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2 08:11:12 출처:cri
편집:李仙玉

[이백 편-1] 벼슬을 꿈꾸는 詩仙


(사진설명: 이백의 화상)

醉中의 詩仙 이백

그는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며(仰天大笑) 문을 나서는 나그네이자 ‘인생의 뜻을 이루었을 때는 마음껏 즐기는(人生得意須盡歡)’ 주선(酒仙)이고, ‘푸른 하늘에 올라 달을 잡으려는(欲上靑天攬明月)’ 협객이자 ‘칼을 빼어 물을 베니 물은 더 급하게 흐르는(抽刀斷水水更流)’ 검객이다.

그는 일엽편주에 올라 술잔을 기울이고 소리 높여 시를 읊었다. 생애에 남긴 천 수가 넘는 그의 시는 성당(盛唐)의 반을 아우르고, 들으면 ‘하늘땅도 놀라고(驚天地) 귀신도 흐느끼는(泣鬼神)’ 그의 시는 중국문명의 눈부신 보물이다.

그가 바로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인 당(唐) 나라 이백(李白)이다. 이백은 관중(管仲)과 같은 유명한 대신이 되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큰 공을 세우는 것이 꿈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그 웅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대붕을 타고 자신이 꿈꾸던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취중(醉中)의 시선(詩仙) 이백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벼슬을 꿈꾸는 詩仙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으며 문을 나서니(仰天大笑出門去) 내가 어찌 초야에 묻혀 살 사람이겠는가(我輩岂是蓬蒿人)!’높이 솟은 장안(長安)의 성벽을 바라보는 이백의 마음 속에는 웅대한 포부가 불타올랐다. “황도여 내가 왔노라! 비록 좀 늦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 곳에서 나의 재능을 펼치리라!”

그 해는 천보(天寶) 원년(元年, 742년)이고 이백의 나이는 마흔이 넘었다.

이백이 들뜬 마음으로 장안성에 들어서서 ‘만국이 찾아오는(萬國朝拜)’ 제왕의 도시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려는데 마침 황실 의장대가 호호탕탕하게 다가왔다. 이백이 급히 한쪽으로 비켜서는데 옆에서 한 노인의 말소리가 들렸다.

“황제폐하께서 또 남산(南山)으로 사냥을 가시는 구려.”

이백은 눈이 움푹 들어가고 코가 높이 솟은 많은 외국인들이 의장대의 뒤를 따르는 것을 보았다. 말 잔등에 높이 올라 앉은 그들은 모두 사냥을 위해 짧은 상의에 긴 장화를 신은 호복(胡服) 차림이었다. 이백이 낮은 목소리로 그 노인에게 물었다.

“이 외국 사신들도 황제와 함께 사냥을 가는 건가요?”

“그렇다네. 우리 대당(大唐)의 명성이 온 세상에 퍼져서 사방에서 모두 찾아와 우리 나라를 따르니 대당의 천자(天子)를 따라 사냥을 가는 건 그들의 영광이지 그럼!”

노인의 말에 뿌듯함이 벅차 오른 이백은 이렇게 생각했다.

“대당의 성세(盛世)에 태어나는 행운을 가졌는데 나라와 백성을 위해 포부를 펼치지 못한다면 이 위대한 시대에 너무 미안한 일이다!”

이백은 장안성을 유람하려던 생각을 접고 남산 기슭에 있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밤새 구상 끝에 당나라 명황(明皇)제에게 올릴 <대렵부(大獵賦)>를 지었다. 그는 부에서 천하를 정복하고 국토를 넓힌 대당, 물산이 풍부하고 백성들이 잘 사는 대당을 칭송하고 이전의 왕조와 전혀 다른 대당은 4백 년 동안 존속한 강성 왕조 한(漢) 나라도 훨씬 초과한다고 썼다. 그리고 부의 말미에서 이백은 도교를 숭상하는 황제의 마음에 들기 위해 도교의 현묘한 이치도 언급했다.

대작을 마치고 침상에 누운 이백은 저도 모르게 떠나온 고향과 십여 년 동안 세상을 떠돌던 어제를 떠올렸다…

개원(開元) 13년(725년), 그 해 나는 25살이었고 그때 벌써 고향인 강유현(江油縣)을 떠나 촉(蜀)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성도(成都)에 가서 선사(仙師)를 배알했으며 아미산(峨嵋山)에서 검술을 배웠다. 그 때 나는 심경의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나의 개성과 취미로는 속세를 벗어난 은사(隱士)나 신선이 되고 싶었고 혹은 재물보다는 의리를 지키는 방랑 협객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모친께서는 나를 낳으실 때 태백금성(太白金星)이 꿈에 나타났다고, 내가 하늘의 별이 속세에 내린 것이니 이 생에 반드시 큰 일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또 벼슬길에 올라 하늘 땅이 놀랄만한 큰 일도 하고 싶었다.

이상하게 나는 참으로 신동(神童)이었다. 다섯 살 때 육갑(六甲)을 읽고 열 살 때 백가(百家)를 보았으며 열 다섯 살 전에 쓴 시가 촉 땅 명사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스물 다섯 살이 되던 해에 끝내 이 세상의 명사들을 만나고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배를 타고 사천(四川)을 떠났다.

