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0 10:00:22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서광계 편: 제4회 군 훈련, 그리고 꺾인 포부

(사진설명: 서광계의 무덤)

제4회 군 훈련, 그리고 꺾인 포부

천계(天啓) 황제가 붕어하고 위충현(魏忠賢)이 자결했으며 숭정(崇禎) 황제가 즉위했다. 병석에 누운 서광계(徐光啓)는 슬픔에 젖어 뼈아픈 과거를 추억했다…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郞) 양호(楊鎬)의 지휘로 요양(遼陽)에서 후금(後金)의 군대와 작전을 펼친 네 갈래의 군사가 전부 패배했다. 경성(京城)의 백성은 불안에 떨고 조정의 대신들도 허둥지둥했다. 나는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제쳐두고 군사훈련을 맡아 나라에 보답하련다는 종군(從軍) 지원의 소를 만력(萬曆)황제폐하께 올렸다. 폐하께서는 나의 영웅적 혈기를 가상하게 여기시어 나에게 소첨사(少詹事) 겸 하남도어사(河南都御使) 관직을 내리셨다. 통주(通州)에서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나는 또 민병(民兵) 무장을 훈련시키고,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제조해 화포로 성을 수비하며, 그래야 누르하치 기병의 맹렬한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등 10가지 제언의 소를 올렸다. 당시 요동(遙東)의 전쟁과 군비가 긴장한 관계로 폐하께서는 나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셨다. 내가 극력 쟁취해서야 폐하께서는 소수의 민병과 무기만을 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력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시고 그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태창(泰昌) 황제 폐하께서도 1개월 후에 붕어하셨다. 그 뒤를 이은 천계(天啓) 황제 폐하께서는 군사를 중시하지 않으셔서 나는 포부를 펼 기회가 없어서 벼슬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하지만 폐하께서 윤허하시지 않아 나는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요양이 점령되자 폐하께서는 급히 나를 부르셨고 나는 또 다시 홍이대포를 만들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그로 인해 병부상서(兵部尙書)와 논쟁이 붙었고 어사(御史)도 나를 탄핵하는 바람에 다시 병을 핑계로 집에 돌아왔다.

천계 3년(1623년), 폐하께서는 또 다시 나를 부르시고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관직을 내리셨다. 그런데 위충현(魏忠賢)이 이에 불만족해 어사 지정(智鋌)과 결탁해 또 나를 탄핵했다. 내가 어찌 간신들과 싸워 이길 수 있겠는가? 결국 또 다시 벼슬을 잃고 집으로 돌아왔다. 조정에는 간신이 판을 치고 북쪽에는 강한 적수가 호시탐탐 엿보는 내우외환의 이 위급한 때에 나는 이번에는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병석에 누웠다

서광계가 슬픔에 잠겨 나랏일을 걱정하고 있는데 좌시랑의 관직으로 예부(禮部)의 사무를 보라는 어명이 내려왔다. 그는 또 군대 훈련 건과 화포도입 건을 강조했으나 숭정제는 텅 빈 국고를 감안해 먼저 국고의 수입을 늘릴 것을 요구하며 둔전(屯田)과 염정(鹽政)에 관한 좋은 방법을 제출하라고 했다. 서광계가 말했다.

“둔전의 관건은 대대적인 개간을 호소하는 것이고 염정의 관건은 소금의 밀매를 엄격히 금지하는 것입니다.”

이를 높이 평가한 숭정제는 즉시 서광계의 제언을 받아 들였고 그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승진시켰다.

숭정제가 어려운 나라 안팎의 사정에 골머리를 앓는데 일식이 발생했고 흠천감(欽天監)의 예측도 빗나갔다. 원래 천지 간의 일에 신경을 쓰던 숭정제는 흠천감대(欽天監臺) 관리에게 화풀이를 했다. 천문관측관리를 처형하겠다는 황제의 말에 서광계가 나섰다.

“무릇 역법은 오랫동안 사용하면 오류가 나기 마련입니다. 제때에 역법을 개정해야지 천문관리를 죽여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서광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숭정제는 서방의 선교사 몇몇을 불러 역법을 개정하게 하고 이 일을 서광계에게 일임했다. 서광계는 마테오 리치가 쓴 천문학 저서에 나오는 과학지식과 선진적인 기술에 근거해 역법을 개정했다. 이는 그 후 4백년 동안 사용한 중국 역법에 과학적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된다.

