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8 09:49:34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임측서 편: 제2회 입신출세의 비결

(사진설명: 임측서의 석상)

제2회 입신출세의 비결

도광(道光) 2년(1822년) 정월 초 엿새, 봄바람이 꽃봉오리가 가득 달린 복숭아 나무 가지를 흔들었다. 꽃 향기도 없고 한기만 서린 봄바람이었다. 임측서(林則徐)는 복주성(福州城)에서 5리(里, 1리=0.5km) 떨어진 복사꽃밭을 거닐었다. 그 곳에는 송(宋) 나라 때의 유명한 대신 이강(李綱)의 무덤이 있었다. 임측서는 이강의 무덤 앞에서 선현을 그리며 관리로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반성했다. 벼슬의 어려움과 동료들의 시기를 생각하고, 지금도 귓가를 감도는 조소와 풍자를 떠올리니 그는 마음이 무거워져 ‘관리들이 지연을 따지고 조정이 암울하니 큰 뜻을 펼 수가 없다’고 탄식했다.

이 때 아들이 달려와 말했다.

“아버님, 얼른 집으로 돌아가요! 어지(御旨)가 내려왔어요. 폐하께서 아버님을 다시 부르신대요.”

조정에 복귀한 임측서는 강소안찰사(江蘇按察使)가 되었다. 짧은 4개월 동안 그는 누적된 사건을 해결하고 관아의 환경을 정리하기 위해 몸소 현장을 찾아가고 백성들을 만났다. 역대로 남아 내려온 사건 중 8,90%를 해결해 사람들은 그를 ‘임청천(林靑天)’이라 불렀다.

실지상황을 조사하는 과정에 임측서는 아편이 나라와 백성들에게 가져다 준 심각한 문제를 직접 보았다. 아편으로 인해 나라의 세금이 대폭 줄고 관리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아편을 피우기 위해 가산을 탕진했다. 더 비참한 것은 관아의 풍기가 탁해지고 백성들이 노동능력을 상실한 것이었다. 아편으로 인해 중국인들은 점점 피폐해졌다. 급한 마음에 임측서는 강소에서 아편금지를 강하게 밀고 나갔고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여름이 되자 강소에 큰 물이 져서 이재민들의 생계가 어려웠으나 관아에서는 여전히 조세를 받아 들였다. 민란이 일어나고 관아가 위급하게 되자 강소순무(江蘇巡撫)는 군사 탄압을 준비했다. 이 때 임측서가 나섰다.

“이재민들의 생계가 끊어졌는데 여전히 세금을 받아 들이니 민란을 일으키라고 핍박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습니까? 군사를 보내면 반드시 사회적 불안이 조성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정세를 통제하지 못해 폐하께서 불안해 하시면 누가 이 책임을 지겠습니까? 내가 폐하께 소를 올려 식량을 풀어 이재민을 구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앞장 서서 배를 타고 재해지역으로 가서 이재민들을 구제하고 백성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다른 관리들도 분분히 임측서를 따라 나서서 곧 발생할 민란을 막았다.

뛰어난 실적으로 도광제의 중용을 받은 임측서는 그로부터 관운이 형통해 넓고 빠른 입신양명의 길에 올라섰다. 그는 섬서(陝西)와 호북(湖北), 하남(河南), 강녕(江寧) 등지의 포정사(布政使)에 이어 도광 11년(1831년)에는 하동하도(河東河道) 총독(總督)이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강소순무가 되었으며 도광 17년(1837년)에는 호광총독(湖廣總督)으로 승진했다.

청천이라 부를 정도로 청렴하고 성품이 강직하며 성격이 급한 임측서가 벼슬길에서 이렇게 승승장구하게 된 것은 남도다 월등한 그의 실적 덕분이다. 그가 아편금지로 내외를 놀라게 한 동시에 수리시설건설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 입신출세의 한 가지 비결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자신을 치수관리로 임명하자 임측서는 솔직하게 이렇게 아뢰었다.

“소신은 하무(河務)에 익숙하지 않아 아마도 하도총독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누가 날 때부터 치수 전문가가 될 수 있겠소? 잘 할 마음만 있으면 방법은 있기 마련이고 반드시 잘 할 수 있소. 짐은 그대를 믿소!”

황제의 말에 임측서는 더 거절하지 못하고 부임지 산동(山東)으로 갔다. 그는 하천정비 공사를 감독하며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관리들을 응징했으며 유력한 일부 관리들을 승진시켰다. 그는 또 치수분야의 지식을 배우기도 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모든 일을 몸소 행한 것이다. 그 중 한 가지 일만 봐도 빈틈 없는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임측서는 강둑 언제에 필요한 원자재를 감독할 때 모든 자재 더미를 일일이 다 확인하며 그 더미의 높이와 너비를 재고 품질을 관찰했다. 강둑 공사장 근처에 쌓아둔 수숫대와 버드나무 가지에 흙을 섞어 만든 이런 자재 더미는 터진 강둑을 막는데 첫 번째로 필요한 요건이다. 몸소 이런 더미를 점검한 임측서는 더미가 조금이라도 허술하면 허물고 다시 쌓게 했으며 한 더미도 건너뛰지 않고 몸소 일일이 다 확인했다.

임측서가 이 정도이니 수하의 관리들은 비리를 저지를 기회가 전혀 없고 부실공사를 할 기회도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임측서가 감독한 강둑은 아무리 큰 홍수가 져도 붕괴되기는 고사하고 한 방울의 물도 새어나가지 않아 백성들은 전혀 수해를 입지 않았다.

후에 임측서는 호광총독을 맡았다. 호북(湖北)에서는 해마다 수해가 났다. 그 상황을 안 그는 ‘보수와 예방을 겸하는’ 원칙에 따라 강둑을 쌓고 홍수를 방지했다. 결과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몇 천리(里, 1리=0.5km) 강둑은 금성탕지(金城湯池)처럼 든든하고 지천의 강둑도 붕괴된 곳 하나 없어 백성들이 더는 홍수의 피해를 받지 않았다.

임측서가 황하하도(黃河河道) 총독을 할 때 시인 장제량(張際亮)이 황하강이 산동(山東)의 이진(利津)에서 바다에 흘러 들도록 물길을 바꿀 것을 제언했다. 현지 답사를 통해 임측서는 황하의 물길을 이렇게 바꾸면 강물의 수위차가 커져서 오랫동안 수해를 피할 수 있다고 판단해서 장제량의 제언을 받아 들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눈앞의 이익만 보고 관리들은 공사가 엄청나다는 이유로 이 제언을 반대했다. 임측서가 아무리 이 일을 추진하려고 해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고 황제도 윤허하지 않아 결국 황하의 물길을 바꾸지 못했다.

임측서가 세상을 뜬 후인 함풍(咸豊) 5년(1855년) 황하 강둑이 붕괴되었다. 기존의 물길을 벗어난 황하 강물은 굴레 벗은 말처럼 날뛰며 장제량의 설계를 따르기라도 하듯 대청하(大淸河)를 따라 이진으로 흘러갔다. 그 번에 황하 스스로 물길을 바꾸면서 조성된 피해는 엄청났고 백성들은 침통한 대가를 치렀다.

그 때 임측서는 아마 저 세상에서 가슴을 치며 통탄했으리라.

(다음 회에 계속)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