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유림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여든 아홉 번째는 변새의 군사보루 유림(楡林)이다. 사막의 고성 유림에는 고즈넉한 모오소(毛烏素) 사막과 우뚝 솟아 있는 진북대(鎭北臺), 광야에 묻힌 통만성(統萬城), 수천 년을 흘러 오는 무정하(無定河)를 비롯해 많은 명소들이 있다.
서안(西安)이 중국의 고대 역사 중 가장 눈부신 한 폐지를 펼친다면 일년 사시절 북풍, 황사가 동반하는 사막의 고성 유림에서는 고대 중국 변새역사 중 가장 비장한 한 폐지를 볼 수 있다.
사막의 변방도시 유림은 섬서(陝西) 성 북부, 황토고원(黃土高原)과 모오소 사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서남쪽에서 동북방향으로 도시를 관통하는 고대 장성의 북쪽은 사막지대이고 남쪽에는 구릉지대가 펼쳐져 있다.
(사진설명: 유림고성의 성벽)
동쪽으로 타봉산(駝峰山)에 의지하고 서쪽으로 유계수(楡溪水)에 닿으며 북쪽으로 하투(河套) 지역을 바라보는 유림은 중원(中原) 문화와 초원 문화가 융합된 유명한 사막의 도시이다.
3천여 년 전 은(殷)나라 때 이 곳에는 북방의 유목민족인 귀방(鬼方) 인들이 살았고 2천 5백여 년 전 전국(戰國)시기에 처음으로 위(魏)나라에 속하게 되어 상군(上郡)을 두고 경내에 장성을 축조했다.
위나라가 진(秦) 나라에 합병된 후 기원전 214년 이 곳에 군현(郡縣)을 두었으며 그 이듬해 진시황제(秦始皇帝)는 대장 몽염(蒙恬)에게 3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 곳에 주둔하게 하고 장남 부소(扶蘇)를 감군(監軍)으로 파견했다.
(사진설명: 고대 장성의 일각)
당시 몽염은 황사를 방지하고 군영에 좋은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느릅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으며 그로부터 지명도 느릅나무 유(楡)자와 숲 림(林)자를 따서 유림이라 하게 되었다.
장성을 축조한 후 전략적 위상이 더 높아진 유림은 역대로 중요한 군사 요충지가 되었다. 명(明)나라는 북방 부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이 곳에 유림위(楡林衛)를 두었는데 당시 유림은 장성변방에서 9개 중요한 군사도시 중 하나였다.
후에 유림위는 수차에 걸쳐 증축되었는데 그 중 1476년 유림성을 북쪽의 호숫가까지 확장한 것과 1492년 유림성의 남쪽을 증축한 것, 1515년 유림성 남쪽에 관외성(關外城)을 축조한 세 번이 가장 대표적이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유림고성)
현존하는 유림고성의 성곽은 장방형이며 성벽의 둘레는 6,484m에 달하고 동서남북에 네 개의 성문을 두었다. 하단에 돌을 쌓고 외면에 벽돌을 붙인 성벽은 높고 견고하다.
성문 위에 적루(敵樓)를 세우고 하단에 옹성(甕城)을 축조한 유림의 고대성벽은 중국에서 보존이 잘 된 고대 성벽 중 하나이다. 고성의 중심거리 중앙에는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성명루(星明樓)가 우뚝 솟아 장관이다.
목조 건물인 성명루는 45m 높이의 3층 건물이며 예스러운 팔작지붕에 황록색의 기와를 얹었다. 대들보와 기둥에는 그림과 조각이 즐비해 영롱하면서도 우아하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유림고성)
고성의 가옥이 일색으로 사합원(四合院) 형식으로 된 유림고성은 ‘미니 북경(北京)’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런 건축양식의 고성은 중국에서도 북경 외에 보기 힘들다.
유림고성의 건물이 북경의 건물을 모방한 것은 명나라 때 유림의 주둔군과 연관된다. 역사적으로 유림은 북경의 안전을 담보하는 병풍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건물양식이 북경의 민가양식을 따른 것은 물론이고 고성의 성벽도 명 나라 황제의 어명으로 당시 전국적으로 유일하게 북경성벽보다 더 높게 쌓았다.
