 물러선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북방 몽골족의 침입을 막고 경성(京城)을 지키는 전장으로 옮겼다.

융경(隆慶) 연간(1567년~1572년), 척계광은 조정의 명령에 의해 계진(薊鎭)에서 명(明) 왕조의 북방 관문인 계문(薊門)을 지켰다. 척계광은 15년 동안 계문에서 명 왕조 국도의 안녕을 지켰다. 예로부터 사람은 재능이 넘칠수록 더 많은 일을 하기 마련이었다.

척계광은 이곳에서 또 한 가지 큰 일을 했다. 그것은 바로 명 왕조의 북쪽 변방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을 직접 감독한 것이다. 동쪽으로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해 진변(鎭邊), 오늘의 베이징 창평(昌平)에 이르기까지 1천 km길이의 장성에 1천 2백여개의 웅장한 적대(敵臺)를 축조해 만리장성의 방어능력과 적군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그는 또 기병부대의 특징에 따라 기존의 원앙진법(鴛鴦陣法)을 개량했으며 명 나라 때 가장 유명한 병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와 <연병실기(練兵實紀)>를 썼다.

군대는 군량을 필요로 하고 국방은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며 조정의 지원이 있어야 이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었다. 국방의 강화를 위해 척계광은 선물공세로 명 조정의 내각 수보대신(首輔大臣) 장거정(張居正)의 지원을 받아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인격적 지조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다년간 개혁을 추진한 장거정이 유명을 달리하자 개혁을 반대하던 신하들이 장거정을 탄핵했다. 장거정 생전에 조정의 모든 업무를 장거정에게 일임했던 만력(萬曆) 황제는 대신들의 탄핵서를 보고 모든 책임을 장거정에게 돌리고 장거정을 원망했을 뿐만 아니라 그 화풀이를 척계광에게 했다. 척계광이 장거정과 지나치게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로 인해 척계광은 광동총병(廣東總兵)으로 좌천되었으며 곧 관직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다.

설상가상으로 아들 안국(安國)이 젊은 나이에 죽자 부인 왕씨(王氏)는 집안의 돈을 다 걷어가지고 친정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때문에 질환을 앓으면서도 척계광은 병을 치료할 돈도 없어 매일 울적하게 보내다가 64세를 일기로 두 눈을 감았다.

명 왕조의 하늘을 밝히던 눈부신 별이 졌다. 사람들은 평생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기여를 한 척계광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를 위해 탄식했다.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공정하게 판단하기 마련이다. 가장 공정한 백성들은 조정의 암투와 무관하게 도탄에서 그들을 구해준 척계광만 기억한다.

중국 동남연해지역의 척계광 사당에는 오늘날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왜구에 맞선 영웅 척계광을 자자손손 기리며 영웅을 칭송하는 신묘한 많은 전설도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척계광의 공적은 영원히 백성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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