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1 09:36:1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59] 돈황: 매력적인 예술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돈황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쉰 아홉 번째는 매력적인 예술의 도시 돈황(敦煌)이다. 눈부셨던 어제는 사라졌지만 곳곳에 있는 문화재와 유적, 방대한 고서와 전적, 정교한 석굴예술, 신비로운 산수 등으로 인해 푸르고 생기로 넘치는 오아시스 돈황은 오늘날도 눈부신 빛을 뿌린다.

옛적에 사주(沙洲)라 불린 돈황은 고대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다. 감숙(甘肅)과 청해(靑海), 신강(新疆) 세 성의 연접지대에 위치한 돈황은 남쪽으로 웅장한 기련산(祁連山)과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타클라마칸 사막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기복을 이룬 북한산(北寒山), 동쪽으로는 우뚝 솟은 삼위산(三危山)과 이웃한다.

춘추(春秋) 때에 돈황은 월지국(月氏國)과 오손국(烏孫國)에 속했으며 그 뒤에는 흉노의 치하에 있었다. 서한(西漢) 때 장건(張騫)이 서역통로를 개척하고 곽거병(霍去病)이 하서(河西)를 점령하면서 돈황은 흉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돈황고성의 일각)

기원전 111년, 한(漢) 왕조가 돈황군(敦煌郡)을 세우면서 돈황은 하서 4군의 하나가 되었다. 세 갈래의 실크로드가 모두 이 곳에 모였다가 신강(新疆)으로 출발하면서 돈황은 동서를 오가는 모든 상단이 필히 거쳐가는 경유지가 되었다.

한(漢)과 당(唐) 왕조 때부터 돈황은 동서양 정치와 경제,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고 그 후 실크로드가 몇 번에 걸쳐 소통과 단절을 이어오면서 돈황도 번화와 쇠퇴를 반복했다.

원(元)나라 때 원정군이 돈황을 경유하면서 돈황의 경제문화가 번창하고 서역과의 무역도 더욱 빈번해졌다. 유명한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바로 이 때 돈황을 거쳐 중원(中原) 각지를 여행했다.

(사진설명: 돈황고성의 일각)

원 나라 때 마지막 흥성을 이룬 돈황은 그 뒤 명(明) 왕조가 수상교통에 열을 올리고 가욕관(嘉峪關)을 정비하는 대신 하서를 포기하며 200년 동안 돈황에 행정지역을 설치하지 않아 천 리 벌 하서가 점차 빛을 잃고 황막한 황지로 변했다.

기나긴 역사 속에서 돈황은 몇 차례에 걸친 흥망을 반복하며 5천 년의 곡절 많은 여정을 걸어왔다. 하지만 유구한 역사로 인해 풍부한 문화를 형성한 돈황은 여전히 눈부신 빛을 뿌린다.

오늘날 보수를 거친 돈황고성은 ‘방송사주성(仿宋沙洲城)’, ‘돈황영화성’이라 불린다. 돈황고성은 송나라 때의 명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근거해 기존의 사주고성을 개조한 것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돈황고성)

동쪽과 서쪽, 남쪽에 서 개의 성문을 낸 돈황고성에는 웅장한 성루가 높이 솟아 있다. 고성에 들어서면 북송(北宋) 시기의 고창(高昌)과 돈황, 감주(甘州), 흥경(興慶), 변량(汴梁) 등 다섯 갈래의 거리가 펼쳐진다.

그리고 거리의 양쪽에는 누각과 사원, 가게, 실크방, 양조장, 주택 등 온갖 건물이 즐비해 당송 때 서북의 중요한 도시였던 돈황의 웅장하고 눈부신 모습을 재현한다.

돈황고성에서는 서역에 위치한 고성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크로드의 신비로운 분위기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돈황은 실크로드의 중점 도시이자 세계 각지의 신도들이 모여 든 중국 초기의 불교중심지의 하나이기도 했다.

(사진설명: 웅장한 막고굴)

막고굴(莫高窟)과 유림굴(楡林窟), 서천불동(西千佛洞), 소천불동(小千佛洞) 등은 보석처럼 망망한 사막에서 눈부신 빛을 뿌린다. 그 중 막고굴은 돈황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이자 고대 실크로드의 눈부신 예술의 보석이다.

