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4 10:05:5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83] 노주: 중국 술의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노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세 번째는 중국 술의 도시 노주(瀘州)이다. 타강(沱江)과 장강(長江)이 만나는 이 곳은 봄에는 녹음이 무성하고 여름에는 경치가 요염하며 가을은 열매가 탐스럽고 겨울이 경치가 수려한 아름다운 강남이다. 노주는 강남의 수려함과 술의 호방함이 어우러져 노주 고유의 기묘한 경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사천(四川) 분지의 남쪽, 분지가 고원으로 이행하는 지역에 위치한 노주는 뒤에 산을 두고 타강과 장강을 마주하는, 사천남부에서 운남(雲南), 귀주로 통하는 요충지이다.

2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노주는 과거에 강양(江陽)이라 불렀다. 서한(西漢) 때인 기원전 151년 이 곳에 강양현을 두면서 노주의 도시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백자도)

노주는 중원(中原)에서 서남의 소수민족 지역으로 통하는 ‘서남의 요지(要地)’이자 역대로 사천과 운남, 귀주 3성의 물자집산지이며 사천남부와 서남지역의 경제중심지였다. 노주는 또한 유명한 군사 고성이며 근대 혁명 역사전통을 보유한 도시이자 술 문화를 보유한 유명한 도시이기도 하다.

2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는 노주에 많은 문화재와 고적을 남겼다. 보은탑(報恩塔)은 당(唐) 나라 건축의 예술특징을 보유하고 춘추사(春秋祠)는 청(淸) 나라 조각예술의 정화를 대표하며 용뇌교(龍腦橋)는 정교한 석각예술과 웅장한 조형, 기이한 구도로 내외에 이름이 자자하다.

장강과 타강의 기슭에 1,170m 길이의 명(明) 나라 때 성벽과 인화성(仁和城), 회진성(會津城), 삼성성(三聖城), 소북성(小北城) 등 성곽이 옛 모습을 유지하며 응광문성(凝光門城)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남송신비성의 성문)

노주에서 동쪽으로 30km 거리에는 또 노로주성(老瀘酒城)이라 불리는 남송신비성(南宋神臂城)도 있다. 성이 긴 팔뚝처럼 장강으로 깊숙이 들어갔다고 해서 이름한 신비성은 1243년 남침 몽골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

과거 송나라와 몽골이 이 곳에서 34년간 대치했고 성은 다섯 번이나 이름을 바꾸며 송과 원(元)의 전쟁역사에서 비장한 한 폐지를 엮었다. 당시 ‘쇠로 만든 노주’라 불린 신비성은 현재 둘레 3,365m에 달하는 성곽이 보존되어 송·원간 전쟁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동서 길이 2.5 km, 남북 너비 1km의 신비성 유적에는 또 관아와 종고루, 비밀 성 출입문, 성밖 해자, 훈련장 등이 남아 있다. 삼면이 장강에 둘러싸인 신비성은 강안에 벼랑이 아찔하고 특히 성의 서남쪽에 깎아지른 낭떠러지가 있어 동남쪽으로만 성을 출입할 수 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용뇌교)

노주성은 삼면이 강물과 잇닿아 있고 한 쪽으로 산에 의지한다. 노주의 강음서로(江陰西路)에 위치한 용투관(龍透關)은 촉한(蜀漢) 때의 옛 관문으로 북쪽으로 타강과 연결되며 남쪽으로 장강에 잇닿아 마치 거대한 용이 두 강물을 하나로 연결한 듯 장관이다.

노주에서는 또 유명한 옛 석교인 용뇌교(龍腦橋)도 명물이다. 중국에서 보기 드문 명나라 때 석교인 용뇌교는 1378년~1398년에 축조된, 석교와 석각을 한 몸에 모은 교량이다.

큰 돌로 교각을 만들고 교각 사이에는 두텁고 넓은 석판을 깔았으며 홍수 방류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해 난간을 세우지 않았다. 교각에 새긴 커다란 용과 다양한 짐승 조각이 푸른 청산을 배경으로 맑은 물에 거꾸로 비껴 비경이다.

