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무한)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일흔 여덟 번째는 근대 중국의 경제중심도시 무한(武漢)이다. 무한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수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유명한 문화의 도시이자 짙은 형초(荊楚) 문화의 특색을 띠는 유명한 역사의 도시이다.
이 곳에서 만나는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강, 그리고 곳곳에 보석처럼 산재한 크고 작은 호수들이 대범한 기질의 도시 무한에 부드러운 느낌을 안겨주어 무한은 경치도 아름답다.
호북(湖北)성 성도인 무한은 장강과 한수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화중(華中) 지역의 물자 집산지로 예로부터 ‘주변의 9개 성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무한3진)
무한은 ‘무한3진(武漢三鎭)’의 통칭이다. ‘3진’은 장강과 한수강에 의해 분류된 무창(武昌)과 한구(漢口), 한양(漢陽) 세 지역을 말한다. 그 중 한구는 가장 번화한 상권이자 화중지역 상품의 집산지이고 무창은 대학교가 집중된 문화구역이자 무한의 현대도시문화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무한이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개발단지가 들어선 한양은 무한의 미래를 대변한다. 따라서 무한의 대부분 명소는 모두 무창과 한양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두 지역은 ‘강의 도시’ 무한의 아름다운 경치와 다양한 풍속, 무한한 매력을 보여주는 무한의 대표이다.
무한성은 최초로 1800여년 전의 동한(東漢) 때에 축성했다. 당시 오늘의 한양에 성을 쌓았는데 여남(汝南), 돈양(沌陽)이라 불리다가 수(隨)나라 초반에 한양(漢陽)으로 개명해 오늘에 이른다.
(사진설명: 무한의 거리 중산대도)
손권(孫權)이 오늘날의 무창에 하구성(夏口城)을 축조했는데 후에 조공성(曺公城), 악주성(鄂州城)으로 불리다가 마지막에 무창성이라 개명해 오늘날에 이른다.
무한의 고성들은 모두 방어에 편리한 목적으로 강을 마주한 산자락에 축성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고성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한구는 원래 성을 쌓지 않다가 1600년대에 이르러서 홍수 방지 목적으로 강가에 언제를 쌓았다. 1800년대에 농민 봉기군인 태평군(太平軍)이 언제를 기반으로 한구보(漢口堡)를 축조했으며 1900년대에 이르러 한구보를 철거하고 거리를 조성했는데 그 거리가 바로 오늘날의 중산대도(中山大道)이다.
(사진설명: 무한의 물)
역사적으로 무한은 상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의 요충지에 위치한 무한은 예로부터 중원(中原)과 남방(南方), 장강 중류와 하류지역간 경제교류와 문화융합의 중심이었다.
1600여년 전에 무한은 벌써 유명한 항만이었고 1000여년 전에는 상업이 번창하고 수로 교통이 발달한 도시로 부상했다. 500여년 전 한구가 흥기하면서 무한은‘십 리에 돛이 숲을 이루고 만 가구의 등불이 밤을 밝히는’ 당시 중국 4대 도시 중 하나였으며 화중지역 물자 집산중심이 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후 한구는 대외통상구가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열강들이 이 곳에 밀려들어 상품을 팔고 자원을 약탈하면서 무한은 상품과 원료의 집산센터가 되었다.
(사진설명: 무한의 양옥들)
당시 수출입 금액이 상해(上海)에 버금가는 규모를 유지한 무한은 ‘동양의 시카고’, ‘중국의 피츠버그’라 불렸다. 1860년대 열강들이 한구에 각자 조차지를 만들면서 무한의 도시 모습도 크게 변했다.
그로 인해 장강 기슭의 강한로(江漢路)에서 황포로(黃浦路), 중산대도까지 부지 1.8㎢의 양옥지역이 조성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길이 1,600m, 너비 20m의 이 거리는 백 년의 역사를 보유한 무한의 유명한 상업거리이다.
이 거리는 기존의 구도를 보존한 동시에 근대의 서양식 건축물 500여 채를 거느린다. 그 중 50여 채가 ‘무한시 역사 우수 건축 보존’ 리스트에 선정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답고 웅장한 황학루)
무한은 경제가 번영할 뿐만 아니라 인문도 아주 풍부하다. 223년에 처음으로 축조한 황학루(黃鶴樓)는 무창의 사산(蛇山)에 높이 솟아 ‘천하의 절경’을 이루며 ‘강남 3대 유명 누각’ 중 하나에 든다.
