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6 10:14:5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62] 매주: 세계 객가인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매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예순 두 번째는 세계 객가인(客家人)의 도시 매주(梅州)이다. ‘문화의 고장, 축구의 고장, 산가(山歌)의 고장’이라 불리는 매주는 세계 객가인의 도시이다.

이 곳에는 풍부한 객가문화와 총명하고 열정적인 객가인, 객가인의 독특한 가옥 ‘토루(土樓)’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순박하면서도 정열적인 객가인 도시의 분위기와 과거 번창하던 중원(中原)에서 미개발지대인 이 곳에 이른 객가인의 선민들이 이 세상에 남긴 눈부신 문명사이다.

옛적에 가응주(嘉应州)라 불린 매주는 광동(廣東)의 동북부, 광동과 복건(福建), 강서(江西) 3성(省)의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디귿자로 매주를 감돌아 흐르는 매강(梅江)이 도시를 강북의 구도시와 강남의 신도시로 나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매주고성)

매주는 역사적으로 영남(嶺南)의 여러 지역과 경성(京城) 지역에서 남쪽의 바다로 나가는 수륙교통의 허브였고 이에 따라 매주는 줄곧 광동과 복건, 강서 접경지대의 정치와 경제, 문화, 군사의 요충지였다.

예로부터 중국 동남 변방의 정치중심과 군사적으로 서로 다투는 중요한 지역인 매주는 ‘매주를 얻으면 복건과 강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매주의 문화는 풍부하고 다채롭다. 일씩 신석기시대에 이 곳에서 생활한 백월(百越) 선민들이 눈부신 백월문화를 창조했고 진(秦)나라 때부터 청(淸)나라까지 이르는 2천 여 년 동안 매주는 줄곧 중국의 중원(中原) 문화와 남방 토착문화가 어울린 곳이었으며 그로 인해 문인묵객들이 집중된 이 곳은 객가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특이한 객가인의 주택)

중원에서 남하한 객가인의 조상은 다수가 선비들이었으며 그들은 남방에 와서도 교육과 문화를 아주 중시했다. 북송(北宋) 초반에 중원을 떠나 매주에 와서 정착한 관리 유원성(劉元城)이 첫 서원(書院)을 세워서부터 천 년이 넘는 동안 매주의 학구열은 식지 않고 여전하다.

이 천 년 동안 과거시험에 합격된 매주의 선비는 아주 많다. 자료에 기록된 사람만 봐도 과거시험에 합격된 진사(進士)는 121명, 한림원(翰林院) 학사는 33명, 향시(鄕試)에 합격된 거인은(擧人)은 1645명, 향시의 수석합격자 해원(解元)은 17명에 달했으며 1차 시험에 합격된 공생(貢生)은 16,479명이나 된다.

‘산이 8할이고 물과 밭이 각각 1할’인 매주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사람과 산은 많으나 경작지는 상대적으로 적다. 따라서 적지 않은 매주인들이 살길을 찾아 바다를 건너 가서 다른 곳의 중국인들과 함께 세계 67개 나라와 지역에서 생활하는 화교 중 일원이 되었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반부터 화교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오면서 매주는 광동에서 중요한 화교의 고향 중 하나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인경루의 입구)

중원문화와 백월문화가 융합된 매주는 풍부한 역사문화 유적을 보존한다. 매주에 남아 있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유적은 398곳에 달하고 고대 도요지는 87곳, 고대 무덤은 179기, 고건물은 206채에 달한다.

그 중 서한(西漢) 시기의 ‘장락대(長樂臺)’ 건축유적과 매서(梅西)의 신석기 시대 도구 작업실 유적, 한(漢)나라 때의 천불철탑, 당(唐)나라 때의 사원인 영광사(靈光寺) 등은 모두 국보급 문화재들이다.