그 때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시를 이렇게 잘 쓰고 조정은 또 시를 가지고 선비를 평가하는데 왜 과거시험을 보지 않습니까?

아아, 나에게는 말 못할 고충이 있지 않은가. 조부(祖父)께서 죄를 지으셔서 서역(西域)으로 유배를 가셨다가 내가 다섯 살이 되는 그 해에야 부친께서 몰래 가족을 거느리고 촉주(蜀州)로 돌아와 강유현 청련향(靑蓮鄕)에 터전을 잡으셨다. 범죄자의 자손은 과거시험을 볼 수 없는데다 부친께서는 줄곧 장사를 하시니 이런 신분을 가진 내가 무슨 자격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니 명사들의 천거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강릉(江陵)에 이르자 나는 운이 좋게도 천대도사(天臺道士) 사마승정(司馬承禎)을 만났다. 그는 아주 유명했고 삼대에 걸친 황제들이 모두 그를 존경했다. 지금의 황제폐하는 심지어 늘 그를 궁중에 불러 그로부터 경법(經法)을 배우고 그를 위해 양대관(陽臺觀)을 지어주었으며 옥진(玉眞)공주까지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내가 쓴 시를 사마승정에게 보여주자 그는 기개가 비범하다고 나를 칭찬했음은 물론이고 나의 시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기운을 갖추었다고 말했다. 그의 칭찬을 받고 나는 부 <대붕우의유오적(大鵬遇希有鳥賊)>을 써서 그에게 올렸고 그로 인해 나는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후에 나는 여산(廬山)을 유람하고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를 썼으며 금릉(金陵)을 보고 나서는 <금릉주사유별(金陵酒肆留別)>을 썼다. 또 회계(會稽)와 경호(鏡湖), 천모산(天山), 난정(蘭亭), 동산(東山)을 유람하고는 <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吟留別)>을 썼다. 여러 곳을 보면서 백 수가 넘는 시를 써서 나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졌으나 벼슬은 나에게 여전히 물 속의 달이요 거울 속의 꽃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은사(隱士) 맹호연(孟浩然)을 만난 후 수산(壽山)의 도관(道觀)에 은둔했다. 그런데 생각밖에 재상을 지낸 적이 있는 허어사(許圉師)가 나의 재능을 높이 사서 자신의 손녀를 나에게 시집 보냈다. 그래서 나는 집을 가지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두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남에게 얹혀살기 위해 내가 사천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우울했다. 그리고 나는 계속 명사들을 만나며 벼슬길에 오를 방도를 찾았다.

형주(荊州) 장사(長史) 겸 양주(襄州) 자사(刺史) 한조종(韓朝宗)이 인재를 알아보는 대가여서 그의 인정만 받으면 곧 명성을 떨쳐 벼슬길에 오를 지름길을 찾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한 형주에게 보내는 서신 <여한형주서(與韓荊州書)>를 써서 살아 만 가구의 식읍을 받는 후작이 안 될지언정(生不願萬戶侯) 한형주를 한 번 만나리(但願一識韓荊州) 라는 말로 아부하고 또 시를 가지고 형주에 가서 그를 배알했다. 하지만 그가 나의 서신과 시를 받아보고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그가 인재를 알아 본다는 말은 헛소문이구나! 천재(天才)의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나의 시를 알아 보지 못하는 그가 무슨 인재를 알아 보는 대가라는 말인가?

올해, 누군가 종남산(終南山)에 은둔하면 맑고 속되지 않은 기운을 얻어 곧 조정의 부름을 받게 된다고, 이런 방법을 일러 종남첩경(終南捷徑)이라 한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 번 시도해보자는 생각으로 종남산 자락에 은둔 거처를 두었다. 아아,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내가 이런 사람이 되다니, 나도 내 자신이 싫어진다. <몽유천모음유별>에서 어찌 머리 숙이고 허리 굽혀 권력과 부귀를 섬기며(安能眉折腰事權貴) 내 마음과 얼굴을 펼 수 없게 하겠는가(使我不得開心顔)라고 마음의 소리를 썼는데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이렇게 속되게 변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이백은 기분이 우울해서 정원 의자에 앉아 바닥에 하얗게 깔린 서리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가을이 깊어 벌써 이슬이 서리가 되었구나. 고향을 떠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또 한 해가 헛되이 흘러 가는구나.”

고향을 생각하니 가슴 속에는 더욱 슬픔이 차 올랐다. 이백이 머리를 드니 하늘에 반달이 떠있었다. 이백은 그제서야 바닥에 깔린 것은 서리가 아니라 달빛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백은 즉흥적으로 시를 읊었다.

평상 앞에 밝은 달빛(床前明月光)

땅 위에 내린 서리인가 하노라(疑是地上霜)

머리 들어 달을 바라보고(擧頭望明月)

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네(低頭思故鄕).

짧은 네 구절, 20개 한자로 된 이 시는 경물묘사와 감정토로가 어우러져 무궁한 정취를 보여준다. 천 년 동안 전해지는 이런 천고의 절창을 쓴 이백은 성격이 호방하고 심성이 맑은 천재 시인임이 틀림 없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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