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7 10:05:48 출처:cri
편집:李仙玉

[역도원 편-1] <수경주> 집필 시작


지리학자이자 嚴官인 역도원

그의 <수경주(水經注)>는 내용이 아주 풍부한 지리 전문서이자 아름다운 글귀로 자연을 노래한 산문이기도 하다. 그의 이런 창작기법은 후세의 여행기와 산문창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창작은 취미이고 그의 본직은 관리였다. 거기다가 그는 유명한 혹리(酷吏)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가 바로 고대 중국의 지리학자이자 문학가인 엄관(嚴官) 역도원(酈道元)이다.

중국 최초의 산수 여행기의 기서(奇書)인 <수경주>는 1,252갈래의 하천 유역의 수문(水文)과 지리(地理), 풍토와 문물, 역사와 이야기, 신화와 전설을 기록해 하천을 중심으로 한 복합적인 지리의 거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이로 인해 저자인 역도원은 본직이 관리임에도 지리학자와 문학가로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리학자이자 엄관인 역도원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수경주> 집필 시작

 삼협이 바로 그 중 하나이다. 원산송이 말했다. 늘 듣기로 협곡으로는 물이 세차게 흘러 기록으로 남았거나 구비로 전해 내려오는 것 모두 두려움으로 넘쳐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삼협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곳에 이른 나는 기쁨을 참지 못했으며 백 번 듣기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겹겹으로 줄지은 수려한 산봉우리와 기이한 모양을 형용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윽하고 고요한 숲은 울울창창해서 머리 들어 경치를 바라보고 몸을 굽혀 냄새를 맡으니 그럴수록 더 그 속에 빠져 돌아갈 날조차 잊고 이틀이나 그곳을 거닐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들은 모두 종래로 본적이 없는 경관들이었다. 이 기이한 경관을 본 후부터 만약 산수에 영이 깃들어 있다면 지기를 만난 듯 즐거워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경주·강수(水經注·江水)>를 읽으면 작가가 심오한 필치와 아름다운 어휘로 삼협의 기이한 경관을 생동하게 눈앞에 펼쳐놓은 듯 하다. 역도원은 그야말로 삼협의 첫 번째 지기(知己)이며 중국 산수 천고의 지기이다!

책을 읽으면 그 저자를 만나고 싶어진다. <수경주>를 읽고 그 저자 역도원을 만나기 위해 사서를 펼치면 역도원은 과연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만 생각 외로 <위서·혹리열전(魏書·酷吏列傳)>에 편입되어 있다. 역도원이 가혹한 관리로 기록된 그 배경과 전후를 살펴보자.

남북조(南北朝) 시기에 흉노에 항복한 한(漢) 나라 장군 이릉(李陵)의 자손인 선비족 탁발씨(拓跋氏)가 북위(北魏)를 세우고 북방을 통일한 후 빠른 속도로 한(漢)족과의 동화를 실현해 황제의 성씨도 탁발로부터 원(元)으로 바꾸었다. 바로 북위 건국 후 백 년이 지나서 엄격한 관리 역도원이 나타나서 중국의 문명사에 굵은 한 획을 그은 거작 <수경주>를 썼고 이와 동시에 관리로서도 엄청난 실적을 쌓았다.

기주(冀州) 진동부(鎭東府) 장사(長史)로 부임한 역도원은 현지의 악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는 원숙한 수단으로 범죄자를 검거했으며 인정사정 보지 않고 범죄자를 엄격하게 응징했다. 그러자 간담이 서늘해진 악인과 도적들이 분분히 진동부를 떠나는 바람에 사회환경은 평화로워졌고 현지에서 역도원의 엄격함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달랐다. 죄를 지었으나 그 죄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뇌물을 가져다 바치는 사람이 없으니 뒷돈을 받지 못하는 관리들은 역도원을 좋아할 리 없었던 것이다. 또 관리들이 사적으로 누군가를 감싸주면 역도원은 눈을 감아 주지 않고 예리하게 찾아내서 반드시 엄벌했다.

당시 관리들은 각자 배경이 있었기에 기주의 적지 않은 관리들이 조정에 올라가 이 ‘흑검(黑瞼)살성(煞星)’역도원을 기주에서 쫓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북(河北)에서 태어난 역도원은 키도 크고 몸집도 우람지지만 얼굴이 검지도 않았고 오히려 선비의 기운이 다분했다. 하지만 애증이 뚜렷하고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가른 그는 악행이라면 손톱만큼도 봐주지 않고 응징했다. 그리하여 역도원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를 ‘흑검 살성’이라 불렀다.

다른 사람들이 그를 쫓아내려고 안간힘을 써도 역도원은 전혀 개의치 않고 업무 여가에 <수경주> 편찬에 몰두했다. 그의 머리맡에는 온통 <수경>이니 <우공(禹貢)>이니 <산해경(山海經)>이니 하는 고서들뿐이었다. 그가 마음에 새긴 것은 현장을 돌아보면서 이런 고서들에서 발견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그 날 역도원은 수문자료를 정리하면서 과거 하동(河東)에 있을 때 기록한 “춘추(春秋) 후반 진(晉) 나라의 지백(智伯)은 분수(汾水) 강물이 위(魏)씨의 임지인 안읍(安邑)을 잠기게 하고 강수(絳水) 강물은 한(韓)씨의 임지인 평양(平陽)을 잠기게 한다고 말했다. 내가 이 두 갈래 강물을 따라 현장을 살피니 지세가 낮은 분수강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안읍은 분수강의 언덕이 무너지면 확실히 물에 잠기지만 평양은 지세가 높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강수강에 홍수가 진다 해도 물에 잠기지 않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쓴 자료 한 단락을 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 때 역도원의 셋째 동생 역도박(酈道博)이 서재로 들어와 역도원을 나무랐다.

“다 형님 탓입니다. 형님이 여지를 두지 않고 모든 일을 너무 엄격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또 누가 형님을 고소해서 이번에는 노양군(魯陽郡)으로 가게 되었어요.”

역도원은 셋째 동생의 손에서 공문을 받아 보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여기는 치안이 좋아져서 이제 밤에 문을 닫아 걸지 않아도 안전하고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 내가 여기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있겠느냐? 노양군 태수(太守)로 가는 것도 괜찮다. 듣자니 거기는 야만인들이 개화되지 않고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데 내가 가서 손 좀 보아야 하겠다.”

역도원이 노양군에 가니 그곳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역도원은 황제에게 주청을 올려 현지에 학교를 차리고 사람들을 가르칠 것을 요구했다.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노양은 원래 남부의 변두리 지역이기에 학부(學府)를 두지 않았다. 지금 태수가 주청을 올리니 이를 윤허한다. 필히 한(漢)의 문옹(文翁)이 학교를 차린 것처럼 노양을 문화가 번성하는 곳으로 만들라.”

황제의 조서를 받은 역도원은 대대적으로 문화의 번영을 이끌고 적극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점차 교육을 받아 법을 어기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적어졌다.

청렴하고 공정하며 엄격하게 법을 지키는 역도원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하지만 그의 <수경주>가 가장 어려운 편찬시기에 들어섰다는 것은 누구도 몰랐다. 현장에서 얻은 대량의 자료에 기반해 심플하고 생동한 언어로 서한(西漢) 후반의 <수경>에 주를 단 수십만 자의 <수경주>를 쓰기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낮에는 업무를 보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며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쓰는 것은 역도원이 다년간 지켜온 생활습관이 되었다.

역도원은 <수경주>를 반드시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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