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6 10:51:0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85] 대현: 영웅의 변방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대현)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다섯 번째는 영웅의 변방도시 대현(代懸)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현 곳곳에는 수많은 고적이 별처럼 산재해 대현의 눈부셨던 어제를 말해준다.

도심에 우뚝 솟은 변정루(邊靖樓)는 위엄을 자랑하고 문묘(文廟)는 산서(山西)에서 최대의 규모이며 양충무사(楊忠武祠)는 해외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조고관(趙杲觀)은 벼랑에 의지해 공중에 건듯 솟아 장관이다.

그 밖에 대현에는 또 수려한 모습의 아소카왕탑과 벼랑중턱에 조성된 절 백인암사(白仁岩寺),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홍복사(洪福寺) 전탑, 도교의 암자 봉황관(鳳凰觀) 등도 있다.

(사진설명: 대현고성의 패루)

과거에 대주(代州)라 불린 대현은 산서성 동북부, 안문관(雁門關) 기슭에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 북악 항산(恒山) 지맥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불교성지 오대산(五臺山)과 연결되며 호타하(滹沱河) 강을 낀 대현은 역대로 산서 북부의 정치와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대현은 기원전 700년대의 춘추(春秋)시기에 진(晉)에 속하고 그 뒤의 전국(戰國) 시기에는 조(趙)와 진(秦)에 속했다. 기원전 202년 서한(西漢) 왕조 건립 후 이 곳에 광무현(廣武懸)을 두었고 동한(東漢) 때 안문군(雁門郡)에 속했으며 수(隨)나라 때인 585년 안문군을 대주(代州)로 개명했다.

명(明) 나라 때인 1369년 대주를 대현으로 개명했으며 청(淸) 나라 때인 1724년 대현을 직예주(直隸州)로 승격시켜 그때로부터 대현은 주(州)와 군(郡), 도(道)의 행정소재지로 부상했다. 1911년 다시 대현으로 개명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사진설명: 대현고성 고건물의 일각)

험준한 지세에 의지한 대현은 남쪽과 북쪽이 산악지대이고 가운데가 벌판이며 그 곳에 유명한 관문인 안문관(雁門關)이 자리잡아 군사요충지로서의 명성을 널리 떨친다.

2천여 년간 대현에서는 크고 작은 전역이 1700여 회나 발생했으며 역대로 수많은 영웅들이 이 곳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조양자(趙襄子)가 대(代) 나라를 병탄한 후 조(趙) 나라 장군 이목(李牧)이 이 곳에서 조나라를 지켰고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안문관을 나서자 평성(平城)에 발이 묶였으며 이 곳에 발이 묶인 수양제(隋煬帝)가 이연(李淵)에게 구조요청을 보냈다.

북송(北宋)의 명장 양업(楊業)과 그의 아들들이 이 곳에 천고에 길이 남는 충성과 애국의 스토리를 남겼고 이자성(李自成)은 이 곳에서 열흘 너머 대전을 벌이고 나서야 북경(北京)으로 입성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아소카왕탑)

대현은 현대의 군사역사에도 굵은 한 획을 남겼다. 군벌들 간의 혼전과 일본군과의 작전, 양영보(陽明堡) 비행장 야간 습격 등 수많은 현대의 전투가 모두 이 곳에서 벌어져 천고에 길이 전해진다.

유구한 역사와 독특한 군사적 위상으로 인해 대현에는 풍부한 문화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세월의 풍상고초 속에서 대현고성은 수차 축성되었다가 파괴되어 현재는 서문(西門) 옹성(甕城)과 북쪽, 서쪽의 두 구간 성벽만 남아 있다.

고성에는 신석기시대 유적과 한(漢) 나라 때 장성유적, 수(隨) 나라 때 성곽유적, 명(明) 나라 때 축조한 39개의 보루 유적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옛 무덤과 절, 암자 등 많은 고건물이 남아 있다.

(사진설명: 웅장한 안문관)

서형관(西陘關)이라고도 하는 안문관은 대현고성에서 서북쪽으로 20km 거리의 안문산 자락에 위치하며 녕무관(寧武關), 편관(偏關)과 함께 삼관(三關)이라 불리기도 한다.

주변에 산발이 둘러서고 구불구불한 길이 그 속을 지나가는 안문관은 험준한 지세로 역대로 군사요충지였다. 지금의 안문관 성루는 명나라 때인 1374년에 축조했다.

안문관에는 조나라 장군 이목의 사당 터가 남아 있으며 수기의 비석도 보존되어 있다. 그 중 명나라 때 세운 <무안군묘비기(武安君廟碑記)>에는 이목이 군대를 이끌고 수차 흉노와 싸워 승리를 거둔 내용과 안문관이 명나라 때의 전란에도 여전히 군사요지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설명: 안문관의 아름다운 설경)

명나라 초반, 안문관은 원(元)나라 잔여세력의 끊임 없는 교란을 받았다. 명 왕조는 안문관 일대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길안후(吉安侯) 육형(陸亨)을 지휘사로 임명하고 군민을 동원해 장성요새를 든든히 다지고 군사시설을 증축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시설이 바로 적정을 감시하는 초소와 작전을 지휘하는 지휘소, 군대가 주둔하는 병영 등 다양한 기능을 한 몸에 모은 고건물 변정루(邊靖樓)이다.

대현성안에 위치한 변정루는 명나라 때인 1374년에 신축했고 1471년에 소각된 것을 후에 개축했다. 변정루는 하단에 벽돌로 둥근 문을 낸 외벽을 쌓고 그 위에 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의 누각을 세웠다.