유림고성의 사합원은 문루가 높이 솟고 모양도 서로 다르다. 청색의 벽돌로 건물의 외벽을 쌓고 가림벽에는 산수와 화초를 새겼으며 남쪽을 향한 본채와 동서 양쪽의 곁채는 정연하게 대조되며 우아함을 자랑한다.
(사진설명: 웅장한 진북루)
유림을 경유하는 구불구불한 만리장성은 700km 길이에 달한다. 유림을 경유하는 장성에 축조된 진북루(鎭北樓)는 만리장성 중 규모가 가장 큰 봉화대(烽火臺)이자 장성유적에서 가장 웅장한 공사 중 하나이다.
진북대는 명나라 때인 1607년에 축조되었다. 험준한 산세를 따라 세워진 진북대는 모양이 탑을 방불케 하는데 30m높이에 4층이며 위로 올라가면서 건물이 점점 좁아진다.
과거 적정이 발견되면 장성의 수비병사는 즉시 이 봉화대에 불을 지폈고 봉화를 본 군사가 사면에서 달려와 장성을 거점으로 힘을 모아 북방군사의 남침을 막았다.
(사진설명: 이자성 행궁의 일각)
북쪽으로 하투지역과 연결되고 남쪽으로 진령(秦嶺) 산발을 바라보는 유림고성 일대에서는 역대로 많은 전역이 있었다. 기원전 100년대 한무제(漢武帝)가 이 곳에서 흉노와 결전을 벌였고 당(唐) 나라 곽자의(郭子儀)와 송(宋) 나라 양업(楊業), 범중엄(范仲淹), 심괄(沈括) 등도 모두 유림에 흔적을 남겼다.
1518년 명나라 무종(武宗) 제가 변방을 시찰하면서 3개월간 유림에 머물렀고 1644년 유림 미지(米脂)에서 태어난 이자성(李自成)이 대순(大順) 정권을 세운 후 명장을 파견해 유림의 수비군과 격전을 벌였다. 오늘날도 미지에는 이자성 행궁(行宮)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유림)
혁명의 근거지이기도 한 유림은 중국혁명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1924년 중국공산당은 수덕사범(綏德師範)학교에 섬서 북부 최초의 중국공산당 조직을 건립했고 1927년 이 곳에서 시작된 청간(淸澗) 봉기를 영도했다.
1934년 이 곳에 현(縣) 급 소비에트 정권이 세워졌고 1935년 중국 홍군(紅軍)이 섬서 북부에 이른 후 이 곳은 항일전쟁의 후방이 되어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을 크게 지원했다.
해방전쟁 시기 모택동(毛澤東)과 주은래(周恩來) 등 혁명가들은 1년여 동안 유림의 현과 마을을 전전하며 국민당과 싸웠고 이 곳에서 중국인민해방군에 ‘장개석을 타도(打倒)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자’라는 진군명령을 내렸다.
(사진설명: 유림고성의 야경)
장성 주변에 위치한 유림은 사막의 중요한 변새도시이자 섬서 북부의 행정과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이며 몽골족과 한(漢)족의 통상도시이기도 하다.
명나라 때인 1564년에 몽골족과 한족간 통상을 개방하고 역마성(易馬城)을 축조한 이래 몽골족과 한족 상인들이 모여 들어 역마성의 무역은 아주 활성화되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유림 신도시)
청나라 초반에 시장을 역마성에서 유림성으로 옮긴 후 많은 상인들이 유림에 정착해 1900년대의 중화민국(中華民國) 초반에 이 곳의 가게는 180여개에 달하고 유림은 섬서와 산서(山西), 내몽골 등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피혁의 무역지로 부상했다.
유구한 역사는 눈부신 문화를 잉태한다. 이 변방의 땅에는 열정적인 무용인 양걸춤과 격앙된 곡조의 노래 신천유(信天遊), 천태만상의 수덕(綏德) 돌 사자, 앙증맞고 수려한 전지를 비롯해 짙은 황토고원의 풍토와 순박한 생활을 보여주는 볼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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