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2 14:35:49 출처:cri
편집:金虎林

란가산의 전설

란가산의 전설
프로젝트번호:1050
발표시기: 2011(제3진)
소속지역:산시 성
신청지역 또는 단위: 산시성 링촨현

란가산(烂可山)의 전설은 오래된 민간 전설로 중국 여러 곳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최초의 기록은 진·우희(晋·虞喜)의 《지림(志林)》에서 볼 수 있다. "신안산(信安山)에 석실이 있으니 왕질(王质)이 그 방에 들어가서 두 동자가 바둑을 두는 것을 보는데, 판이 끝나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땔 나무가 썩어 그때에야 문득 고향으로 돌아가니 이미 세상이 변했다.” 양·임방(梁·任肪)의 《술이기(述异记)》에 이르기를 "신안군의 석실산이다. 진나라 때 왕질이 땔나무를 하러 갔다가 동자 여럿을 만났다. 동자는 바둑을 두며 노래를 불렀고 왕질은 그것을 들었다. 동자가 뭔가를 왕질에게 줬는데 대추씨 같은 물건과 재질이었다. 왕질이 그것을 입에 머금으니 배가 고픈 줄 몰랐다. 갑자기 동자가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왕질이 보니 대추씨가 이미 썩어버렸다. 마을에 돌아가니 이미 사는 사람이 없었다. " 신안, 즉 지금의 취저우(衢州)로 서진(西晋) 태강(太康) 원년에 개명하였다.



더 이른 기록은 《상서·홍범》(尙書·洪范)에 나오는 '유십유삼사(唯十有三祀) 왕어(王于)가 기자(箕子)를 방문한다'는 이야기로 나타나는데, 란가의 줄거리나 어구는 나오지 않지만 그 취지가 란가의 이야기와 유사하여 란가의 전설인 기자산(棋子山) 버전의 남상(南觞)일 수 있다. 기자(箕子, 본명 서여-胥余)는 은나라 주왕(纣王)의 숙부로 은나라 주왕의 황음(荒淫)무도함과 포학(暴虐)함에 반대하여 몇 차례 간언한 끝에 주왕에 의해 수감되어 노예로 강등되었다고 전해지며, 후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왕을 멸하자 기자는 산시성 능천(陵川)으로 도망쳐 은거하였다. 기자는 능천의 기산(棋山)에서 천연 흑백의 돌로 점을 쳐 천상(天象), 별상(星象)을 관측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바둑을 만들고, 사람과 자주 대국(對垒)을 하며 바둑을 성숙시켰다. 청 옹정(清雍正)판 『산시 통지·산천(山西通志·山川)』, 청나라 무팽령(武彭龄)의 『기산이적고(箕山履迹考)』, 청나라 광서(清光绪)판 『능천 현지』에도 기자산 및 기자가 능천에 은거하여 바둑을 연구했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대로 전해 내려온 란가산 전설은 점차 다양한 종류의 방대한 란가산 전설 시리즈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산중의 하루는 세상의 천 년이다'라는 사상과 문화적 상징이 되었다. 중국 전통문화의 조화로운 철학을 설명하는 것은 란가산 전설의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특징이다. 민간에 뿌리를 둔 란가산 전설은 사람들에게 천하도원(天下道源)의 선경을 그릴 뿐만 아니라, 천인(天人) 상호 조화라는 중국 고대 철학의 최고 이상을 제창하여 사람들이 긍정적이고 초탈한 인생 태도로 살아가도록 인도한다.


 란가산 전설은 천인의 조화로운 철학과 사상, 긍정적이고 초탈한 삶의 태도, 문화적 품격으로 중국 노동인민들의 민속 심리와 미적 추구와 일맥상통하며 긍정적인 인식과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전설은 계승 과정에서 그 종류와 함축성이 끊임없이 풍부해져 오늘날까지 쇠퇴하지 않고 있다. 이를 계승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조치가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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