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9 10:05:09 출처:cri
편집:李仙玉

[현장법사 편-2] 보우를 받은 배움의 길

(사진설명: 현장법사의 동상)

제2회 보우를 받은 배움의 길

정관(貞觀) 5년(631년), 현장법사는 모진 고난 끝에 수십 개의 나라를 거쳐 끝내 목적지 나란다 사원에 이르렀다. 당시 백 개가 넘는 작은 나라가 있었던 인도에서 불교는 쇠락의 길에 들어서서 곳곳에 황폐해진 사원이 있었다. 인도의 그런 상황을 보면서 불교가 혼잡하고 결여된 자신의 나라를 생각한 현장법사는 더욱 어깨가 무거워지는 감을 느꼈다. 그는 불전의 핵심을 가지고 당나라에 돌아가 당나라에서 불교를 선양하리라 굳데 다짐했다.

27살에 장안을 떠난 현장법사가 나란다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32살이었다. 그 5년 동안 현장법사는 간난신고를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당나라를 떠나 천축으로 향한 과정에 부처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불전을 강의해서 그는 벌써 모두가 아는 고승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현장법사가 나란다 사원에 도착하자 덕망이 높은 4명의 고승이 사원을 나와 현장법사를 맞이했다. 현장법사가 4명의 고승을 따라 한 방에 들어가 식사를 마치자 머리에 향을 꽂고 손에 꽃을 든 승려 200여명과 시주(施主) 1,000여명이 현장법사를 옹위해서 나란다 사원으로 향했다.

현장법사를 맞이하기 위해 사원 밖의 광장에 대기하고 있던 나란다 사원의 승려들이 현장법사를 보자 모두 합장하며 염불하는 것으로 현장법사에 대한 경의를 표시했다. 현장법사는 사원 주인의 옆자리에 앉고 다른 승려들도 차례로 착석했다. 이는 최고의 예우였다. 사원의 집사가 현장법사가 나란다 사원의 일원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의미로 범종을 울렸다.

이튿날 사원은 모두가 하나 같이 잘 생기고 염불을 잘 하는 20대의 스님 30여명을 현장법사에게 보냈다. 그들은 현장법사를 안내해서 나란다 사원의 주지스님인 계현(戒賢, 시라바드라)스님을 배알하러 갔다. 식이 끝나자 계현 스님이 물었다.

“장로는 어디서 오셨소?”

현장법사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법사님에게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배우고자 동쪽의 땅 대당(大唐)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현장법사의 말이 끝나자 계현 스님이 대성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현장법사가 깜짝 놀라 자신이 무슨 말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하고 망연자실해 있는데 옆에 있던 각현(覺賢) 법사가 설명했다.

“계현 스님께서는 올해 106세이신데 통풍병을 앓고 계십니다. 그는 20년 전에 이 병에 걸리셨는데 더는 그 고통을 참지 못하시어 5년 전에 단식으로 고통을 끝내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단식을 시작한 첫날 밤 스님은 꿈에 문수보살을 만났습니다. 문수보살은 계현 스님에게 ‘동쪽의 땅 대당에서 한 승려가 <유가사지론>을 배우러 오는데 너는 반드시 그를 기다려 그가 <유가사지론>이라는 이 불전을 널리 알리게 하라. 너의 통증은 오늘부터 천천히 좋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그날부터 스님의 통증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계현 스님께서 살아 계시는 것은 오로지 대당의 스님을 기다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스님을 만난 계현 스님께서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시고 어찌 실성통곡을 하지 않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큰 감동을 받은 현장법사는 다시 무릎을 꿇고 말했다.

“저에게 불전을 널리 알릴 책임이 있다고 보살께서 말씀하셨으니 저는 반드시 최선을 다 해 배우고 겸허하게 스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현장법사의 말에 계현 스님은 기쁜 얼굴로 또 물었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소?”

“장안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는데 5년이 걸렸습니다.”

