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9 09:04:04 출처:cri
편집:李仙玉

[두보 편-1] 과거시험에 낙방되다

(사진설명: 두보의 석상)

憂國憂民의 詩聖 두보

그의 시는 거울처럼 당(唐) 왕조 흥망의 역사적 진실을 조명한다. 그로 인해 그는 ‘시성(詩聖)’이라 불리고 그의 시는 ‘시사(詩史)’라는 미명을 가진다.

그가 바로 고대 중국의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 두보(杜甫)이다. 두보가 남긴 1,500여 수의 시는 자자손손 전해지는 중국문명의 보물이며 그 중 많은 시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나라는 망해도 산천은 여전해(國破山河在) 봄 맞은 장안성에 초목이 무성하네(城春草木深)’. 나라가 망하고 초목만 무성한 강산을 보며 나라와 백성을 걱정한 두보는 아픔과 분노로 이 천고의 절창을 썼다.

우국우민(憂國憂民)의 시성 두보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제1회 과거시험에 낙방되다 

태산의 줄기 어찌 저러한가(岱宗夫何如)

제와 노에 걸쳐 푸름이 끝이 없구나(齊魯靑末了)

천지의 조화 신묘한 것 모두 모아(造化鍾神秀)

산의 남북이 아침과 저녁을 가르는구나(陰陽割昏曉)

층층 구름은 가슴을 뛰게 하며(蕩胸生層雲)

돌아오는 새들 따라 두 눈 부릅뜨네(決眦入歸鳥)

언젠가 반드시 정상에 올라(會當凌絶頂)

주위의 산들 작음을 굽어보리라(一覽衆山小)

두보가 태산(泰山) 중턱에 서서 발 밑으로 펼쳐진 제로(齊魯) 벌판을 바라보니 울창한 푸름이 가득했다. 산 바람이 불어와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니 산 마루에는 구름이 걸려 있고 지친 새들은 둥지로 돌아오는데 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대지는 창망했다. 갑자기 격정이 솟구친 그의 눈앞에는 자신이 태산 정상에 올라서니 대지가 작아지고 뭇 산도 모두 발아래 엎드려 있는 그림이 펼쳐졌다.

설마 두보가 과거시험에 급제해서 이토록 득의양양하고 이토록 격정이 넘쳐 천하를 흘겨보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두보는 두 번이나 과거시험에 낙방되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큰 뜻은 낙방이라는 소소한 일로 스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천하를 유람하며 장엄하고 아름다운 산천을 돌아본 두보는 더욱 넓은 마음을 가졌으며 그의 투지는 더욱 앙양되었다. 그리하여 아스라니 솟은 태산을 바라보며 ‘언젠가 반드시 정상에 올라(會當凌絶頂) 주위의 산들 작음을 굽어보리라(一覽衆山小)’는 용기와 큰 뜻을 외쳤던 것이다. 

태산을 떠난 두보는 수양산(首陽山)에 이르러 그 곳에 눌러 살기로 작심했다. 그것은 그 곳이 역사적으로 많은 어진 군자들이 마지막을 맡긴 땅이기 때문이었다.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굶어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문무를 다 갖춘 인재 두예(杜預)가 모두 수양산에서 삶을 마감했다. 두보는 비록 그들이 다 죽어 저 세상으로 갔지만 수양산의 영혼으로 남은 그들과 이웃하며 사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보는 수양산에서 아름답고 현숙한 양씨(楊氏)와 혼인을 맺었다. 그리고 이보다도 더욱 두보를 기쁘게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수양산에서 멀지 않은 낙양(洛陽)에서 이백(李白)을 만나 친분을 쌓게 된 일이다.

천보(天寶) 3년(744년), 이백은 그 때 벌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나 권세가들의 눈에 나서 황제로부터 황금을 하사 받고 조정을 떠난 뒤였다. 낙양에 이른 이백은 시인들의 모임을 가졌고 그 모임에 두보도 참석했다.

“장안(長安)에서 이별한지 벌써 2년이 되는데 태백(太白, 이백의 자) 형께서 이렇게 다시 강호(江湖)로 복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관중(管仲)과 손숙오(孫叔敖)의 능력을 가지고 유신(庾申)과 포조(鮑照)의 재능을 갖추셨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두보의 말에 이백이 답했다.

“예로부터 성현은 모두 고독하고, 음주를 즐기는 사람만이 역사에 길이 남는 법이니, 우리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세!”

“장안에서 태백형을 위해 시 한 수 지었는데 들어보셨는지요?”

두보는 말을 끝내자 <봄날에 이백을 생각하며(春日憶李白)>를 읊었다.

이백의 시는 당할 이 없고(白也詩無敵)

자유분방한 생각 워낙 뛰어나(飄然思不群)

깨끗하고 산뜻함은 육조시대 유신이요(淸新庾開府)

뛰어나고 빼어남은 송나라 때 포조라네(俊逸鮑參軍)

내가 있는 위북에는 봄 나무들 푸른데(渭北春天樹)

그대 있는 강동에는 구름 속에 해 지겠네(江東日暮雲)

언제 둘이 마주 앉아 술잔 나누며(何時一樽酒)

다시 함께 시를 논할 수 있으리오(重與細論文).

두보의 시를 들은 이백이 흐뭇한 마음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과대 평가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좋은 시구려. 덕분에 내가 이 시와 함께 영원하겠소.”

후에 이백이 농담조로 한 이 말이 참말이 되었다. 그로부터 천 년이 넘어 흐르는 동안 후세 사람들은 이백에 대한 두보의 평가가 가장 정확하고 가장 절묘하다고 보았다. ‘깨끗하고 산뜻함(淸新)’과 ‘뛰어나고 빼어남(俊逸)’은 확실이 이백 시의 풍격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두보가 말을 이었다.

“태백 형께서는 이제 벼슬도 그만 두시고 자유로우신데 우리 함께 제로의 대지를 다니며 아름다운 산수를 느껴봄이 어떨까요? 다니는 과정에 함께 시와 글도 논하고 말입니다.”

“나도 마침 그럴 생각이 있었소. 그럼 시간을 정해서 함께 출발합시다!”

두보는 집에 돌아가 아내와 가족을 안치하고 이백과 함께 길을 떠났다. 그들은 변주(汴州)에 이르러 우연하게 고적(高適)을 만났다. 당시 고적도 벼슬길에 올라서지 않은 때라 세 시인은 함께 술을 나누고 사냥을 즐기고 시를 쓰고 글을 논했다.

천보 6년(747년), 두보는 ‘황제를 요순보다 훌륭하게 만들고(致君堯舜上) 풍속을 다시 순박하게 하려는(再使風俗淳)’정치적 포부를 품고 또 한 번 과거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현명한 인재와 능력자를 질투하고 웃음 속에 칼을 품은 간악한 재상 이림보(李林甫)가 ‘천자가 덕이 있고 슬기로워(天子聖明) 초야에 어진 자 한 명도 없다(野無遺賢)’고 황제에게 아부하기 위해 한 명도 급제시키지 말라고 상서성(尙書省)에 명령을 내렸다.

당현종(唐玄宗)이 만년에 이림보, 양국충(楊國忠)과 같은 간신을 등용했으니 안사(安史)의 난이 유발되고 두보가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리라.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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