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훅호트)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예순 일곱 번째는 청색의 도시 훅호트(呼和浩特)이다. ‘넓은 칙륵(勅勒)벌판 음산(陰山) 기슭에 펼쳐져 있는데 둥글게 펼쳐진 하늘 사면으로 대지와 연결되었네. 하늘은 창망하고 벌판은 광막한데 바람 불어 풀이 누우니 그 속으로 소와 양떼 보이네.’
모든 사람들이 익숙한 이 초원의 노래는 바로 푸른 벌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그 위에 하얀 구름 같은 양떼가 보이는 아름다운 초원풍경을 묘사한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초원의 도시가 바로 훅호트이다.
몽골어로 ‘청색의 도시’를 말하는 훅호트는 일명 ‘푸른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음산의 산자락, 남쪽으로 황하(黃河)와 이웃한 훅호트의 주변에는 소와 양떼가 점점이 수를 놓는 넓은 초원이 펼쳐져 예로부터 ‘하늘은 창망하고(天蒼蒼) 벌판은 광막한데(野茫茫) 바람 불어 풀이 누우니(風吹草低) 그 속으로 소와 양떼 보인다(見牛羊).’고 묘사된다.
(사진설명: 훅호트의 고건물)
훅호트는 기원전의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때 운중군(雲中郡)이었다. 북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와 중원(中原)의 한(漢) 족 사이에 늘 전쟁이 있었던 당시 훅호트는 중원지역의 최전방이었다.
진나라는 6국을 멸한 후 대장(大將) 몽염을 파견해 30만 대군으로 흉노를 크게 격파했으며 한나라는 흉노와 ‘화친(和親)’ 정책을 펼쳐 기원전 33년 한 왕실의 왕소군(王昭君)을 흉노의 두령에게 시집을 보내기로 했다.
이로써 한족과 흉노간 이어진 150여 년의 적대적 상황이 종료되고 두 지역의 통일과 경제문화 교류가 빠르게 진행되었으며 ‘소군출새(昭君出塞)’의 이야기는 2천여 년 동안 민족단합과 융합의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설명: 멀리서 바라본 소군묘)
멀리서 소군묘를 바라보면 무덤은 검푸른 색을 띤다. 다른 곳과 달리 유난히 푸르다고 해서 일명 청총(靑冢)이라 부르는 소군묘는 흙으로 쌓은 봉분의 높이가 33m에 달한다.
무덤 앞에는 왕소군과 흉노의 선우(單于)가 어깨 나란히 말을 타고 달리는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검푸른 무덤을 말하는 ‘청총옹대(靑冢拥黛)’는 훅호트 8경 중 하나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요(遼) 나라와 금(金) 나라 때 훅호트는 민심이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되었으며 원(元)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남과 북의 원활한 교류의 요충지로 부상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고성 유적)
명(明) 나라 때인 1500년대 중반 원 황실의 후손인 아러탄(阿勒坦) 칸이 대청산(大靑山)의 남쪽, 황하 기슭에 건물 여덟채와 반짝이는 노란 기와를 얹은 금은전(金銀殿)을 지었다. 명 황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그 성에 ‘귀화성(歸化城)’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 귀화성이 바로 오늘날 훅호트시의 시작이다. 도시의 뒤에 기복을 이룬 푸른 산발이 도시에 생기를 부여한다고 해서 현지의 몽골족들은 ‘청색의 도시’라는 뜻으로 ‘훅호트’라 불렀다.
귀화성이 축조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아러탄 칸이 세상을 뜨고 그의 아내 삼낭자(三娘子)가 이 도시를 관리했는데 그녀는 명 왕조와 화목하게 지내서 몽골족과 한족은 30여년 동안 전쟁을 일으키기 않고 평화롭게 보냈다.
(사진설명: 훅호트의 일각)
흉노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한 만리장성 양쪽의 사람들은 장성 남과 북의 평화를 가져온 초원의 이 여걸을 기념하기 위해 귀화성을 ‘삼낭자의 도시’라 부르기도 했다.
청(淸) 나라 때인 1735년부터 1739년까지 사이에 귀화성의 동북쪽 5km 거리에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성을 새로 건설하고 ‘수원성(綏遠城)’이라 이름했다.
이 수원성이 바로 훅호트 신도시의 시작이다. 당시 훅호트는 상업이 번창해 신강(新疆)과 감숙(甘肅), 녕하(寧夏) 등 서쪽의 상단이 늘 이 곳에 머물고 산서(山西) 대동(大同) 등 남쪽의 상인들도 이 곳을 찾아 ‘여몽상도(旅蒙商道)’라 불린 혹호트는 당시 남북상품교류의 중요한 집산지였다.
(사진설명: 대소사의 은 불상)
예로부터 중원 각 왕조의 중시를 받고 사막으로 통하는 교통 요충지였던 훅호트에는 전국(戰國) 시기의 운중성(雲中城)과 서한(西漢) 시기의 성락성(成樂城), 위(魏) 나라 때의 성락성(盛樂城), 당(唐) 나라 때의 대리성(大利城)을 망라해 많은 고성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하에서는 또 풍부한 문화재가 발굴되고 지상의 유적은 지금까지 사용이 가능하기도 하여 훅호트는 실물로 중국 북쪽 변방(邊塞) 도시의 유구하면서도 눈부신 역사를 펼쳐 보인다.
훅호트에는 ‘도시의 반을 사찰이 차지’할 정도로 절이 많아 오늘도 도심에 산재한 절은 훅호트 고성의 한 가지 특징으로 된다. 과거 훅호트에는 절이 부지기수여서 ‘큰 절 일곱에 작은 절 여덟, 이름 없는 절은 칠십하고도 둘’이 있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대소사)
훅호트의 많은 사찰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대소(大召)이다. 이는 또한 훅호트 최초의 절이기도 하며 대소사는 일찍 400여 년 전에 벌써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대소(大召)란 몽골어로 큰 절이라는 의미이며 원래의 명칭은 홍자사(弘慈寺)였고 후에 무량사(無量寺)로 개명해서 오늘날까지 사용한다. 훅호트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교(黃敎) 사원이자 내몽골 지역 최초의 라마교 사원인 대소에서는 은(銀) 불상과 용 조각, 벽화가 ‘대소삼절(大召三絶)’로 꼽힌다.
훅호트는 역사가 남긴 많은 명승고적을 보유하고 있는 동시에 저녁놀 아래 만경창파 설레는 ‘새외(塞外)의 서호(西湖)’라 불리는 하수하이(哈素海), ‘추운 고원’이라 불리는 후이텅시러(輝騰錫勒) 초원, ‘여름의 캠프’라 불리는 거건라(格根拉) 초원도 거느린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훅호트의 초원)
푸른 하늘 아래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맑은 호수와 강물이 점점이 수를 놓는 훅호트에서는 말을 타고 일망무제한 초원을 마음껏 달리며 사색의 나래를 펼 수도 있다.
내몽골 자치구 소재지인 훅호트에서는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는 몽골족들이 관광객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한다. 해마다 여름과 가을이면 초원에서는 나담 페어와 초원관광축제, 우란무치(烏蘭牧騎) 예술제 등 몽골족 특징이 다분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행사 때면 은은한 마두금(馬頭琴) 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지고 우렁찬 몽골족 노래와 열정적인 무용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끝없이 넓은 초원이 있기에 이곳 사람들은 이렇게 호방하면서도 다재다능하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