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박주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여덟 번째는 화타(華陀)의 고향 박주(亳州)이다. 오래된 거리 양쪽에 오래된 건물이 즐비한 박주에 들어서면 색이 바랜 사진첩 속에 들어선 듯 하다.
거리의 석판로에는 오래된 삼륜차의 바퀴자국이 깊게 남아 있고 가게의 벽에는 볶은 땅콩과 사탕 가격이 적혀 있으며 심지어 가게주인이 손수 만든 꽃신이 있다는 광고도 붙어 있다.
안휘성(安徽省)의 서남쪽에 위치한 박주는 남쪽으로 강회(江淮)와 이웃하고 북쪽으로 황하(黃河)강을 바라본다. 남북교통선인 베이징(北京)-홍콩 철도가 안휘에 들어서서 첫 역인 박주는 예로부터 ‘강북의 승지, 남북의 요지’라 불리는 새로우면서도 유구한 도시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박주고성)
박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이다. 3천여 년 전 상(商) 나라 때 성탕(成湯)이 이 곳에 도읍을 두었기에 역사적으로 박도(亳都)라 부르기도 한다. <사기(史記)>에는 ‘성탕은 계의 시대부터 여덟 번이나 천도하다 박주에 도읍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元) 나라 때인 1355년 농민 봉기군 두령 유복통(劉復通)이 함께 농민봉기를 일으킨 한산동(韓山童)의 아들 한림아(韓林兒)를 내세워 박주에서 나라를 건국하고 국호를 대송(大宋)이라 했다. 당시 유복통이 박주를 용봉(龍鳳)이라 개명했는데 명(明) 나라 때인 1496년 박주 명칭을 회복했다.
박주는 삼국(三國) 시기의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사가인 조조(曹操)의 고향인 관계로 동한(東漢)의 배도(陪都)가 되었고 당시의 유적들이 지금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사진설명: 조조운병도의 지하통로 일각)
그 중 박주고성의 지하에 있는 조조운병도(曹操運兵道)라고도 하는 고운병도(古運兵道)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고 규모가 가장 큰 지하군사통로이며 ‘지하 장성’이라 불린다.
얼기설기한 지하통로는 입체적으로 분포되고 감시구멍, 벙커, 장애물, 함정 등 다양한 군사시설과 환기구멍, 말을 전하는 구멍, 등을 설치하는 곳 등 부대시설도 갖춘다.
사서에 의하면 조조는 수차 이 지하통로를 활용해 작전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통로를 통해 적지 않은 병사들을 몰래 성 밖으로 이동시켰다가 다시 성안으로 입성하기를 반복하면서 적을 교란시키고 불의의 습격으로 싸움에서 이겼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조씨공원)
세월이 흘러 2천 년이 지났지만 박주에서는 지금도 조씨가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조조의 조부 조등(曺藤)과 부친 조숭(曺嵩), 장녀 조헌(曺憲) 등의 무덤이 있는 조씨공원(曺氏公園)이다.
이 무덤에서 구리와 옥으로 만든 동루옥의(銅縷玉衣)와 옥으로 만든 침대, 금속으로 만든 돼지, 구리로 주조한 장식물을 망라한 문화재들이 출토되었고 묘실의 내벽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사람들은 시녀도(侍女圖)와 유천도(遊天圖), 천상도(天象圖), 선경도(仙境圖) 등 풍부한 내용의 벽화를 통해 동한시기 사회를 더 잘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사진설명: 박주고성의 남경항)
조씨가문의 무덤 근처에는 또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한나라 건축양식을 모방한 건물의 군락 삼국람승궁(三國攬勝宮)이 있다. 높이 7m의 1층 성의 주변에는 군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2층의 위무당(魏武堂)은 높이가 19m에 달해 더욱 장관이다.
푸른 벨트를 방불케 하는, 고요히 흐르는 와수(涡水) 강이 박주를 감돌아 흐르며 고성에 아름다움을 가미한다. 고대에 이 강은 돛대가 숲을 이루고 선박이 줄지어 오고 가는 분망한 수로였다.
당(唐) 나라 때부터 박주는 상업이 번창하고 수륙교통이 발달하여 마차와 선박이 드나드는 활기 띤 도시였다. 당시 박주에는 거리 72갈래, 골목 360갈래가 있었으며 다양한 업계의 가게와 시장이 업종 별로 서로 다른 거리에 질서정연하게 집중되었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화희루)
현재의 파자가(粑子街)와 남경항(南京巷)은 박주에서 가장 오래된 거리와 골목이다. 그 밖에 박주에는 팔보육조가(八步六條街)와 수몰완가(水沒碗街)를 비롯한 스토리가 깃든 거리도 적지 않다.
팔보가는 여덟 발자국 만에 거리의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갈 수 있는 짧은 거리이다. 육조는 팔보가가 여섯 갈래의 다른 거리와 연결됨을 말하고 그 여섯 갈래의 거리도 각자 모양이 달라서 흥미롭다. 박주에서는 거리와 골목을 거니는 것도 재미나는 일이다.
화희루(花戱樓)는 박주의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명소이다. 산섬회관(山陝會館)이라고도 하는 화희루는 1660년대에 지은 무대건물이다. 화희루의 곳곳에는 색채가 산뜻하고 무늬가 화려한 채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정교한 벽돌 조각과 목각이 즐비하다.
(사진설명: 웅장한 화희루의 일각)
박주는 유명한 중국 약재의 도시이기도 하다. 130여 종의 약재가 나는 박주는 약재의 고향이라 불리며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중약재 집산지이기도 하다.
박주에서 나는 많은 중약재 중 2천여 년의 재배사를 보유한 하얀 작약이 가장 대표적이다. 200년대의 위문제(魏文帝)시기에 벌써 박주의 하얀 작약이 사서에 기록되었다.
300여년 전 청(淸) 나라 시인 유개(劉開)는 박주를 경유하면서 ‘박주성 밖의 작약 꽃(小黃城外芍藥花) 십 리 오 리에 채색 노을 내렸네(十里五里昇彩霞). 작약의 앞뒤에는 모두 사람이 살고(花前花後皆人家) 집집마다 꽃을 심어 뽕나무인 듯 하여라(家家種花桑麻)’라는 시를 썼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화조암)
박주의 하얀 작약은 분성(粉性)이 충족하고 약효가 좋아 현재도 중국의 국내시장수요를 대량으로 만족시키는 동시에 멀리 동남아에까지 수출되며 연간 수출량은 50만 킬로그램에 달한다.
약재의 도시는 명의 화타(華陀)를 키웠다. ‘외과의 비조’라 불리는 화타는 동한(東漢) 시기의 유명한 의학자였다. 박주성 영안(永安)거리에 위치한 화조암(華祖庵)은 화타를 공양하는 사당이다.
사당과 생가, 고대의 작약원 세 부분으로 구성된 화조암에는 <화타신방(華陀神方)>과 <화타유저(華陀遺著)>, <중장경(中藏經)> 등 저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화조암은 현재 화타기념관으로도 사용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박주)
박주는 중국 명주 중 하나인 고정공주(古井貢酒)의 산지이다. 중국 8대 명주에 속하는 고정공주는 2천 년 전에 벌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조조가 고향의 술을 한헌제(漢獻帝)에게 진상한 후 천 년이 넘는 동안 고정공주는 줄곧 황실에 진상되는 공물이었다.
‘색이 맑기로 수정 같고 향이 순하기로 난초 같은' 고정공주는 '맛이 감미롭고 순하며 뒷맛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술 중의 모란’이라 불린다. 고정공주가 나는 박주는 그로 인해 ‘술의 고장’이라는 미명을 가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