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계)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예순 세 번째는 청산녹수의 가든 도시 적계(績溪)이다. 중국에서 사업가라면 모두 호설암(胡雪岩)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고 문학가라면 호적(胡適)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호설암과 호적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서로 다른 업계에 종사하며 서로 다른 운명을 겪었지만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의 고향이 모두 적계라는 점이다.
안휘(安徽)의 산중에 위치한 적계는 서쪽으로 황산(黃山) 지맥을 가까이 하고 동쪽으로 서천목(西天目) 산발과 이어져 있으며 대장산(大鄣山)과 대회산(大會山), 대오산(大獒山)이 도시 가운데 우뚝 솟아 아름답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계고성)
적계의 산은 산마다 물길과 이웃해 적계에는 길이 2km 이상의 물길이 도합 136갈래에 달한다. 따라서 푸른 산과 맑은 물이 어우러진 적계는 ‘백리 가든’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산발이 기복을 이루고 물길이 얼기설기하며 경작지가 적은 관계로 적계의 사람들은 예로부터 농사보다는 장사를 중시했다. 적계 출신의 상인을 말하는 적상(績商)은 송(宋) 나라 때 벌써 실력을 갖추었으며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번창일로를 달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계)
적계인들이 착실하게 사업을 경영해 교통이 불편하고 가난하던 적계의 경제를 부흥시킨 덕분에 강남에는 ‘안휘인이 없으면 도시가 서지 못하고 적계인이 없으면 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7백 여 년의 세월 속에서 먹과 찻잎, 약초, 잡화 등을 경영한 적계인들의 발자국은 강남과 강북 곳곳에 찍혔다. 그 중 적계인들이 가장 많이 경영한 품목은 안휘의 먹 휘묵(徽墨)과 안휘의 요리 휘채(徽菜)이다.
휘묵은 2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청나라 때의 4대 먹 제조 명가 중 적계의 왕근성(汪近聖)과 호개문(胡開文)이 반을 차지하며 문방사우 중 휘묵의 대표가 되었다.
(사진설명: 적계의 민가)
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호개문 묵장(墨庄)은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반에 북평(北平)과 천진(天津), 상해(上海)를 비롯한 수십 개 도시에 지사를 두었으며 종사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호개문 묵장의 묵은 또 1915년에 파나마 국제 박람회 금상을 받아 휘묵을 세계시장에 진출시켰으며 중국의 제품을 세계에 홍보했다. 안휘의 먹 틀 묵모(墨模)는 안휘의 조각 중 가장 대표적이고 호개문의 먹 틀은 안휘의 먹 틀에서 으뜸이다.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먹 틀을 만들려면 최고 기능의 조각사가 있어야 하는데 호개문의 묵장에는 먹 틀 조각의 달인과 인재들이 아주 많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청나라 때 먹 틀 조각의 명사인 호국빈(胡國賓)이다.
(사진설명: 호설암기념당의 일각)
적계의 상인 대표로는 호설암을 꼽을 수 있다. 호설암은 어릴 때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 후에 각고의 노력으로 금융회사 격인 부강전장(阜康錢庄)을 차렸는데 최고로 번창할 때 중국 전역에 20여 개의 지사를 두었다.
호설암은 또 청나라의 공업발전을 지원해 조정으로부터 포상을 받기도 했다. 금융회사 외에 북경(北京) 동인당(同仁堂)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약방도 세워 중약재의 거두가 된 그는 사업가의 성인, 자수성가의 모범으로 인정된다.
적계에 위치한 호설암기념당은 많은 역사적 자료와 소중한 문물 전시를 통해 과거 호설암이 창업에서 성공한 비결과 그의 사람됨의 이치를 형상적이고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사진설명: 적계의 고건물과 정원)
역대의 적계인들이 모두 교육을 중시한 결과 수 백 년 동안 적계인들은 많은 물질적 부를 창출한 동시에 풍부한 문화적 열매도 가꾸어 아름다운 적계를 위해 두터운 문화의 자양분을 축적했다.
적계인들이 송(宋)나라 때인 1007년에 세운 적계 최초의 서원 계지서원(桂枝書院)은 안휘 최초의 서원이기도 하다. 송나라 때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 명인 소철(蘇轍)이 적계현사(績溪顯事)로 부임되었다.
당시 소철의 창도하에 적계에서 서원이 흥하고 사학(社學)과 사숙이 많아지면서 문화적 분위기가 짙어졌다. 그로부터 문화에 대한 적계인들의 추구는 끊이지 않아 명(明)나라 때 적계의 서원은 57개로 안휘에서 선두를 달렸다.
(사진설명: 적계의 예스러운 고건물)
적계는 청나라 후반에 또 여자학교를 세워 안휘 여자학교의 선례를 열었다. 교육을 중시하면 인재가 나기 마련이다. 적계에서는 중국 근대혁명의 선구자인 호적(胡適)과 휘묵의 대가 호개문 등을 망라해 많은 인물이 났다.
또 아름다운 자연경치와 유구한 역사, 풍부한 문화는 역대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남송(南宋)의 관리이자 문학가인 범성대(范成大)와 북송(北宋)의 개혁가이자 문학가인 왕안석(王安石) 등이 모두 적계에 관한 글을 남기거나 적계에 머물렀다.
적계에 들어서면 산자락마다 하얀 외벽에 검정 기와를 얹은 안휘 특징의 고건물의 마을이 산재하고 곳곳마다 우아한 안휘 풍격의 고건물이 즐비해 마치 안휘의 민속 박물관에 들어선 듯 하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호씨종사)
적계에는 완전하게 보존된 명청시기 유적이 300여 곳이 있다. 강남 제일의 사당이라 불리는 호씨종사(胡氏宗祠)는 엄밀한 구도와 정교한 석각으로 사람들에게 호씨가문의 눈부셨던 어제를 설명한다.
종사 옆에 세워진 혁세상서방(奕世尙書坊)은 호씨 가문의 두 숙질인 호부(胡富)와 호종헌(胡宗憲)이 호부상서(戶部尙書)와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것을 기리기 위한 패방이다.
주씨사당(周氏祠堂)에 기반한 삼조박물관(三彫博物館)에는 천 여 점의 벽돌조각과 목각, 석각 작품이 전시되어 민간 장인들의 피와 눈물의 걸작을 보여준다.
(사진설명: 적계의 아름다운 시골)
옛날 계지서원에서 경서를 강의하고 이치를 설명하던 주희(朱熹)의 목소리가 적계의 순박한 민풍에 깊이 스며들어 웅장한 사당 옆의 흙을 파 헤쳐도 천 년의 문화가 보이는 듯 하고 색 바랜 담벽의 먼지를 벗겨내도 역사의 향기가 피어 오르는 듯 하다.
고요한 시골에서 반들반들한 돌길을 밟으면 머나먼 역사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신비로운 땅 적계는 기나긴 세월의 세례을 거쳐 오늘날 눈부신 안휘 문화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올랐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