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2 09:40:50 출처:cri
편집:李仙玉

[비하인드 스토리] 추근 편: 제2회 일본 유학을 계획하다

(사진설명: 추근 기념비의 야경)

제2회 일본 유학을 계획하다

1901년 10월 추근(秋瑾)은 상담(湘潭)에서 딸을 낳았다. 딸의 인생이 햇살처럼 눈부시고 지란(芝蘭)처럼 향기롭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그녀는 딸의 이름을 계분(桂芬)이라 하고 자(字)는 찬지(燦芝)라 달았다.

후에 찬지는 과연 추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찬지는 홀몸으로 미국에 가서 항공을 배워 중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었으며 또 개인의 힘으로 ‘추근열사혁명유적전시회’도 열었고 모친을 위해 역사소설 <추근혁명전>도 썼다. 추근의 아들 원덕(沅德)은 여동생에 미치지 못해 후에 호남(湖南) 자료관에서 일하며 평생을 평범하게 보냈다.

찬지가 태어나서 한 달도 되기 전에 왕자방(王子芳)은 ‘강소병비도(江蘇兵備道)’ 관직을 받아 1901년 11월 추근 모자를 데리고 상경했다. 하지만 그들이 금방 북경(北京)에 도착하자 추근의 친정 부친인 호남(湖南) 계양지주(桂陽知州) 추수남(秋壽南)이 세상을 뜨는 바람에 추근은 바로 찬지를 품에 안고 다시 상담으로 돌아갔다.

1903년 5월 추근은 북경에 돌아왔다. 이번에 그들은 원명원(圓明園) 근처가 아니라 북경성 남쪽의 승장(繩匠) 골목에 살았는데 이 곳에서 추근은 이웃에 사는 오지영(吳芝瑛)을 만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재주가 남다른 오지영은 추근보다 7살이나 더 많았지만 두 여인은 아주 의기투합했다. 호부(戶部)에서 일하는 오지영의 남편 염천(廉泉)은 과거시험을 볼 때 공거상서(公車上書)에 동참했으며 유신개혁을 지지했다. 네 벽이 모두 책으로 장식된 지영의 집은 추근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왔다. 추근은 늘 책을 빌리러 지영의 집을 찾아갔고 두 사람은 후에 의자매를 맺고 막역지교가 되었다.

한가위 날, 자방은 집에 벗들을 초청했다. 추근은 하인을 시켜 술과 과일 등을 준비했다. 하지만 남편과 벗들은 달 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 희희낙락하며 기생집으로 술 마시러 갔다.

울적한 추근은 술 몇 잔을 마시고 붓을 들어 사(詞) <만강홍(滿江紅)>을 지었다.

북경에 머물며(小住京華) 어느새 또(早又是) 가을이 되어(中秋佳節) 담장 아래에는(爲籬下) 노란 국화 만발하고(黃花開遍) 가을빛은 씻은 듯 맑구나(秋容如拭). 사면초가 잦아들며 마침내 초나라 망했듯이(四面歌殘終破楚) 하릴없이 절강에서의 팔년을 생각해보니(八年風味徒思浙) 그들은 괴롭게도(苦將) 나를 귀부인이 되라고 했으나(强波作蛾眉) 나는 딱히 달갑지 않았도다(殊未屑)!

이 생에 몸은 비록 사나이가 아니어도(身不得男兒列) 마음은 오히려 사나이 열정에 못지 않았도다(心却比男兒烈)! 평생 간직한 속마음 헤아려 보니(算平生肝膽) 이 마음 늘 다른 사람으로 인해 뜨거웠는데(因人常熱) 속 좁은 그들이 어찌 나를 알아 주겠는가(俗子胸襟誰識我)? 영웅의 마지막 길은 응당 가시밭길이니(英雄末路當磨折) 이 망망한 속세에(莽紅塵) 어디서 마음 알아 줄 사람 찾을 것인가(何處覓知音)?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구나(靑衫濕)!

사를 다 쓴 초근은 남장을 하고 하녀를 데리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경극(京劇)을 보러 극장으로 갔다.

그 후 추근이 남장을 하고 극장에 다닌다는 것을 안 왕자방은 동료들이 그 일을 알면 자신의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해 홧김에 아내의 뺨을 한 대 쳤다. 화난 추근이 남편을 질책했다.

“당신이 사람들과 함께 기생집에 술 마시러 가는데 내가 왜 극장에 경극 보러 갈 수 없어요? 남장이 불법이에요? 내 마음이니 당신은 관계치 말아요!”

그리고 추근은 문을 쾅~ 닫고 집을 나가 객사에 머물렀다. 그녀는 또 ‘동문학사(東文學社)’에 다니며 일본어를 배워 일본에 유학을 가기로 작심했다.

추근이 집을 나가자 왕자방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아내를 때리다니? 그토록 아내를 사랑하고 성격도 온화한 자신이 말이다. 왕자방은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당시 경성에서는 일본 유학 붐이 형성되어 곳곳에 일본어 학원이 있었다. 추근은 오지영으로부터 그녀의 숙부인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 총교습(總敎習) 오여륜(吳汝綸)이 일본에 갔다 와서 일본이 메이지 유신 후에 일약 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고, 그 주된 원인은 일본의 교육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또 유학 가는 방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는 <유학창도서(留學唱導書)>도 읽은 추근은 일본에 가서 사범대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추근이 가출하자 왕자방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에게 서신을 보내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도록 추근을 설득해 달라고 오지영에게도 부탁했다. 추근은 오랫동안 객사에 머무는 것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집에서 일본어를 더 잘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며칠 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자방은 아내가 낮에 밤을 이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을 보고 일본유학을 작심했다는 것을 알았다. 추근이 말하면 말한 대로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자방은 아내의 유학을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반대하지도 못했다. 그는 아내에게 값비싼 은색의 담비 외투를 사주고 마차를 전문 임대해서 아내가 극장으로 경극 보러 가게 했으며 아내가 좋아하는 신문과 책도 많이 사며 아내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애를 다 썼다. 하지만 추근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 옥기 등을 팔아 유학비용을 마련했다.

