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09:19:40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42] 소흥: 아름다운 물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소흥)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마흔 두 번째는 아름다운 물의 도시 소흥(紹興)이다. 사람들은 소흥을 말하면 노신(魯迅)의 작품에 나오는 소흥주(紹興酒)와 예스러운 배, 벅적거리는 무대, 장삼을 입고 술을 마시는 공을기(孔乙己), 사당에 사는 아Q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오늘날 소흥에 들어서면 이런 그림 외에도 아름다운 감호(鑒湖)와 고대 월(越)나라의 흔적, 소흥 고유의 짙은 문화적 분위기, 유구한 역사가 발길을 잡는다.

장강(長江) 삼각주 남쪽, 절강(浙江)의 동북쪽, 전당강(錢唐江)의 서쪽 기슭에 위치한 소흥은 예로부터 풍부한 인문경관과 아름다운 물, 독특한 풍토문물로 내외에 이름이 자자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소흥고성)

일찍 신석기 시대 이 곳에는 이미 인간이 살았고 4000여년 전 우임금이 물을 다스릴 때 이 곳 묘산(苗山)에서 제후들에게 상을 내리며 묘산을 회계산(會稽山)으로 개명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월(越) 왕 구천(句踐)이 이 곳에 도성(都城)을 세우고 와신상담하며 나라의 부흥을 꾀하면서 당시 이 곳은 중국 동부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남송(南宋) 때 이 곳은 월주(越州)라 불리며 두 차례나 임시 도성이 되었고 외래의 침략을 피해 남방으로 도주해 남송을 세운 송고종(宋高宗)이 1130년 ‘나라를 이어 받아 다시 흥한다’는 의미로 월주를 소흥부(紹興府)로 개명했으며 그 다음해 자신의 연호(年號)도 소흥으로 바꾸었다. 그로부터 이 곳은 오늘날까지 소흥이라는 지명을 이어온다.

(사진설명: 소흥의 아름다운 물)

소흥의 아름다움은 부드러운 물에 있다. 소흥에는 물길이 얼기설기하고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아 물길의 길이가 1,900km에 달한다. 물의 고장으로 이름이 자자한 소흥은 대표적인 강남 수향(水鄕)이다.

소흥의 도시 구도는 물길을 기본으로 조성되어 물길을 따라 도로가 펼쳐지고 물길 한 갈래에 도로 한 갈래가 따르거나 물길 한 갈래에 도로 두 갈래가 펼쳐지며 심지어 물길만 있고 도로는 없는 독특한 구도를 유지한다.

‘강물은 도로의 일종이고 다리는 도로의 연속이다.’ 물길이 밀집한 소흥에서 다양한 모양의 다리를 안 볼 수 없다. 풍격이 상이한 다리가 만 개 이상 보존된 소흥은 ‘다리의 고장’이라는 미명도 가진다.

(사진설명: 소흥의 다리 팔자교)

소흥의 많은 다리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800여년의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교량의 역할을 하는 아름다운 모양의 송(宋)나라 때 석교 팔자교(八字橋)이다.

소흥에서는 또 옛 사람들이 배를 끌면서 걷던 강가의 오솔길 고섬도(古纖道)도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서 방향으로 소흥을 관통하는 이 길은 소흥을 경유하는 운하의 양쪽에 조성되어 소흥 만의 명소로 남았다.

소흥의 기이한 경관인 이 고섬도는 길이가 5km에 달하는데 운하를 가로 지른 수십 개의 다리를 거쳐가 독특한 경관을 형성하며 이 곳에서는 아름다운 운하와 독특한 다리를 함께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소흥)

‘강남의 문화를 체험하려면 소흥을 보라’는 말이 있다. 문화의 고장으로 소문난 소흥에서는 중국인의 비조 중 한 명인 우임금과 월 왕 구천, 고대 중국의 철학자 왕충(王充), 고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근대 중국 문학의 거장 노신 등 정치가와 사상가, 문학가가 났다.

