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2 08:59:22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75] 연안: 중국 혁명의 성지

(사진설명: 아름다운 연안)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일흔 다섯 번째는 중국 혁명의 성지 연안(延安)이다. 연수(延水) 강에서 기원한 연안 지명은 이어지는 평안함을 의미한다.

황토고원(黃土高原)에 위치한 연안은 ‘혁명역사문화’와 ‘화하제조(祭俎)문화’, ‘고대역사문화’, ‘황토풍정문화’ 등 다양한 문화 우위를 보유한 중국 혁명의 요람과 성지이다.

연안은 섬서(陝西) 성 북부, 연수강과 남천(南川) 강이 합류하는 지점, 황하(黃河) 중류, 황토고원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뒤에 봉황산(鳳凰山)을 업고 동쪽으로 청량산(淸凉山)을 마주하며 북쪽에 보탑산(寶塔山)이 솟은 연안은 지세가 험준한 산의 도시이다.

(사진설명: 보탑산의 보탑)

섬서 북부 고원의 남북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 잡은 연안은 기원전 200년대에 벌써 ‘험준한 지세로 변경의 안녕을 지키는’ 군사요새가 되었고 600년대부터 1200년대까지 사이에 외족의 침입을 막고 관중(關中) 지역을 지키는 군사의 도시로 부상했다.

송(宋) 나라 정치가 범중엄(范仲淹)이 서하(西夏)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안을 수비한 적이 있다. 그는 군대와 백성을 동원해 연안성을 증축하고 성벽을 든든하게 했으며 보탑산 요새에서 군대를 훈련시켰다.

보탑산의 정상에 세운 동악묘(東岳廟)의 뒤에 한 때 적성루(適星樓)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범중엄이 적군의 상황을 감시하던 곳이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에 연안성은 수차에 걸친 보수를 통해 산발이 둘러서고 두 갈래 강물이 만나며 산세를 따라 강가에 도시가 조성된 구도를 형성했다.

(사진설명: 연안혁명기념관 야경)

연안은 ‘중국 혁명의 요람’이다. 1935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모택동(毛澤東) 주석이 군대를 이끌고 연안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중국공산당은 연안에서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지휘해 승리를 거두고 새 중국의 건국을 준비했다.

혁명의 성지인 연안에는 150여 곳의 혁명사적지와 명인들의 옛 집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 봉황산 사적지와 양가령(楊家嶺) 사적지, 조원(枣園) 사적지, 왕가평(王家坪) 사적지, 섬감녕(陝甘寧) 변구(邊區) 정부 사적지는 중국 중점문화재 보호기관에 선정되었다.

봉황산 기슭에 위치한 봉황산 혁명 사적지는 중곡공산당 중앙위원회가 2만 5천리 장정을 끝내고 연안에 도착한 후의 첫 사무장소이다. 1937년 1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과 홍군(紅軍) 참모부가 이 곳에 있었다.

(사진설명: 봉황산 혁명 사적지의 토굴집)

모택동 주석은 이 곳에서 <실천론(實踐論)>과 <모순론(矛盾論)>을 비롯한 중요한 문장을 썼다. 현재 사적지는 앞뒤에 나란히 위치한 두 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데 후원(後院)에 있는 세 개의 토굴집은 당시 모택동 주석의 사무실과 거실, 침실로 사용되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사이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연안에서 서북쪽으로 3km 거리에 위치한 양가령 혁명 사적지에서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휘하고 세 차례에 걸친 국민당의 침공을 격퇴시켰으며 근거지의 자급자족을 위한 대생산(大生産) 운동을 벌였다.

1945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제6기 제7차 전체회의가 이 곳에서 열려 <역사문제에 관한 약간의 결의>를 채택했고 1945년 4월 23일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도 이 곳에서 열렸다.

(사진설명: 조원 혁명사적지의 동상)

모택동 주석은 이 곳에서 <중국혁명과 중국공산당> 등 중요한 문장을 썼다. 현재 양가령 사적지는 중앙 강당과 중앙 판공청 빌딩 등 건물, 그리고 백 여 개에 달하는 토굴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772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연안에서 서북쪽으로 10km 거리에 위치한, 꽃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수려한 조원(枣園) 혁명 사적지는 원래 한 군벌의 장원이었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사이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이 이 조원에 자리를 잡았다.