성격이 강직한 추근은 날 때부터 칼과 검을 좋아했고 열 몇 살에 벌써 기마와 검무를 익혔으며 검에 관한 시도 많이 썼다. 그날 그녀는 마당에서 검무를 추고 나서 자신의 작품 <검가(劍歌)>를 읊었다.

염제가계 의분의 상중절(炎帝世系傷中絶)

나라의 치욕 언제 씻을까(芒芒國恨何時雪)

세상엔 평등은 없고 강권이 판을 쳐(世無平權只强權,)

흥망을 말하니 가슴이 찢어진다(話到興亡欲裂)

천금으로 보검은 살 수 있어도(千金市得寶劍來)

공리는 쇠에 의존할 수 없어(公理不恃恃赤鐵)

생사를 홍모처럼 가볍게 알아야(死生一事付鴻毛)

삶이 경지에 이르고 영웅호걸 되리(人生到此方英傑)

추근이 <검가>를 다 읊기 전에 늘 핫토리 집에서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스즈키 신타로가 핫토리 시게코와 함께 마당에 들어섰다.

핫토리는 경사대학당 사범관(師範館)의 일본 교습이고 그의 부인 시게코는 오지영, 추근과 모두 친구였으며 스즈키는 핫토리가 초청한 일본어 교사였다.

스즈키는 핫토리의 집에서 추근을 처음 만났다. 그는 아름다운 외모에 헐렁한 양복을 입고 보라색의 넥타이를 매고 양식의 지팡이를 짚은 추근이 과장된 동작을 하고 얼굴에 차가운 빛을 띠며 말할 때에도 사람을 몰아세우듯 날카로운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궁금했다. 그는 추근이 두 명의 어린 자식이 있음에도 일본 유학을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추근의 일본어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스즈키는 추근이 일본도(日本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날 자신의 요도(腰刀)를 추근에게 보여주려고 시게코와 함께 추근의 집을 찾아 왔던 것이다.

추근은 일본 요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칼날이 길고 넓은 일본 요도는 서릿발처럼 하얗고 날카로웠으며 이는 칼날이 날카롭지 못하고 무게로 승부하는 중국의 대도(大刀)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스즈키는 추근이 요도에 푹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통쾌하게 말했다.

“좋은 칼은 영웅에게 어울리는 법이니 이 칼을 여장부에게 선물하겠습니다!”

뜻밖의 기쁨에 추근은 격정으로 넘쳐 그 자리에서 <일본 스즈키 문학사 보도의 노래(日本鈴木文學士寶刀歌)>라는 장시를 써서 스즈키에게 선물했다.

스즈키 학사 동방의 인걸(鈴木學士東方傑)

드넓은 흉금에 간담이 흔들(磊落襟懷肝膽裂)

한 줄기 나라 사랑(一寸常愛國心)

두 팔은 만 명의 적을 막네(雙臂能將萬人敵)

평생 기세 하늘 찌르고(平生意氣凌雲)

학문은 좌중을 놀라게 하네(文驚坐客翻波濤)

세상을 흘겨봄에 얼마나 강개한가(睥睨一世何慷慨)

티끌 버리고 보도 잡네(不握纖毫握寶刀)

눈처럼 하얗고 날카로운 칼(寶刀如雪光如電)

좋은 쇠를 녹여 백 번 다졌네(精鐵熔成經百鍊)

얼마 지나지 않아 추근의 남편 왕자방이 시게코를 찾아와 추근과 함께 일본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추근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안 왕자방은 아내의 일본 유학을 지지하려고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당시 추근은 일본과 미국 두 나라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유학을 가려고 했다. 시게코가 아이를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말을 들은 왕자방은 이렇게 생각했다.

“추근이 지인 한 명 없는 머나먼 미국으로 가기보다 시게코와 함께 일본으로 가는 게 좋겠다. 일본에는 지인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왕자방은 추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게코를 찾아 부탁했던 것이다. 왕자방의 말에 시게코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생각했다.

“자방은 자신이 두 아이를 잘 키우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추근이 나와 함께 일본으로 유학 가기를 바라는구나. 추근이 일본으로 가는 길에 동행도 있고 일본에 가서도 지인이 있어야 자신이 마음을 놓는다고 말이다. 아아, 중국에 이런 좋은 남자가 있다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추근이 일본 유학을 생각하던 때로부터 백 년이 넘어 흘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추근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절세의 미인에다 부잣집에 시집을 갔고 남편은 나이도 젊은데다 잘 생기기도 했으며 경성에서 관직을 살았고 슬하에는 또 어린 사랑스러운 아들 딸이 재롱을 떨었다. 그런데 그녀는 왜 귀부인 역할도, 고관의 부인역할도, 어머니역할도 다 마다하고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을까’ 하고 말이다. 하물며 관리가문에서 태어난 그녀는 전족이었고 그 작은 발에 구두를 신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그녀는 ‘속 좁은 그들이 어찌 나를 알아 주겠는가(俗子胸襟誰識我)? 영웅의 마지막 길은 응당 가시밭길이니(英雄末路當磨折)’라고 외쳤던 것이다. 참으로 오늘날도 여전히 사람을 경탄케 하는 그녀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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