366년 서쪽으로 가던 한 고승이 돈황고성의 동남쪽에 이르러 천불이 눈부신 빛을 뿌리는 것을 보고 깨닫는 바가 있어 이 곳에 첫 석굴을 조성해서부터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한 돈황의 문화보고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원 4세기의 십육국(十六國) 시대부터 기원 14세기의 원(元)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10개 왕조가 이 곳에서 쉬지 않고 석굴을 조성해 기나긴 세월 속에서 바람과 모래의 침식을 입었음에도 막고굴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10개 왕조의 시기 별 동굴 50여개를 보존하고 있다.

(사진설명: 막고굴의 비천벽화)

막고굴에 보존된 45,000㎡에 달하는 벽화와 3,000여 기에 달하는 채색의 조각상, 당(唐)과 송(宋) 왕조 풍격을 띤 목조 구조물 5개의 내용은 다수가 불교 이야기을 인용했으며 일부는 당시의 민속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밖에 장경동(藏經洞)에서는 천 점에 가까운 견화(絹畵)와 판화(版畵), 자수, 서예작품을 망라해 5만 점의 필사문헌과 여러 가지 문물이 발견되었다. 막고굴에서 출토된 예술품을 한 점씩 전시하면 25km 길이의 엄청난 세계 갤러리가 조성된다.

막고굴로 인해 한 때 눈부신 번성의 길을 걷다가 쇠락해 600여년 동안 역사의 무대 한 귀퉁이에서 침묵하던 돈황고성이 재차 세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명사산과 월아천)

돈황에는 막고굴 외에 명사산(鳴沙山)이라고 하는 기이한 경관이 있다. 명사산은 부드러운 모래의 산인데 광풍이 불면 모래산에서 우렁찬 소리가 나고 산들바람이 불면 은은한 음악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이름이 모래가 울리는 산이라는 의미로 명사산이다.

오늘날도 명사산에서 소리가 나는 원인을 확실하게 찾지 못했다. 누구는 정전기에 의한 소리라고 하고 혹은 마찰음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며 또 누군가는 공명에 의한 것이라고도 하며 명사산의 원인에 대한 정론이 없지만 그로 인해 명사산은 오히려 더욱 자연의 기묘함을 펼쳐 보인다.

명사산 산중에는 모양이 조각달과 같은 호수가 있는데 이름하여 월아천(月牙泉)이다. 150m 길이에 50m 너비의 월아천에서 신비로운 것은 호수의 사면에 모래산이 둘러서 있지만 호수가 모래에 묻히지도 않고 천 년이 지나도록 호수의 물이 마르지도 않는 것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옥문관)

‘산과 샘물이 함께 하고 모래와 물이 공생하는’ 기이한 경관으로 인해 명사산은 중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명성을 날리는 관광지가 되었으며 모래산에 울리는 맑은 소리를 말하는 ‘사령청명(沙嶺晴鳴)’은 돈황 8경 중 하나이다.

이 밖에도 돈황에는 돈황 고유의 예술을 느낄 수 있는 명승이 아주 많다. 그 중 대표적인 역사명소로는 고대 장성의 한 관문이었던 옥문관(玉門關)과 옛날부터 시에도 많이 나오는, 서역과 중원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양관(陽關)을 꼽는다.

한(漢)나라 때 축조한 장성, 한 나라 때의 고성유적인 하창성(河倉城), 당(唐) 나라 때의 고성유적인 안서쇄양성(安西鎖陽城), 청(淸)나라 때의 고성 교만성(橋灣城) 등도 돈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문화 명소들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야르당 경관)

돈황에는 막고굴 외에도 벽화와 불상이 대량으로 보존된 서천불동과 안서 유림굴(楡林窟), 불교 사원 뇌음사(雷音寺)와 백마탑(白馬塔) 등 다양한 불교명소가 집중되어 있다.

제한된 시간 안에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남겨진 문화재들을 보려면 가장 좋은 명소가 박물관인데 돈황에는 돈황 박물관과 돈황 민속박물관, 안서 박물관을 비롯해 풍부한 문화재를 소장한 박물관도 적지 않다.

사막 속에 위치한 오아시스라고 해서 돈황에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돈황에는 마귀성(魔鬼城)이라 불리는 야르당 지질경관과 사막고유의 신기루 경관, 사막과 숲이 조화로운 사막산림공원 등 자연경관도 많다. 한 마디로 감숙에서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그 곳은 반드시 돈황이라는 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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