그밖에 가장 유명한 중국의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李白)과 역시 당나라 때 시인들인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맹호연(孟浩然) 등 400여명의 시인들도 이 곳에 이르러 소흥의 아름다운 산수를 노래하는 시를 남겼다.

소흥은 예로부터 ‘강남의 아름다움이 10점이라면 소흥이 그 중 9.9점을 차지한다’는 미명을 가진다. 5000년의 유구한 문명사와 2500년의 도시사로 인해 소흥 땅 곳곳이 풍부한 문화적 함의를 안고 있어 사람들은 소흥을 담벽이 없는 박물관이라 부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난정)

중국의 예술사에서 진(晉)나라 때 서예가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 이야기는 널리 미담으로 전해진다. 이 명작에 나오는 난정이 바로 소흥성에서 서남쪽으로 약 12km 거리의 난저산(蘭渚山) 자락에 위치해 있다.

오랜 세월 속에서 난정의 입지는 수차 바뀌었고 오늘날 소흥에 남아 있는 난정은 명나라 때인 1548년에 세운 것이다. 운치를 자랑하는 강남의 정원으로 꾸며진 난정은 서예가들이 너도 나도 참배하는 성지로 부상했다.

지난 800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붉고 부드러운 손이(紅酥手) 따라주는 황등주(黃騰酒), 성에는 봄빛 완연하고 담장엔 버드나무 너울거리네(滿城春色宮墻柳)’라는 육유(陸游)의 명시 <채두봉(釵頭鳳)>이 바로 제일 처음 소흥의 심원(沈園) 담에 새겼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심원)

전한데 의하면 육유는 사촌 여동생인 당완(唐琬)과 혼인을 맺고 아기자기 살았는데 육유의 모친이 당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육유는 당완과 헤어졌다가 10년 후에 우연하게 심원에서 만난다.

봄빛 짙은 정원을 거닐며 두 사람은 지난 세월을 추억하며 슬픔에 빠졌고 육유는 즉흥적으로 정원의 담에 이 명시 <채두봉>을 썼다. 그 뒤에 당완은 우울함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고 육유도 깊은 슬픔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송나라 때의 유명한 정원인 심원은 소흥 도심에 위치해 있으며 슬픈 사랑이야기와 달리 정자와 누각, 작은 다리와 맑은 물, 겹겹으로 솟은 가산으로 아름답고 아늑하다.

(사진설명: 노신의 생가)

소흥에서는 노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1881년 9월 25일 노신은 소흥의 동창방(東昌坊)에 위치한 건물에서 태어나 18살까지 이 곳에서 살다가 남경(南京)으로 학문 배우러 갔으며 후에 고향에 다시 돌아온 후에도 이 곳에 머물렀다.

강남 특색이 다분한 노신 생가는 오늘날도 노신이 생활하던 당시의 모습을 유지한다. 생가의 뒤에는 노신이 어릴 때 뛰놀던 백초원(百草園)이 있고 근처에는 또 노신이 12살부터 17살까지 다닌 서당 삼미서옥(三味書屋)이 있다.

서옥의 동북쪽 전시실에는 노신이 과거 사용했던 책상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의 동쪽에는 노신 기념관이 조성되어 이 곳에서는 노신의 생애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소흥)

소흥은 경치도 아름답고 문화재도 풍부하며 풍물 또한 다양하다. 소흥은 월극(越劇)과 소극(紹劇), 연화락(蓮花落) 등 다양한 지방극목을 보유하고 있다. 또 맛이 순하고 향이 짙은 소흥주는 남북조(南北朝) 때부터 황궁에 올리는 공물이었다.

산과 물, 길과 다리, 정원과 고적, 검은 천을 지붕으로 한 예스러운 배, 북적거리는 무대 등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소흥 고유의 우아함과 아늑함을 연출한다.

이 곳에서는 배를 타고 물의 고장의 풍경을 가까이 하고 식당에 들어가서 소흥주를 마음껏 음미하며 시골에 내려가 전통적인 지방극을 감상할 수도 있다. 소흥은 어디서든 시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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