계현 스님이 머리를 끄덕였다.

“바로 그 5년이군 그려. 문수보살이 그대가 출발한 것을 알고 나를 찾아오셨네. 오시는 길에 어려움이 많았겠소?”

“그렇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는 과정에 부처의 가르침을 널리 전한 것으로 하여 언제나 전화위복이 되어 죽음에서 살아났습니다.”

“자세히 설명하시겠소?”

“밀출국으로 국경을 통과했고 사막에서는 하마터면 목이 말라 죽을 뻔했는데 늙은 말을 따라 오아시스를 찾아서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막을 벗어난 후에는 서돌궐의 기병 2,000명을 만나 죽을 뻔했습니다. 그 후 고창국(高昌國)에 이르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전한 후 고창국 임금으로부터 20여개 나라를 경유할 수 있는 노자를 지원받게 되었습니다. 카슈미르에 도착해서는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배우면서 그 곳에 2년간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그 곳을 떠나 갠지스강에 이른 후에는 두르가 신도들에게 잡혀 그들의 제물이 될 뻔도 했습니다.”

“신독교(身毒敎)는 산 사람의 피를 제물로 올리는데 그대가 이렇게 잘 생기고 피부도 이렇게 부드러우니 어찌 그들의 눈에 들지 않았겠소. 그래서 후에 어떻게 위험에서 벗어나셨소?”

“제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곳에 온 것은 <유가사지경>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 불전은 미륵보살이 전수했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 자리에 앉아 미륵보살을 외웠습니다. 반드시 보살이 저를 구하리라 믿었지요. 과연 제가 미륵보살을 외우며 좌선에 들어가자 신도들이 칼을 휘둘렀는데 갑자기 대지가 어두워지고 큰 바람이 불며 나무가 잘라지고 모래가 날리며 갠지스 강물이 세차게 흘러 모든 배가 뒤집혔습니다. 그 바람에 저를 죽이려던 그 신도들은 하늘이 노했다고 생각해 모두 도망갔습니다.”

현장법사의 이야기를 듣던 계현 스님은 이렇게 생각했다.

“문수보살이 정한 사람이 다르긴 다르구나. 이 사람은 반드시 <유가사지론>을 널리 전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계현 스님이 말을 이었다.

“그대는 혜근(慧根)이 있으니 내가 몸소 그대에게 <유가사지론>을 가르치겠소.”

그 말에 현장법사는 감동의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생각했다.

“반드시 잘 배우고 깊이 연구하여 계현 스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하겠다.”

106살 고령의 계현 스님이 몸소 불전을 가르친다는 소식이 4,000여 명의 신도를 거느린 나란다 사원에 쫙 퍼졌다. 신도들은 “이는 천재일우의 배움의 기회야! 절대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돼!”라고 하며 서로 서로 이 좋은 소식을 전했다.

계현 스님이 부처의 법을 가르치는 날 노천의 강단 앞에는 사람들로 빼곡했다. 가르침을 듣고자 찾아온 승려들의 수가 3,000명을 초과했다. 참으로 전에 없는 성회였다.

현장법사는 대가의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불교를 연구하며 5년간 나란다 사원에서 머물렀다. 그 중 1년동안에는 <유가사지론>을 배우고 나머지 시간에는 연구에 매진했다.

5년 후 현장법사는 인도 남부를 돌아다니며 부처의 법을 전하고 다시 나란다 사원으로 돌아와 하르샤, 쿠마라와 두 차례에 걸친 불전 토론대회를 거쳤다. 50만명이 참석한 대회에서 현장법사는 엄밀한 논리와 박식한 학문, 심오한 불법으로 모든 적수를 이겨 나란다 사원은 물론이고 인도의 불교계를 뒤흔들었다.

현장법사는 끝내 계현 스님을 이어 가장 뛰어난 불학(佛學)의 대가가 되어 그 시대 최고의 불교학 수준을 대표하게 되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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