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0 11:19:25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87] 추성: 맹자의 고향

(사진설명: 아름다운 추성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일곱 번째는 아성(亞聖) 맹자(孟子)의 고향 추성(鄒城)이다. 중국 유학(儒學)의 발원지이기도 한 이 곳은 곡부(曲阜)와 함께 ‘추로(鄒魯)’라 불렸다.

과거 추현(鄒縣)이라 불린 추성은 산동성(山東省)의 남부, 산악지대와 벌판이 연결된 곳에 위치해 있다. 동쪽으로 기몽산(沂蒙山)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제녕시(齊寧市)와 연결된 추성은 북쪽으로 공자(孔子)의 고향 곡부(曲阜)와 20km 거리에 있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맹자의 고향으로 ‘추로의 성지’라 불리며 눈부신 유가(儒家) 문화를 창조한 추성은 ‘공자와 맹자의 자취가 남아 있는 땅이자 유가 문화가의 발원지’라는 미명을 가진다.

(사진설명: 맹모삼천 유적지와 추성고성)

중국 역사에서 맹자의 모친은 높은 명성을 자랑한다. 어린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하고 맹자의 끈질긴 태도의 학업을 위해 다 짠 베를 잘라버린 맹모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중국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어린 맹자의 집은 무덤과 가까운 곳에 있어 맹자는 늘 장례를 모방하는 놀이를 했다. 그것을 본 맹모는 그 곳에서 살면 맹자가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해 이사를 가기로 작심했다.

맹모가 맹자를 데리고 이사한 곳은 시장 근처였다. 하지만 맹자는 이번에는 시장에서 놀며 소상인들이 싸구려를 외치고 흥정하는 것을 모방했다. 그런 맹자를 보고 맹모는 세 번째로 학궁(學宮)의 근처로 거처를 옮겼다.

(사진설명: 맹부와 추성고성)

맹자는 학궁에서 놀며 제사를 치르고 글을 읽는 것을 흉내 냈다. 그제서야 맹모는 이 곳이야말로 우리가 살 곳이라고, 그래야 맹자가 배울 것이 있다고 판단해 그 곳에 눌러 살았다는 전설이다.

맹자가 고대 중국의 유명한 사상가와 교육자가 되고 유가학파의 정통 계승자가 된 후 사람들은 맹자를 성인인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이라 부르고 추성을 ‘아성’의 고향이라 불렀다.

현재도 추성에는 맹자의 사당 맹묘(孟廟)와 맹자의 저택 맹부(孟府), 맹자의 무덤 맹림(孟林), 맹자 모친의 무덤 맹모림(孟母林) 를 망라해 맹자를 기리는 ‘사맹(四孟)’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맹묘의 일각)

아성묘(亞聖廟)라고도 하는 맹묘는 북송(北宋) 때인 1037년에 지은 맹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 후 맹묘는 역대로 끊임 없는 개축과 증축을 통해 오늘날 공자의 사당 공묘(孔廟)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한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맹묘는 다섯 개의 마당에 64채의 건물을 거느린다. 주요 건물인 아성전(亞聖殿)과 패방, 산문 등 건물들이 남북방향으로 뻗은 중심선에 줄지어 정연하다.

중심선의 양쪽에는 침전과 맹모전 등 건물들이 대칭되게 줄지어 있으며 고목이 우거진 정원에는 기원전 진(秦) 나라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석 350기가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명로왕무덤 전경)

맹묘의 서쪽에 위치한 맹부는 맹자의 자손들이 사는 저택으로 천 년 전의 북송 후반에 조성되었다. 도합 116채의 건물이 네 개의 마당 주변에 산재한 맹부는 남북길이 226m, 동서너비 99m의 부지에 앞쪽에 관아가 위치하고 뒤에 주택, 그 뒤에 화원이 펼쳐져 있다.

추성 동북쪽 사기산(四基山) 자락에 위치한 맹림은 맹자와 그의 자손들이 묻힌 맹자 가문의 무덤으로 북송 때인 1037년에 조성되었다. 맹림에는 키 높은 고목이 울창하고 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돌을 깐 신도(神道)를 따라 산문과 전각을 지나면 맹자의 무덤이 나타나고 서쪽으로 300m 거리에 세 개의 고분이 있는데 맹손(孟孫)과 계손(季孫), 숙손(叔孫)의 무덤이라고 전해진다. 해마다 음력 4월 초이틀이 되면 맹자의 자손과 관광객들이 맹림을 찾아 유학의 대가 맹자를 기린다.

(사진설명: 맹모림의 비석)

맹자를 아성으로 키운 맹자의 모친을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추성에서 북쪽으로 10km 거리의 마안산(馬鞍山) 자락에 맹모림을 조성했다. 산발을 따라 조성된 맹모림에는 만 그루가 넘는 잣나무와 소나무 등 온갖 수목이 하늘을 가려 아늑하기 그지 없다.

맹모와 그의 남편 맹격(孟激)이 묻힌 이 곳에는 맹씨 자손의 무덤도 있어 중국에서 보기 드물게 완전하게 보존된 가문 무덤의 하나로 인정된다. 또 맹모의 신주와 다양한 비석도 보존되어 맹모림의 역사를 말해주기도 한다.

추성에서는 아성 맹자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맹자 외에 서한(西漢) 때 연이어 승상을 맡은 위현(韋賢)과 위현성(韋玄成) 부자, 벽에 구멍을 뚫고 이웃집의 불빛을 빌어 열심히 공부해 서한의 학자와 승상이 된 광형(匡衡) 등도 이 곳에서 태어났다.

(사진설명: 추성고성의 일각)

그 뿐이 아니다. 사회의 진보를 주장한 동한(東漢) 때의 철학자 중장통(仲長統)과 문무를 겸비하고 특히 고전에 정통한 서진(西晉)의 대장군 유보(劉寶), 위진(魏晉)의 명의이자 의학저서 <맥경(脈經)>을 쓴 왕숙화(王叔和)도 추성 출신이다.

유구한 역사와 눈부신 문화는 추성에 사맹(四孟) 외에 많은 귀중한 역사문화 유적을 남겼다. 그 중 ‘사산(四山)’ 마애석각은 불교문화와 서예예술을 접목한 대표작이다.

명로황왕릉(明魯荒王陵)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역사문화 명산인 봉산(峰山)은 ‘추로(鄒魯)의 수려한 경치’와 ‘태산 남부의 기이한 경관’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봉산)

추성에서 동남쪽으로 12km 거리에 위치한 봉산은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바위산이 겹겹으로 산봉우리를 이룬다고 해서 이름이 봉산이다. 벼랑이 아찔하고 동굴이 아늑하여 태산(泰山)의 웅장함과 화산(華山)의 험준함, 황산(黃山)의 기이함을 한 몸에 모은 봉산은 오악의 으뜸인 태산과 아름다움을 비해 ‘태산 남부의 기이한 경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전설에 의하면 상고시대에 여와(女娃)가 돌로 구멍 난 하늘을 막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여와가 남긴 돌이 속세에 피해를 끼친다는 소식을 들은 옥황상제가 6명의 신선을 파견해 그 돌을 한 곳에 모아 산을 조성하게 했는데 그 산이 바로 봉산이다. 이 아름다운 전설에서 봉산의 특징이 온갖 모양의 기암괴석임을 알 수 있다.

풍부한 인문경관과 아름다운 자연경치가 어우러진 추성은 ‘산과 물과 성인’을 아우르는 관광명소이자 중국과 동양문화를 연구하는 ‘역사 박물관’과 성인을 참배하는 성지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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