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산해관 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여섯 번째는 천하 제1관문 산해관(山海關)이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엄청난 규모와 웅장한 기세, 유구한 역사로 내외에 이름을 떨친다.
중국의 북부를 가로지른 만리장성은 거대한 용처럼 사막과 초원을 지나고 산발을 넘어 황하(黃河)와 발해(渤海) 기슭까지 뻗어 있다. 그 중 발해의 기슭, 연산(燕山) 마루에 솟은 장성에 뒤에 산을 업고 바다를 마주한 웅장한 성루(城樓)가 있는데 그 누각이 바로 ‘천하 제1 관문’이라 불리는 산해관이다.
하북성(河北省) 진황도시(秦皇島市)에서 동북쪽으로 15km 거리의 산해관은 동북지역에서 화북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위치한, 명(明) 나라 만리장성 중 동쪽의 중요한 관문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진동루)
1381년 명 왕조는 동북 여진족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대장군 서달(徐達)을 파견해 산해관을 수비하고 관문을 축조하게 했다. 이 곳은 산과 바다가 하나로 연결된 관문이라고 해서 이름이 산해관이다.
외벽을 벽돌로 쌓은 산해관 성루는 단면이 정방형이며 둘레가 4km에 달했다. 성루의 사면에는 해자가 있고 성벽은 높이 14m, 두께 7m이다. 원래는 4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현재는 동쪽의 ‘진동루(鎭東樓)’만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전루(箭樓) 양식으로 단을 높고 넓게 쌓은 진동루는 정변루(靖邊樓), 임여루(臨閭樓), 목영루(牧營樓), 위원당(威遠堂) 등 건물들과 함께 한 일(一)자로 장성의 위에 줄지어 호랑이 다섯 마리가 관문을 지키는 자세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명도 열지 못하는’ 웅장한 기세를 자랑한다.
(사진설명: ‘천하제1관 편액’)
동문전루의 처마 밑에는 명나라 서예가 소현(蕭顯)이 쓴 ‘천하제1관(天下第一關)’ 편액이 걸려 있다. 한 글자의 높이가 1.6m에 달하는 글은 필력이 중후하고 웅건하고 힘차서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자랑한다. 또 편액의 예술적 풍격과 관문의 건축구도가 조화를 이루어 성루는 더욱 웅장하고 수려해 보인다.
과거 산해관은 군사가들이 필히 다투는 요충지였다. 사람들은 산해관을 만리장성의 첫 번째 관문이라 말한다. ‘청병입관(淸兵入關)’이 말하는 그 관문도 바로 이 산해관이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은 산해관에서 명(明) 나라 총병 오삼계(吳三桂)와 격전을 벌였는데 청의 섭정왕 다이곤의 도움으로 오삼계가 승전고를 울렸다. 산해관대전은 이자성으로 말하면 승리에서 패전으로 나아간 전환점이자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관건적인 전역이었다.
(사진설명: 산해관 장성의 겨울)
1933년 일본군이 산해관을 침략하자 중국군민은 이 곳 장성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1945년 중국국민은 또 이 곳에서 유명한 산해관 보위전(保衛戰)을 가졌다.
오늘날의 산해관은 전략적 방어의 군사기능을 잃고 그 대신 역사와 문화를 함유한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600여년의 풍상고초를 겪으면서도 산해관 성루의 안팎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거리와 많은 고건물이 보존되어 있다.
양쪽에 단아한 모양을 자랑하는 건물, 온갖 화초가 조각된 가림벽의 건물이 즐비한 좁은 골목을 걸으면 웅장한 산해관의 모든 것은 또 그토록 소박하면서도 자연스럽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노룡두)
산해관 성루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면 만리장성이 머리를 건듯 들고 구불구불 뭇 산발을 달리는 듯 심히 장관이다. 다시 머리를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용이 바다에 머리를 박은 듯 장성이 바다 속 깊이 뻗어 있는데 이름하여 ‘노룡두(老龍頭)’이다.
산해관 성루에서 남쪽으로 5km 거리의 바닷가 바위에 조성된 노룡두는 반도 모양의 바위에서 바다 깊숙이 뻗어 있다. 만리장성 중 유일하게 바다와 연결된 이 구간의 장성은 연해의 바위를 따라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간 입해석성(入海石城)과 해신묘(海神廟), 정로대(靖鹵臺), 남해구(南海口), 징해루(澄海樓), 녕해성(寧海城), 해변의 장성 등 일곱 부분으로 구성된 노룡두는 명실공히 육지와 바다를 아우르는 군사요새이다. 노룡두에 올라 저 멀리 바라보면 파도가 세차고 바다와 하늘이 하나로 이어져 심히 장관이다.
(사진설명: 맹강녀묘의 일각)
산해관 성루에서 동쪽으로 6km 거리의 봉황산(鳳凰山)에는 아담한 사당 건물 하나가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봉황산을 바라보면 사당의 붉은 담벽이 푸른 소나무와 조화를 이루는데 이 사당이 바로 맹강녀묘(孟姜女廟)이다.
전한데 의하면 기원전 200년대의 진(秦) 나라 때 맹강녀의 남편 만희량(萬喜良)이 만리장성 축조 인부로 잡혀왔다. 겨울이 되자 맹강녀가 솜옷을 가지고 장성기슭으로 남편을 찾아오니 남편은 벌써 과로로 사망한 뒤였다.
슬픔에 빠진 맹강녀는 사흘 밤 사흘 낮 통곡했다. 그러자 하늘 땅이 어두워지고 태양도 빛을 잃더니 장성의 한 구간이 와르르 무너지고 맹강녀의 남편과 다른 인부들의 해골이 드러났다.
(사진설명: 맹강녀묘의 망부석)
후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 정녀사(貞女祠)와 맹강녀원(孟姜女苑)으로 구성된 맹강녀묘를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명나라 때의 풍격을 유지하며 전후 두 전각과 진의정(振衣亭), 망부석(望夫石), 산문(山門) 등 명소를 거느린다.
이 곳에는 또 사람들의 무한한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해수조조조조조조조락(海水朝朝朝朝朝朝朝落)’, ‘바닷물은 지고 또 지고’, ‘부은장장장장장장장소(浮雲長長長長長長長消)’, ‘뜬구름은 사라지고 또 사라지고’라는 ‘천하에서 제일 기이한 대련’이 인기이다.
사당의 앞쪽 전각에는 소복을 입고 얼굴에 수심을 띠고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는 맹강녀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사당 앞에 산세를 따라 조성한 108개의 계단은 남편을 찾아오기까지 맹강녀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을 대변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산해관 고성)
천 년이 넘는 동안 맹강녀가 통곡으로 만리장성을 무너뜨렸다는 전설을 내용으로 하는 시와 연극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며 만리장성의 관문에 신비로움과 슬픈 색채를 가미한다.
이밖에 산해관에서는 각산(角山) 등정축제와 장수산(長壽山) 가을 축제, 봄날의 답청축제, 맹강녀묘 묘회(廟會) 등 전통행사를 가지며 ‘중국 산해관 국제 장성축제’, 노룡두 바다 축제, 장성의 봄 음악회 등 현대 행사도 가져 관광객들의 발길을 끈다.
산해관에서 최고의 미식은 모양이 아름답고 맛이 순하면서도 강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하북성 미식 금상을 받은 사조(四條) 만두와 잡곡으로 만든 장성보루어(長城饽椤) 떡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