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의빈)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두 번째는 장강(長江) 기슭의 첫 도시 의빈(宜賓)이다. 민강(岷江)과 대도하(大渡河), 금사강(金沙江)이 의빈의 합강문(合江門) 근처에서 합류해 장강이라 불리며 바다를 향해 동쪽으로 만 리 여행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은 장강으로 인해 의빈을 알고 짙은 문화적 분위기와 특히 향긋한 술 오량액(五粮液)으로 인해 아름다운 도시 의빈을 찾는다.
사천(四川) 분지의 남쪽, 운귀(雲貴) 고원의 북쪽에 위치한 의빈은 금사강과 민강이 합류한 장강의 기점이기도 해서 예로부터 ‘만 리 장강의 첫 도시’라 불린다.
(사진설명: 전통과 모던이 함께 하는 의빈)
의빈은 역사가 유구하다. 기원전의 춘추전국시대에 이 곳은 고대 분후(焚侯)국에 속했으며 한무제(漢武帝) 때에는 이 곳에 분도(焚道)현을 설치하고 오늘날 의빈의 서남쪽 안변장(安邊場)에 소재지를 두었다.
당(唐)나라 때인 794년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위고(韋皋)가 삼강구에 성을 쌓았는데 842년 금사강의 수해로 성이 물에 잠겨 오늘날의 의빈성에서 북쪽으로 3km 거리의 강기슭에 있는 구주패(舊州坝)에 성을 신축했다.
그로부터 구주성은 송(宋) 나라 때까지 400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오늘날 성은 사라지고 성터만 남아 있는데 남쪽에 30m 길이에 3m높이의 성벽과 북쪽에 247.5m 길이에 2m 높이, 4m 두께의 성벽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의빈의 예스러운 고건물)
남송(南宋) 후반에 몽골군이 촉에 진입하면서 방어력이 없는 구주성은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267년 지세가 험준한 산 등성이에 성을 옮겨 쌓고 아찔한 낭떠러지를 이용해 성벽을 축조했다.
동남쪽으로 장강과 이웃하고 남쪽으로 민강과 연결된 성은 몽골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맞섰다. 하지만 세월 속에서 이 성도 사라지고 오늘날은 총 길이 365.5m, 높이 1.8m~5m에 달하는 성벽만 남아 있다.
의빈도심의 서주성지(敍州城址)는 명(明) 나라 때 축조한 당시 서주부성(敍州府城)의 터이다. 동쪽으로 삼강구를 마주하고 북쪽으로 민강, 남쪽으로 금사강과 이웃한 서주성은 정방형으로 조성되어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의빈의 삼강구)
돌로 쌓은 서주성의 성벽은 높고 두터우며 견고하기 그지 없고 현재 성문 중 하나인 수동문(水東門)과 높이 5.6~6.3m에 달하는 615m 길이의 성벽이 보존되어 있다.
기나긴 세월은 의빈에 매력적이고 영향력이 큰 많은 문화재와 고성유적을 남긴 동시에 의빈 고유의 문화도 형성했다. 그 중 가장 특색 있는 의빈문화는 북(僰) 문화와 죽(竹) 문화이다.
의빈의 북문화는 의빈의 역사와 문화에서 기이함을 자랑한다. 북인(僰人)은 근면하고 용감한 민족으로 당시 산세를 따라 집을 짓거나 물가의 언덕에 동굴을 파고 살았다.
(사진설명: 북인들의 무덤인 북인현관)
현재 벼랑에 조성한 무덤 현관(懸棺)과 암석화가 북인들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준다. 현관과 암석화는 사람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못하는 벼랑 위에 조성된 관계로 지금까지 보전되어 북인이 남긴 유일한 문화 유적이 되었다.
‘사천 남부 4절(絶)’ 중 하나인 북인현관(僰人懸棺)은 사망자의 관을 벼랑 위에 보존한, 600여년 전에 조성된 고대의 무덤이다. 현재 의빈의 마당패(麻塘坝)와 소마만(蘇麻灣)에 도합 265구의 관이 보존되어 있다.
관은 보통 20~60m 높이의 벼랑에 걸려 있으며 최고로 100m 높이까지 달한다. 옛 사람들이 왜서 관을 이렇게 높은 벼랑에 가로 박은 나무 위에 두었는지? 이런 장례문화는 어떤 함의를 가지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촉남죽해)
벼랑에는 또 벌 둥지처럼 밀집된 기둥 구멍과 붉은색의 암석화 200여 폭이 남아 있다. 암석화에는 사격과 무용, 서커스 등 다양한 동작을 하는 사람이 그려져 있고 또 온갖 동물과 무기, 기하학적 도형 등이 그려져 있다.
의빈의 또 다른 특색문화는 죽(竹) 문화이다. 의빈은 중국에서 대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는 곳이며 그 중 의빈의 동남쪽에 위치한 대숲 촉남죽해(蜀南竹海)가 가장 수려하고 아름답다.
면적이 120㎢에 달하고 해발고도 600~1,000m의 촉남죽해는 온 산발이 대나무로 덮여 심히 장관이다. 촉남죽해에는 400여 종의 대나무가 자라고 크고 작은 명소는 134곳이나 된다.
(사진설명: 촉남죽해의 호수)
그 중 양쪽에 대숲이 펼쳐진 오솔길 비취회랑과 대숲 속의 아름다운 호수들인 선녀호(仙女湖), 해중해(海中海), 그리고 촉남죽해박물관이 촉남죽해에서 가장 대표적인 명소이다.
의빈은 역사적으로 명인들이 너도 나도 찾는 문화의 도시이기도 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와 송나라 시인 소동파(蘇東坡), 육유(陸游), 황정견(黃庭堅), 명나라 학자 고여학(顧汝學), 청나라 시인 왕사정(王士禎) 등이 모두 의빈에 살았거나 의빈을 여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민강 북쪽 기슭에 조성된 강북(江北) 공원의 유배지(流杯池)가 바로 황정견이 의빈에서 머물던 곳이다. 오솔길 옆의 바위에는 황정견이 쓴 ‘남극노인무량수불(南極老人無量壽佛)’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사진설명: 나타행궁의 나타상)
의빈은 또한 전설 속 인물 나타(哪咤)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타가 백성들을 위해 악귀와 싸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전설이다. 의빈에서는 나타가 태어난 진당관(陳塘關)과 나타가 악마와 싸운 구만하(九灣河), 나타가 환골탈태한 오련지(五蓮池) 등을 다 찾아볼 수 있다.
의빈의 취병산(翠屛山)에 위치한 ‘나타행궁(哪咤行宮)’은 대륙과 대만 두 곳의 전문가들로부터 ‘중국에서 유일한 나타조묘(祖廟)’로 인정된다. 산발을 따라 조성된 나타행궁은 패방과 태자묘(太子廟) 등 건물이 예스러움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의빈의 오량액 공장의 일각)
예로부터 술과 인연을 맺은 의빈에서는 천여 년 동안 유명한 술이 많이 양조되었으며 ‘한 집에서 술을 마시면 천 집에서 취하고, 한 집에서 술병을 따면 온 도시에 술 향기가 넘치는’ 의빈은 ‘술의 도시’라 불리기도 한다.
의빈의 오량액(五粮液)은 중국의 백주 중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의빈에 남아 있는 양조 유적지인 고요지(古窯池)는 6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보유한 양조 유적지는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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