(사진설명: 웅장한 변정루)

전쟁이 시작되면 누각에 주둔한 군사들이 빠른 속도로 네 개의 성문과 대현고성의 각 중심지로 옮겨가서 고성을 지키고 평화시기에는 누각의 종과 북이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어 변정루는 고루(鼓樓)라고도 불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변정루는 기존의 군사적 의미를 잃고 대신 사람들이 누각에 올라 저 멀리 대현고성과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고 시흥에 젖어 작품을 창작하는 명소가 되었다.

대현은 북송초반 양가장(楊家將), 즉 양씨 가문의 장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곳이자 양씨가문의 자손들이 살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대현고성에서 동쪽으로 20km 거리에 위치한 양씨 가문의 사당 ‘양충무사(楊忠武祠)’가 그 영웅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안문관 장성)

남쪽을 향한 양충무사의 문 앞에는 돌 사자와 깃대가 세워져 있고 아카시아나무 두 그루와 패방 두 개가 있으며 그 맞은 켠에는 송덕루(頌德樓)라고 하는 무대건물이 위치해 있다.

방 세 칸 너비의 사당 정문에는 ‘혁세장략(奕世將略)’과 ‘일당충의(一堂忠義)’, ‘삼진량장(三晉良將)’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세 개의 편액이 걸려 사서에 길이 남는 양가장의 눈부신 무공을 보여준다.

양씨가문의 수장 양업이 전사한 후 태위(太蔚) 직을 추존받고 ‘충무(忠武)’ 시호를 받았기에 양씨가문의 사당은 양충무사라고도 부른다. 두 개의 마당으로 구성된 사당의 앞 부분 건물에는 사당을 지키는 양씨 가문의 자손들이 묵는다.

(사진설명: 대현고성의 일각)

뒤 부분의 안채와 별채에는 양업과 그의 부인인 사태군(佘太君)의 좌상이 공양되어 있고 양쪽에는 그들의 8명 아들들의 채색 입상이 세워져 있으며 ‘종조도(宗祖圖)’의 비석에는 양씨가문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대현고성에서 서남쪽으로 23km 거리의 천대산(天臺山) 골짜기에 위치한 조고관(趙杲觀)은 일명 천대사(天臺寺)라고도 한다. 전한데 의하면 기원전 400년대의 춘추 후반 조양자(趙襄子)가 대(代)나라를 멸하자 대왕의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끓고 다른 첩실들은 승상 조고(趙杲)의 도움으로 이 곳에 이르러 동굴에 은둔했다.

후에 사람들은 조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이 곳에 암자를 짓고 조고관이라 불렀다. 남쪽과 북쪽 두 동굴로 나뉘는 조고관에서 가장 험준하고 웅장한 명소는 ‘선각등운(仙閣登雲)’이다.

(사진설명: 웅장한 안문관)

날아갈 듯한 지붕을 한 3층 누각은 반은 동굴에 의지하고 반은 공중에 떠 있는데 건물 아래에는 버틸 것 하나 없고 위로도 통로가 없다. 누각으로 오가는 유일한 통로는 누각에 걸려 있는 수십 장 길이의 철삭 한 줄뿐이다.

낭떠러지 하단에서 철삭을 잡으면 발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지고 머리 위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철삭을 따라 누각에 올라서면 ‘조고관이 하늘과 두 손가락 거리에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경치가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한 대현은 예로부터 많은 문인묵객들의 발길을 끌었다. 당(唐) 나라 시인들인 진자앙(陳子昻)과 이백(李白), 왕창령(王昌齡), 북송(北宋)의 학자인 범중엄(范仲淹), 원(元) 나라 화가인 살도자(薩都刺) 등이 모두 대현의 산천에 매료되어 불후의 작품을 남겼다.

(사진설명: 대현문묘의 일각)

그 중 살도자는 어려서부터 조부를 따라 대주에서 살다가 과거시험에 급제한 후 각지를 돌면서 벼슬을 하는 중에 여러 지역의 경관을 묘사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강남의 아름다운 경치와 새상(塞上)의 광막한 경관 등을 형상적으로 묘사한 살도자는 원나라의 으뜸가는 시인으로 인정된다. 그가 생전에 다년간 쓴 시를 묶어 편찬한 <안문집(雁門集)>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대현은 현재도 도정(道情)과 묘당(廟堂)음악 등 다양한 민간예술을 전해온다. 도인들이 도교의 교리를 설명할 때 사용하던 종교예술형식인 도정은 후에 대중들에게 흡수되어 지방극으로 변화·발전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대현고성)

대현의 도정은 짙은 향토적 분위기와 지방특색을 띤다. 특히 방언으로 구사하는 도백(道白)은 유머러스가 특징이며 도정 민간예술인들은 다수가 시골에서 더욱 활약적이다.

도교와 불교 사원의 종교음악이던 묘당음악도 후에는 사원을 나와 민간의 장례식에도 사용되며 현재 역시 민간예술의 일종이 되어 시골에서 많이 전해진다.

대현은 전지와 회화의 전통도 보유한다. 600여년 전부터 이 곳의 화가들은 아주 유명했고 1980년대 새로 부상한 대현민간회화는 중국의 대만과 홍콩 지역, 유럽, 남미주에까지 전파되었으며 대현은 1988년 ‘중국현대민간회화의 고장’으로 명명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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