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18 10:31:42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64] 외산: 옛 남조국의 발상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외산)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예순 네 번째는 남조고국(南詔古國)의 발상지 외산(巍山)이다. 빠른 템포의 도시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외산에 이르면 생활이 이토록 여유 있고 느긋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란다.

이렇게 바깥세상과 전혀 무관하게 느껴지는 도시가 바로 외산이다. 유구한 역사가 바깥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부여했기에 외산에서는 그런 느긋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운남(雲南) 서부의 대리(大理) 바이족(白族) 자치주 남부 산중에 위치한 외산은 기후가 좋고 민풍이 순박하여 특히 빠른 리듬의 현대생활에 시달린 도시민들에 적합한 곳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외산고성)

몽화성(蒙化城)이라고도 하는 외산고성(巍山古城)은 고대 남조국(南詔國)의 발상지이다. 오늘날까지 보존된 외산고성은 명(明)나라 때인 1389년에 축조해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충무루(忠武樓)와 남훈루(南薰樓), 위원루(威遠樓), 공진루(拱辰樓) 등 네 개의 초루(譙樓)가 네모난 인감을 방불케 하는 고성의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솟아 있고 성곽의 중앙에는 성공루(星拱樓)가 솟아 인감의 손잡이를 방불케 한다.

가로 세로 뻗은 25갈래의 거리와 18갈래의 골목이 거리와 골목 양쪽에 즐비한 건물들과 함께 바둑판을 형성하는 고성은 명(明)나라 때의 도시 모습을 완전하게 유지한다.

(사진설명: 웅장한 공진루)

외산고성의 심벌인 공진루는 8m 높이의 성곽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누각에는 원래 세 겹의 지붕을 얹었으나 후에 2층으로 바꾸고 팔작지붕을 얹었다. 16m 높이의 성루에 올라서면 외산고성이 한 눈에 안겨와 마음이 탁 트인다.

예스럽고 우아한 누각의 남쪽과 북쪽에는 ‘웅괴육조(雄魁六詔)’와 ‘만리첨천(萬里瞻天)’이라는 글자가 씌어진 액자가 각각 걸려 외산고성의 중요한 입지를 보여준다.

액자는 많지 않은 글자지만 웅장한 기세를 돋보이게 하며 무게 있고 힘있게 씌어진 필체로 여섯 개의 소수민족 부락 육조(六詔)를 통일한 남조국 임금의 위풍을 대변한다.

(사진설명: 외산고성의 거리)

외산고성의 거리와 골목은 성공루(星拱樓)를 중심으로 우물 정(井) 모양으로 펼쳐져 있으며 거리와 골목의 양켠에는 예스러운 가옥들이 질서 있게 자리한다.

명나라 때 풍격을 유지하는 고성의 가옥은 다수가 ‘삼방일조벽(三坊一照壁)’과 ‘사합오천정(四合五天井)’의 바이족 건물 특징을 보유한다. ‘삼방’은 방 세 개 넓이에 서로 향한 방향이 다른 3채의 2층 건물을 말하고 ‘일조벽’은 가옥 정원의 동쪽에 세운 안채를 마주한 하얀 담벽을 말한다.

‘사합’은 건물들이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가운데 정원을 둘러싼 것을 말하고 ‘오천정’은 가운데 정원을 기반으로 조성된 네 개의 작은 정원을 말한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고성의 가옥)

외산인들은 다수가 꽃을 가꾸며 특히 난을 좋아한다. 따라서 외산의 집집마다 정원은 아름다운 온갖 꽃들로 단장되어 있다. 난은 또 외산인들의 우아한 거주환경을 보여주는 동시에 조화로운 생활의 분위기와 우아한 심미안적 취미도 잘 보여준다.

외산고성의 밖에는 또 용어성(龍於城) 유적과 대소사(大小寺), 외보산(巍寶山), 원각사(圓覺寺), 남조몽사성(南詔蒙舍城) 유적, 태양궁(太陽宮), 백탑, 삼학동(三鶴洞) 마애석각, 문창궁(文昌宮), 문화서원(文華書院)을 비롯해 많은 명승이 있다.

외산에 있는 부지기수의 이런 명소들은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 아름다운 경관으로 천 년의 세월과 눈바람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외산고성의 눈부신 어제를 말해준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원각사)

하늘높이 솟은 고목들 사이에 자리한 원각사(圓覺寺)는 뒤에 산을 두고 외산고성을 마주하며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산문(山門)을 지나면 사원으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난다.