중국공산당은 이 곳에서 중국의 항일전쟁을 승리에로 이끌고 대생산 운동을 지휘했으며 중국공산당 제7차 전당대회를 준비했다. 조원 혁명 사적지에 들어서면 벽돌로 외벽을 쌓은 네모난 중앙강당이 나타나고 그 곁에는 작전 연구실과 휴게실이 나란히 한다. 조원의 뒤에는 모택동 주석과 주은래(周恩來), 주덕(朱德) 등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부 구성원들의 거처가 남아있다.

(사진설명: 가까이에서 본 보탑)

중국공산당의 연안에서의 여정을 기념하기 위해 1950년 연안 왕가평에 중국 최초의 혁명기념관인 연안혁명기념관을 세웠다. 중국의 기념관 중 특수한 위상을 차지지는 연안혁명기념관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토굴집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침략자를 몰아낸 눈부신 업적을 생동하고 형상적으로 보여준다.

보탑산(寶塔山)과 청량산(淸凉山), 봉황산(鳳凰山), 만화산(萬花山)은 연안의 4대 명산이다. 보탑산 정상에 솟은 연안보탑은 1300여년 전의 당 나라 때 축조하고 송 나라 때 개축했으며 명 나라 때 보수를 하기도 했다.

44m 높이에 8면, 9층으로 된 누각 모양의 연안보탑은 수려하게 우뚝 솟아 연안을 지켜본다. 탑 내부의 계단으로 탑 정상 등반이 가능하며 탑의 주변에 마애석각과 비석 등 문화재가 보존된 연압보탑은 현재 혁명성지 연안의 심벌이 되었다.

(사진설명: 광막한 황토고원)

많은 혁명 사적지를 보유한 연안은 또 ‘삼황(三黃)’이라는 고유의 특색도 자랑한다. 삼황 중 하나는 끝없이 드넓은 황토고원이고 두 번째는 중국의 비조 황제(黃帝)의 무덤이며 세 번째는 웅장한 황하호구(壺口) 폭포이다.

중국 북부 지역에 펼쳐진 황토고원은 해발고도가 800m에서 3,000m 사이이며 고원에 50~80m 두께의 황토가 깔려 황토고원 고유의 광막한 경관을 자랑한다. 높은 곳에서 황토고원을 바라보면 마치 거대한 황룡이 이 땅에 자리를 잡은 듯 심히 장관이다.

연안시 황릉(皇陵)현 교산(橋山)에 위치한 황제릉은 역대 제왕과 명인들이 황제에게 제사를 지내던 장소이다. 역사적으로 기원전 422년 진령공(秦靈公)이 제일 처음으로 황제 제사를 지냈다.

(사진설명: 웅장한 황제릉)

기원전 110년 한무제(漢武帝)가 18만 대군을 거느리고 황제릉에서 제사를 지낸 뒤로 교산은 줄곧 역대 왕조가 국가제사를 지내는 장소였다. 황제릉에는 한나라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역대의 여러 가지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황제릉 앞에 있는 5천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황제수직백(黃帝手稙柏)’은 황제가 손수 심은 측백이라고 전해진다. 이 나무는 현재 세계적으로 수령이 가장 긴 측백이다.

중국에서 제2의 폭포인 호구폭포는 세계 최대의 황색폭포이기도 하다. 넓은 강바닥을 따라 유유하게 연안의 의천(宜川)에 이른 황하는 양안에 솟은 바위산으로 인해 갑자기 좁아진 강바닥을 따라 세차게 흐르며 20m 높이의 벼랑을 뛰어내린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호구폭포)

넓은 강바닥을 천천히 흐르다가 갑자기 좁아진 골짜기로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강물이 마치 주전자 입구에서 쏟아지는 듯 ‘천 리 황하 물이 주전자에서 흘러 나오는’ 경관을 형성하고 이름도 호구폭포이다.

일년 사계절 다양한 경관을 자랑하는 황토고원과 중국인들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황제릉, 황하강의 제일 폭포인 호구폭포 등 지역특색이 다분한 이 삼황(三黃)은 연안에서 가장 특색 있고 가장 매력적인 관광명소이다.

섬서 북부에서는 예로부터 양걸춤이 성행했다. 이 곳의 양걸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고 표현형식은 더욱 다양하다. 섬서 북부의 양걸춤은 중국홍군이 연안에 도착해서 섬감녕변구 정부를 설립한 후 끊임 없는 개진을 통해 분장과 복식, 노랫말, 동작 등 여러 부분에서 혁신과 발전을 이루었고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빠른 속도로 중국 전역에 전파되었다.

(끝)

공유하기:
뉴스 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