숭정 4년(1631년) 정월, 서광계는 황제에게 <숭정역서(崇禎曆書)>를 올렸다. 그리고 그 해 10월 초하루, 또 일식이 발생했다. 서광계는 황제에게 시차(時差)와 이차(里差)에 관한 상세한 방법을 논술한 <측후사설(測候四說)>을 올렸다.

숭정 5년(1632년), 서광계는 예부상서(禮部尙書) 겸 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의 관직으로 나랏일을 결정하는 내각에 참여했으며 이어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책봉되고 문연각대학사(文淵閣大學士)가 되었다. 서광계는 1품이라는 높은 관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일을 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것은 당시 국구(國舅) 주연유(周延儒)가 명의 조정을 장악했기 때문에 서광계의 말은 여전히 무력했고 그는 여전히 포부를 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부패한 조정과 내외우환의 나라사정에 고민하던 서광계는 병석에 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광계의 마지막 남은 숨을 거두어가는 침통한 변고가 발생했다.

서광계는 숭정 4년(1631년)에 서방의 화기를 사용하는 정예부대를 구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인 손원화(孫元化)를 등래순무(登萊巡撫)로 임명해 이 부대를 관리하게 했다. 그 해 8월, 후에 청태종(淸太宗)이 된 황태극(皇太極)이 대릉하성(大凌河城)을 공격해 손원화는 부장(部將) 공유덕(孔有德)에게 8백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지원하게 했다. 급박한 상황에 원병은 밤에 낮을 이어 전선으로 이동했으나 그 과정에 관아의 후원을 받지 못해 아무런 물자도 보급받지 못했으며 백성들도 나랏일을 무시해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었다. 공유덕의 군사가 오교(吳橋)에 이르렀을 때 바람이 불고 비까지 내렸다. 기아를 참지 못한 한 병사가 한 백성의 닭 한 마리를 훔쳤는데 공교롭게도 그 백성은 현지의 명문가인 왕상춘(王象春)이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나라야 어떻게 되든 자신의 작은 울타리만 챙기기 바쁜 왕상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러 가는 병사를 봐준 것이 아니라 닭을 훔친 병사의 머리를 베라고 공유덕에게 요구했다. 왕상춘의 무리한 요구는 병사들의 불만을 야기시켰다. 병사들은 군사의 생사를 무시하는 조정과 애국심이 없는 백성을 욕하며 “이럴 바엔 산에 올라 화적 노릇이나 하자!”고 외쳤다. 결국 병사들은 공유덕을 위시해 조정이 들썩한 오교병변(吳橋兵變)을 일으켰다. 숭정 5년(1632년) 공유덕의 반군이 등주(登州)를 점령하면서 그 화로 손원화가 조정에 의해 참형을 당해 거리에 버려졌다. 숭정 6년(1633년) 공유덕이 황태극에게 항복했고 그로써 후금은 서방의 화기로 무장한 정예부대를 가지게 되었다.

다년간 쏟은 서광계의 심혈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이는 객관적으로 강적에게 가장 선진적인 무기와 군사기술을 넘긴 꼴이 되었다.

어느 날, 한 지인이 병석에 누워있는 서광계에게 그림 한 폭을 보내왔다. 서광계가 그림을 펼쳐 보니 유명한 화가 은해(殷偕)의 신작 <해청격곡도(海靑击鵠圖)>였다. 화면에는 작은 해동청 보라매가 고니의 머리를 잡고 부리로 고니의 눈을 쪼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그 화면에 서광계는 온 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이렇게 생각했다.

“이 해동청 보라매는 후금이 숭상하는 흉악한 새가 아닌가? 이 새는 후금의 영혼이고 이 고니는 바로 명 왕조구나! 아아, 화가도 나랏일을 걱정하는구나.”

서광계가 그 의미심장한 그림을 보며 신음하는데 아들이 허둥대며 들어왔다.

“아버님! 큰 일 났습니다! 반군 두령 공유덕이 황태극에게 항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버님께서 훈련시키신 그 화기부대도 거느리고 갔습니다.”

그 놀라운 소식을 듣자 서광계는 애간장을 태우며 피를 토하다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숭정제는 서광계의 별세를 가슴 아프게 생각해 그를 소보(少保)로 책봉하고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한 어사가 말했다.

“서광계는 사후 재산도 얼마 남기지 못했습니다. 조정은 응당 그를 후하게 위로해서 탐관오리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숭정제는 어사의 말을 따랐다. 하지만 서광계가 바라는 것은 자신의 사후 슬퍼하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평생의 꿈은 나라가 강성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고 그의 포부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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