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9 10:10:04 출처:cri
편집:李仙玉

[역도원 편-3] <수경주> 집필 완료


(사진설명: 역도원의 <수경주>)

제3회 <수경주> 집필 완료

또 회계(會稽)에 산이 있으니 옛적의 방산(防山)이다. 이 산은 모산(茅山) 혹은 동산(棟山)이라고도 부른다. <월절(越絶)>에는 동(棟)이란 바로 진(鎭)을 말하며 즉 <주례(周禮)>에 나오는 양주진(揚州鎭)을 말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난 회계산에서는 옥이 많이 나고 바위도 많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석수(夕水) 강물이 이 곳에서 발원해서 남으로 호수에 흘러 든다고 씌어져 있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복부산(復釜山) 산중에는 황제(黃帝)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금간옥자지서(金簡玉字之書)>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아래에는 우묘(禹廟)가 있고 우묘에는 성고(聖姑) 상이 있다. <예악위(禮樂緯)>는 우임금이 물을 다스린 후 하늘이 그에게 여신을 내렸는데 성고가 바로 그 여신이다라고 말한다. 복부산에는 우임금의 무덤이 있다. 과거 우임금이 제위에 오른 지 10년 만에 동쪽을 순시하다가 회계에서 죽은 후 이 곳에 묻혔는데 그로부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봄이면 무덤의 풀을 뽑고 가을에는 또 부리로 잡초를 제거했다. 그로 인해 현지의 관아는 이 새를 잡는 것을 금지하며 새를 잡을 경우 엄한 형벌을 내린다고 선포했다. 복부산 동쪽, 우묘에서 7리(里, 1리=0.5km) 거리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연정(井)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우물을 우정(禹井)이라고 부른다. 동쪽에 이른 사람들은 다수가 이 곳을 와본다. 진시황제(秦始皇帝)는 회계산에 올라 바위에 자신의 공적을 남겼는데 그 바위는 지금도 회계산의 한쪽에 남아 있다. 손창지(孫暢之)는 <술서(述書)>에 이 바위에는 재상 이사(李斯)가 쓴 전서(篆書)체가 새겨져 있다고 썼다. 또 석편산(石山)이 있는데 산이 납작한 바위처럼 생겼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금간옥자지서>는 하(夏) 나라 우임금이 석편에서 물을 다스리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썼다. 또 사적산(射的山)이 있는데 멀리서 이 산을 바라보면 궁수가 활을 당겨 산을 과녁으로 쏘는 듯 해서 이름이 사적산이다. 이 산의 서쪽에는 사당(射堂)이라고 하는 석실이 있다. 사람들은 사적산이 농사의 풍작여부를 점친다고 여겼다. 사적산이 맑으면 쌀값이 떨어지고 흐리면 쌀값이 오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적이 희면 쌀 백(百)을 풀고 사적이 검으면 쌀 천(千)을 푼다는 속담이 생겼다

역도원의 동생 역도박(酈道博)은 <수경주> 제40권을 읽으며 형님이 물길을 가로 기준으로 하고 강물의 유역을 세로 기준으로 한 것을 발견했다. 그 중 제40권에서는 절수(浙水)를 쓰면서 절수 강이 흘러 지나는 산발과 호수, 군(郡)과 현(縣), 명승, 수문, 민속, 역사 등을 모두 기록했다. 그래서 <수경주>는 글자수가 30여만자에 달할 정도로 엄청나다. 역도박이 감탄했다.

“형님, 형님은 평생의 반을 이 <수경주>에 쏟아 부었습니다. 형님이 얼마나 많은 산천을 섭렵했는지, 얼마나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는지 이제 이 거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형님의 그 엄밀한 학문의 자세에 감동을 받고 형님의 눈부신 문필에 감탄할 것입니다. 형님은 이 책으로 인해 길이 이름을 남길 것입니다.”

동생의 말에 역도원이 대답했다.

“나는 공무와 이 저서를 위해 살았다. 이제 저서를 완료했으니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다.”

하지만 역도원은 한을 품고 죽었다. 그것은 그가 비명에 죽고 너무 비참하게 죽었으며 특히 물이 없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연을 들어보자. 여남왕 원열은 매일 자신의 정인인 구념을 죽인 역도원에게 복수할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그는 옹주(雍州) 자사(刺史) 소보인(蕭寶夤)이 북위를 배반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복수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즉시 사촌형인 원미(元微)를 찾아갔다.

“형님, 역도원이라는 그 자식이 아주 밉지요?”

“물론이지. 잡아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다른 사람의 손을 빌어 그를 죽일 방법을 생각했으니 형님께서도 협조해주시오.”

원열은 원미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함께 호태후를 찾아가 아뢰었다.

“마마, 옹주 자사 소보인이 우리를 배반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합니다. 빨리 역도원을 관서(關西)에 보내세요! 역도원이 감시하면 소보인은 감히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원미도 풍을 달았다.

“그렇습니다. 역도원 말고 조정에 소보인과 대적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소보인은 남제(南齊)의 황제 소란(蕭鸞)의 아들이다. 다만 소연(蕭衍)이 황위를 빼앗고 국호를 양(梁)이라고 고친 후 소보인의 형제 아홉을 죽이는 바람에 우리 위(魏)나라를 찾아왔지. 지금 관중(關中) 일대가 그의 세력범위에 있는데 그가 장안(長安)에서 황제로 칭하면 확실히 문제가 심각하다. 역도원을 보내서 소보인을 감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긴 하다. 역도원처럼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엄한 관리가 아니면 문무백관 중에 누가 감히 관중으로 가려 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호태후가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럼 역도원을 관우대사(關右大使)로 임명해서 옹주 자사를 감시하게 하라.”

호태후의 말에 원미와 원열은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음험한 이 두 사람은 비열한 꾀임수로 역도원을 다시는 헤어나오지 못할 궁지로 몰아넣었다.

(다음 회에 계속)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