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남창)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일흔 일곱 번째는 아름다운 영웅의 도시 남창(南昌)이다. 주변에 산발이 둘러서고 강물이 도시와 함께 하는 강남의 옛 도시 남창은 서쪽으로 서산(西山)에 기대고 북쪽으로 매령(梅嶺)을 바라보며 감강(贛江)이 도심을 가로 질러 흐른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옛 도시에서 1927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의 무력투쟁 시작과 중국 혁명군대 창건의 서막을 연 8.1(八一) 봉기가 일어나 남창은‘군기가 휘날린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강서(江西)성의 북부, 감강과 무하(撫河)의 하류, 파양호(鄱陽湖)의 서쪽 호숫가에 위치한 남창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시에 영광스러운 혁명 전통도 보유한 영웅의 도시이다.
(사진설명: 남창의 예스러운 고건물)
기원전 202년,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영음후(潁陰侯) 관영(灌嬰)에게 남창일대를 수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이듬해 관영은 오늘날 남창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4km 거리의 황성사(皇城寺) 근처에 둘레 5km 이상에 성문 6개를 낸 토성(土城)을 축조했는데 당시 관성(灌城)이라 불린 이 성이 바로 남창성의 시작이다.
그로부터 장강유역 경제문화의 발전에 따라 남창성은 날로 확장되었다. 동진(東晉) 때인 371년~372년 현지의 태수 범녕(范寧)이 대 규모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북쪽과 서남쪽에 두 개의 성문을 새로 냈다.
당(唐) 나라 초반에 관성의 서북쪽에 성을 새로 축조했는데 청색의 벽돌로 성을 쌓았다. 그 뒤 685년과 809년 두 번에 걸쳐 남창성을 증축해 성곽이 한 나라 때의 관성(灌城)에 비해 한 배가 확대되고 둘레도 10km로 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남창의 일각)
오늘날의 남창성은 바로 당 나라 때 축조한 이 성을 기반으로 발전·확대되었다. 도시가 세워져서부터 줄곧 부(府)와 주(州), 성(省), 도(道)의 소재지로 있었던 남창은 인문경관이 아주 풍부하고 곳곳에 고건물이 즐비하다.
당 나라와 송(宋) 나라 때 남창은 강남의 유명한 도시여서 당시 남창성에는 인구가 많고 누각과 정자가 즐비하며 아담한 정원과 아늑한 절이 곳곳에 있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등왕각(滕王閣)이다.
강남 3대 누각 중 으뜸인 등왕각은 당 나라 때인 653년 당태종(唐太宗)의 동생인 이원영(李元嬰)이 홍주(洪州) 자사(刺使)로 있을 때 남창성 서쪽의 감강 기슭에 지은 별채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등왕각)
이원영이 등왕(滕王)으로 책봉 받은 후 이 누각은 등왕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서·등왕전(唐書·滕王傳)>에는 강가에 우뚝 솟은 등왕각은 웅장함을 자랑하고 누각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면 아름다운 경치가 한 눈에 안겨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등왕각은 역대로 사대부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잔치를 베푸는 장소가 되었다. 한 번은 당 나라 시인 왕발(王勃)이 귀성 길에 이 곳을 경유하다가 현지의 유지가 등왕각에서 베푼 잔치에 초대되었다.
높은 누각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맛 보고 향기로운 미주를 마신 왕발은 주흥이 일어 즉석에서 천고의 절창이 된 시 <등왕각서(滕王閣書)>를 썼다. 그로부터 시는 누각으로 인해 더욱 널리 전파되고 누각은 시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사진설명: 등왕각과 남창)
당 나라 시인들인 백거이(白居易)와 두목(杜牧), 북송(北宋)의 문학자들인 구양수(歐陽脩)와 증공(曾巩), 왕안석(王安石),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남송(南宋)의 시인 신기질(辛棄疾) 등도 모두 등왕각에 올라 작품을 남겼다.
1300여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등왕각은 28차례나 무너졌다가 다시 지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5년에 개축한 것이다. 송 나라 때의 건축양식을 유지하는 등왕각은 강가에 우뚝 솟아 웅장함을 자랑한다.
54.4m 높이의 누각은 겉으로 보기에는 3층이지만 사실은 6층으로 되어 있고 지붕에 푸른 기와를 얹었으며 조각이 즐비한 붉은 기둥이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등왕각에 올라서면 감강과 남창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보여 마음이 탁 트인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청운보)
남창시 남쪽에 위치한 청운보(靑雲譜)는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경관을 보유한 도관(道觀)이다. 기원전 6세기 주령왕(周靈王)의 아들 진(晉)이 이 곳에서 단약을 구웠다고 전해진다.
동진(東晉) 때 도교 정파(淨派)가 창설되면서 321년부터 이 곳은 도교 암자가 되었고 청(淸) 나라 때인 166년 명태조(明太祖)의 제10대 손인 주탑(朱耷)이 이 곳에 은둔하면서 청운보라 부르기 시작했다.
청운보의 주요 전각들인 관제전(關帝殿)과 여조전(呂祖殿), 허조전(許祖殿)은 중심선에 한 일(一)자로 줄지어 있고 건물들은 구불구불하고 아늑한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설명: 팔대산인의 그림작품)
독특한 서법과 정교한 시문으로 유능한 주탑은 특히 서예분야에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탑이 심플한 필치로 산수의 경지를 그리는 대가라고 해서 사람들은 그를 팔대산인(八大山人)이라고 부른다.
청운보에 조성된 팔대산인기념관에는 주탑의 명시와 명화 외에 그의 동생인 주석혜(朱石彗), 대나무 그림으로 유명한 청나라 화가 정판교(鄭板橋), 근대 중국의 유명한 화가 제백석(齊白石) 등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다.
남창이 ‘영웅의 도시’라 불리게 된 것은 1927년 8월 1일부터이다. 당시 주은래(周恩來)와 주덕(朱德), 하룡(賀龍), 엽정(葉挺), 유백승(劉伯承) 등이 남창에서 시대적 의미를 가지는 ‘8.1 남창봉기’를 지휘해 중국혁명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사진설명: 장엄한 8.1 기념탑)
그때로부터 1927년 8월 1일은 중국의 혁명역사에 기록되고 중국군대의 건군 기념일이 되었으며 남창은 중국공산당의‘군기가 처음으로 휘날린’ 영웅의 도시라 불리게 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남창에는 또 1920년대의 많은 혁명 사적지들이 보존되어 사람들에게 중국혁명의 어려우면서도 눈부신 여정을 보여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8.1 남창봉기 총 지휘부 사적지와 8.1 남창 봉기 기념관, 하룡 지휘부 사적지, 엽정 지휘부 사적지, 신사군(新四軍) 군부 사적지 등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