이밖에 매주에서는 또 천 년 동안 우뚝 솟아 있는 천불탑(千佛塔)과 명(明)나라 때의 우물 증정(曾井), 청(淸)나라 때 시인인 황준헌(黃遵憲)의 생가, 송(宋)나라 때의 석교 장원교(壯元橋), 공자의 사당 공자묘(孔子廟)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천불탑)

965년에 세운 천불탑은 매주의 동산(東山) 마루에 우뚝 솟아 있다. 무쇠로 주조한 탑에 천 기의 불상을 부조(浮彫) 기법으로 조각했다고 해서 천불탑 혹은 천불철탑이라 부른다.

전체 높이가 36m에 달하고 9층으로 된 천불탑 제1층에는 탑의 축조 시대를 적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지붕을 만들고 반짝이는 기와를 얹었다.

탑의 옆에는 천불탑에 관한 황준헌의 시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인경려(人境廬)라 부르는 황준선의 생가는 매주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주계(周溪) 강변에 위치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매주)

인경려라는 명칭은 동진(東晉) 때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의 ‘사람 사는 곳에 오두막을 지었지만(結廬在人境) 시끄러운 마차소리 전혀 들리지 않네(而無車馬喧)’라는 시구에서 왔다.

매주는 또 유명한 축구의 고장이기도 하다. 매주가 축구운동을 시작한 시기는 청나라 때인 18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 선교사가 근대의 축구기술을 매주에 전파했다.

1907년 중국 근대혁명의 선구자 손중산(孫中山)이 동맹회(同盟會) 화교두령 온정후(溫靖侯)와 사일교(謝逸橋)를 그들의 고향인 매주에 파견해 송구체육회(松口體育會)를 설립하게 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매주)

그들은 또 체육학교를 설립하고 축구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손중산 선생은 이런 활동의 취지를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위한 군사인재들을 키우는데 두었다.

1930년대 내외 축구계를 들썩하게 하며 ‘아시아 축구의 왕’이라 불린 이혜당(李惠堂)이 바로 매주의 오화(五華) 현에서 태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후 매주의 대중 축구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지난 40여년 간 매주는 국가팀과 13개 성(省), 시(市) 팀을 위해 230여명의 축구 선수와 코치를 육성했다. 그 중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매주출신의 선수는 30명이 넘는다.

(사진설명: 매주의 사원건물)

천 년 역사의 옛 사찰 영광사(靈光寺)는 광동 4대 유명 사찰 중 하나이다. 당나라 때인 860년대 반료권(潘了拳) 스님이 이 곳에 오두막을 짓고 수련했다. 반료권 스님 원적 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사원을 지어 그를 기렸는데 그 사원이 바로 영광사의 시작이다.

오늘날까지 보전된 영광사는 명(明)나라 후에 보수한 것인데 향불을 아무리 많이 피워도 사원 밖에서는 연기 한 줄도 보이지 않고 사원에 고목이 하늘을 찌르는 데도 건물의 지붕에 낙엽 하나 남지 않는 기이함을 자랑한다.

향불연기가 사원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낙엽이 지붕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지금까지 그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건축과학예술의 일대 창조라 할 수 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위룡옥)

객가인의 최종 형성지와 최대의 집거지인 매주는 명실공히 세계 ‘객가인의 도시’이다. 매주의 객가 민속은 줄곧 중원 한(漢)족의 전통풍속을 이어 받고 있다.

매현의 발음을 대표로 하고 옛날 하남(河南)의 억양을 유지하는 매주 객가인의 언어는 중국의  한어(漢語) 8대 방언 중 하나이다. 반달모양으로 된 민가 위룡옥(圍龍屋)과 둥근 토담집 토위루(土圍樓) 등 매주 객가인의 건물은 더욱 유명해서 ‘화하(華夏)의 1절’로 불린다.

객가의 산가(山歌)는 <시경(詩經)>의 풍격을 띤 하늘의 소리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마다 매주의 ‘산가절(山歌節)’이 되면 현지 사람들은 물론이고 고향에 돌아온 화교들까지 모두 노래축제현장을 찾아 명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끝)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