걸음마다 높아지는 계단을 따라 사원에 들어서면 사대천왕전(四大天王殿)과 대웅보전(大雄寶殿), 후전(後殿) 등 질서 있게 자리한 건물들이 예스러운 모양으로 모두를 맞이한다.

원각사에서는 여러 건물과 정자, 연못, 석교 등의 배치에서 원각사의 엄밀한 구도를 엿볼 수 있다. 건물들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원각사는 아늑한 환경을 자랑하며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외보산)

고성 남쪽의 외보산(巍寶山)은 남조(南詔)의 발상지이다. 남조의 개국 임금 세노라(細奴邏)가 이 곳에서 농사를 짓고 방목했다고 전해진다. 세노라의 가족 사당이라고 전해지는 산자락의 토주묘(土主廟)는 현재 이(彛)족들이 조상을 참배하는 명소로 부상했다.

외보산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전한데 의하면 도교(道敎)의 삼청신(三淸神) 중 한 명인 태상노군(太上老君)이 이 곳에서 세노라를 교화했다고 전해진다.

그로 인해 외보산에는 오늘날도 태상노군이 좌선했던 바위와 선인동(仙人洞), 세심간(洗心澗), 철성정(七星井) 등 명소들이 보존되어 있다. 또 당(唐) 나라 때부터 청(淸)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지방정부와 도교신도들이 산 위에 옥황궁(玉皇宮)과 문창궁(文昌宮), 용담전(龍潭殿), 노군전(老君殿) 등 다수의 건물을 지었고 신산(神山)을 찾는 참배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사진설명: 외산고성의 건물)

남조는 외산에서 90여년 동안 존속하면서 용어도성(龍於圖城)과 몽사성(蒙舍城), 매자정성(梅子箐城) 등 세 개의 도성을 축조했다. 그로부터 1300여년이 지난 후 이 세 고성의 건물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소중한 터만 남았다.

외산고성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용어도성산에 300㎡의 완만한 둔덕이 있는데 이 곳이 바로 남조국 최초의 도성인 용어도성의 터이다. 이 터에는 돌기둥과 벽돌이 산처럼 쌓여 있고 당나라 때의 불교 석각과 신석기시대의 여러 가지 도구, 다양한 공예품이 보존되어 있다.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자랑하는 남조국의 이런 유적들은 옛날 변방지역 소국의 역사를 기록한 동시에 변방의 소수민족문화와 중원문화간의 뿌리 깊은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외산고성)

용어도성산 옆에는 ‘화소송명루(火燒松明樓)’ 라는 명소가 있다. 전한데 의하면 세노라의 여섯 아들이 남조의 여섯 부락을 말하는 육조(六詔)를 관리했는데 큰 야망을 가진 작은 아들 피라각(皮邏閣)이 남조를 통일하려고 738년 6월 24일 인화성이 있는 관솔로 건물을 짓고 송명루라 칭했다.

피라각은 송명루에서 잔치를 차리고 다섯 부락 두령을 초청했다. 오조(五詔)의 두령 중 한 명인 피라등(皮邏登)의 부인 백결(白潔)이 피라각의 야망을 눈치 채고 남편에게 쇠로 만든 팔찌를 착용하게 했다.

오조의 두령들이 잔치를 즐길 때 피라각이 송명루에 불을 질러 오조의 두령이 모두 숨졌다. 오조의 부인들이 어느 시신이 자신의 남편인지 분간하지 못할 때 피라등의 부인만이 쇠팔찌에 근거해 남편의 시신을 찾았다.

(사진설명: 외산고성의 야경)

후에 백결부인은 무력으로 피라등에 맞섰으나 실패하고 남편을 따라갔다. 그 후 사람들은 백결부인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음력으로 6월 25일이 되면 집집마다 횃불을 밝혀 마을안팎을 돌아다녔다. 이것이 바로 이족 ‘화파절(火把節 횃불절)’의 유래이다.

슬픈 전설은 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사실 이족의 ‘화파절’은 이족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전통명절이다. ‘타가(打歌)’라고 부르는 이 명절은 이족의 가장 큰 명절이다.

해가 지면 사람들은 넓은 터의 중앙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막걸리를 마련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전통음악에 따라 모닥불을 둘러싸고 크게 원을 지어 빙빙 돌며 춤을 춘다. 사람이 많으면 여러 겹으로 모닥불을 둘러싸고 노래하고 춤을 추어 분위기가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열정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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