높이 51m의 황학루는 겉으로 보기에는 5층이지만 내부는 9층으로 되어 있고 등정이 가능해 누각의 정상에 올라서면 무한 3진의 아름다운 경관이 한 눈에 안겨온다.
황학루는 처음에 군사적 방어 목적으로 축조했으나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점차 유명한 명승이 되었으며 최호(崔顥)가 시 <황학루에 올라>를 쓰면서 더욱 명성이 자자해졌다.
(사진설명: 아늑한 고금대)
한양의 구산(龜山) 산자락에 위치한 고금대(古琴臺)는 북송(北宋) 때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와 그의 절친인 종자기(鍾子期)를 기념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백아대(伯牙臺)라고도 부른다.
황학루, 청천각(晴川閣)과 함께 무한의 3대 명승으로 불리는 고금대는 중국의 정원 조성에서 사용하는 ‘차경(借景)’ 기법을 활용해 구산의 산수를 교묘하게 접목시켜 광활하면서도 심원한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메인 건물 외에 정원과 숲, 화원, 다실 등 다양한 경관을 아우르는 고금대는 배치가 교묘하다. 전각 앞에 돌로 쌓은 네모난 금대는 백아가 거문고를 타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청천각)
청천루(晴川樓)라고도 하는 청천각은 구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해 북쪽으로 한수(漢水) 강을 마주하고 동쪽으로 장강(長江)을 사이 두고 황학루를 바라본다.
명나라 때 한양지부(漢陽知府)의 행궁으로 신축되었다가 1984년에 개축한 청천각은 당나라 최호의 시 <황학루에 올라> 중에서 ‘맑은 냇물 저쪽엔 한양의 나무들이 역력하고(晴川歷歷漢陽樹) 봄 풀은 앵무주에 무성히 자라도다(春草萋萋鸚鵡洲)’ 라는 시구에서 이름을 취했다.
17.5m 높이의 청천각은 목조건물을 모방한 철물구조에 전통적인 기법으로 채색의 그림을 그리고 정교한 조각을 새겼다. 2층으로 된 청천각은 ‘산세에 의해 단을 조성하고 그 위에 누각을 짓는’ 초(楚)나라 사람들의 웅장한 기상과 문화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신해혁명기념관의 일각)
무한은 유구한 역사를 보유한 도시이다. 무한은 1800여년 전의 동한(東漢) 후반에 구산(龜山)과 사산(蛇山)에 군사적 목적으로 성을 쌓은 것을 시작으로 700여년 전의 명(明) 나라 때에 이르러 무한 3진이 기본 구도를 형성했으며 뛰어난 지리적 여건과 독특한 경제적 위상으로 내외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황학루와 청천각, 고금대, 귀원사(歸元寺) 등 많은 명소는 무한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하고 오늘날도 그 자리를 지키면서 사람들에게 과거 무한의 눈부신 문화를 말한다.
무한은 혁명의 도시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서서 무창봉기가 2천 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봉건제도에 종지부를 찍었고 북벌(北伐) 전쟁 승리 후 국민정부가 무한으로 천도하면서 무한은 중국의 혁명역사에서 눈부신 폐지를 기록했다.
(사진설명: 웅장한 무한 장강대교)
오늘날도 무한에는 신해(辛亥)혁명기념관과 무창봉기군 정부 사적지, 경한(京漢) 철도 총공회 사적지, 무한 국민정부 건물 등 많은 혁명사적지들이 보존되어 무한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증명한다.
아름다운 무한은 장강 중류에 위치한 눈부신 보석이다. 산도 많고 물도 많은 무한의 주변에는 크고 작은 호수 100여개가 산재해 동호(東湖)와 남호(南湖), 사호(沙好)가 무한 3진을 산 좋고 물 맑은 도시로 만든다.
장강을 가로질러 무창의 사산과 한양의 구산을 연결하는 무한장강대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처음으로 건설한 장강교량이자 무한의 중요한 대표 축조물로 ‘만 리 장강의 제1 교량’이라는 미명을 가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