(사진설명: 단아한 보은탑)

노주고성의 심벌은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구도를 형성하는, 고성 중심에 위치한 송(宋) 나라 때 보은탑(報恩塔)과 고성 동쪽의 명(明) 나라 때 쇄강탑(鎖江塔), 종고루(鐘鼓樓)이다.

1148년에 처음으로 축조한 보은탑은 안무사(安撫使) 풍집(馮楫)이 모친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의미로 축조했고 타강과 장강 합수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솟아 있는 쇄강탑은 수로의 평안을 위해 세운 것이며 시간을 알리고 경보를 울리는 두 가지 기능을 갖춘 종고루는 동서양 건축양식을 한 몸에 모아 이색적이다.

이밖에 충산규성각(忠山奎星閣)과 서쪽 교외의 백자도(百子圖), 남쪽 교외의 운봉사(雲峰寺), 고성 북쪽의 옥섬산(玉蟾山) 마애석각, 고성의 청나라 때 거리와 가옥들도 노주에 예스러운 문화적 분위기를 가미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방산)

산 좋고 물 맑은 노주는 예로부터 많인 문인묵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당(唐) 나라 시인 두보(杜甫)와 송(宋) 나라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송나라 서예가 황정견(黃庭堅), 송나라 문학자 범성대(范成大),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 명(明) 나라 시인 양신(楊愼), 청(淸) 나라 작가 황운곡(黃雲鵠) 등이 모두 노주의 아름다운 산수에 매료되어 작품을 남겼다.

오늘날도 동암(東岩) 기슭에는 남아 있는 ‘두보석’과 황정견의 서예작품들인 ‘옥섬(玉蟾)’, ‘졸계(拙溪)’, 양신이 쓴 글 ‘금오봉(金鰲峰)’, 황운곡의 시비(詩碑) ‘용마담(龍馬潭)’ 등은 그들이 노주에 남긴 흔적들이다.

산과 물과 바위와 숲과 동굴과 샘물이 어우러진 노주에서는 산발이 기복을 이루고 숲이 무성하며 시냇물이 맑은 사천 최대의 원시림인 황형(黃荊) 원시림과 사원이 즐비한 노주의 명산 방산(方山), 기이한 산봉우리와 바위, 협곡과 폭포, 숲과 온천을 거느린 천선동(天仙硐), 아름다운 산수와 정교한 석각이 조화를 이루는 옥섬산(玉蟾山)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설명: 주덕기념관의 일각)

노주는 또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보유한 도시로 혁명지사들이 남긴 사적지와 유물도 많이 보존하고 있다. 천남사범학당(川南師範學堂)은 프로레타리아 혁명가들이 혁명의 불씨를 지핀 곳으로 이 곳에서는 1922년~1923년에 많은 혁명가들을 키웠다.

그 밖에 노주에는 주덕(朱德) 장군이 호국군(護國軍)을 거느리고 황제로 칭한 원세개(袁世凱)의 북양군벌(北洋軍閥)을 격파한 곳, 주덕 기념관, 노순(瀘順) 봉기 지휘부 사적지 등이 있다.

노주는 또한 중국혁명의 군대 홍군(紅軍)이 적수(赤水) 강을 네 번 건너며 국민당(國民黨) 군대와 싸운 전적지이다. 홍군은 바로 이 곳에서 국민당 군대의 포위를 뚫고 장정(長征) 길에 올라 혁명의 불씨를 섬감녕(陝甘寧)을 통해 중국 전역에 뿌렸다.

(사진설명: 노주대곡노요지의 일각)

또 내외에 명성이 자자한 유명한 중국 술의 도시인 노주는 농향형 대곡주(大曲酒)의 발원지 중 하나이다. 노주대곡주는 맛이 순하고 향이 좋으며 맛이 오래 간다. 노주대곡주 중 하나인 노주노교특곡(瀘酒老窖特曲)은 국가급 명주에 선정됐다.

명(明) 나라 때 노주에는 벌써 10여개의 양주교지(釀酒窖池)를 건설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사용 중에 있다. 그 중 4개가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 40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노주대곡노교지(瀘州大曲老窖池)는 중국에서 건설 연대가 가장 이르고 연속 사용시간이 가장 길며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중국의 첫 요지’라 불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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