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서주고성)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아흔 두 번째는 한(漢) 문화의 도시 서주(徐州)이다. ‘진(秦)과 당(唐)은 서안(西安)을 보고 명(明)과 청(淸)은 북경(北京)을 보며 동한(東漢)과 서한(西漢)은 서주를 보라’는 말이 있다.
4천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며 많은 명승고적을 보유한 서주에는 특히 귀산한묘(龜山漢墓)와 사자산초왕릉(獅子山楚王陵), 한화상석(漢畵像石), 한병마용(漢兵馬俑)을 비롯해 한왕조의 이야기를 담은 문화재가 많다.
강소(江蘇)와 산동(山東), 하남(河南), 안휘(安徽) 네 성(省)의 교차점, ‘동쪽으로 황해(黃海)와 인접하고 서쪽으로 중원(中原)을 연결하며 남쪽으로 강회(江淮), 북쪽으로 제노(齊魯)’를 이웃하는 독특한 지역에 위치한 서주는 교통이 편리하며 예로부터 군사 요충지였다.
(사진설명: 서주의 예스러운 건물)
서주고성은 과거에 팽성(彭城)이라 불렀다. 2천여 년 전 진한(秦漢) 때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가 도읍을 팽성에 두었다. 강소성에서 최초의 성읍이었던 이 팽성은 그 후 여러 차례나 무너졌다가 다시 축조되었다.
400년대, 남조(南朝)의 송무제(宋武帝)가 팽성에 입성한 후 성벽을 보수했고 당(唐) 나라 때인 631년 내성을 개축했으며 명(明)나라 홍무(洪武)제 때에 서주성 전체를 증축해 성벽을 든든하고 높게 쌓았으며 해자도 더 넓고 깊게 조성했다.
1624년 황하(黃河) 강물이 범람해 서주는 토사에 묻혔다. 10년 여가 지난 1635년 명 왕조는 홍무제가 축성한 기존의 규모와 모양대로 서주성을 신축했다. 새로 지은 성의 건물과 거리가 모두 기존의 성과 같은 곳에 위치해 지상의 건물과 거리는 토사에 묻힌 지하의 건물 및 거리와 거의 겹쳐 성 위에 성을 쌓은 격이 되었다.
(사진설명: 서주고성의 성벽)
청(淸) 나라 때인 1668년 강진으로 서주성이 또 무너졌고 1724년에 개축했으며 1798년에 성벽 둘레를 7km 로 증축하고 성벽을 더 견고하게 보수했다. 남쪽 성벽은 길이가 1km에 달하고 황하강반까지 닿은 서쪽 성에는 성문 4개를 두었다.
역시 청나라 때인 1855년 서주성은 또 다시 황하강의 토사에 묻혀 지하로 사라지고 지금은 서주성 동남쪽 성벽의 터만 남아 있다. 지금까지 보존된 성벽은 청나라 때 명나라 성벽을 본떠서 축조한 것이다.
중원의 남북 요충지에 위치한 서주의 전략적 위상은 아주 높다. 서주에서 전해지는 ‘팽성은 예로부터 구주(九州)에 들고 사람들 수천 년 동안 이 곳을 다투었으며’ ‘구리산(九里山) 자락의 옛 전쟁터에서 목동은 낡은 칼과 창을 주었네’라는 말이 서주고성의 전쟁사를 잘 설명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구리산)
사서 기록에 의하면 4천여 년 동안 서주에서는 20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역이 있었다. 기원전 400년대 진(晉)과 초(楚) 나라 간의 전투가 이 곳 팽성에서 1년 남짓한 동안 지속되었고 진(秦)나라 후반에 이 곳은 초나라와 한(漢)나라 간의 주요 전장이었다.
동한(東漢) 초반인 193년 조조(曹操)가 팽성에서 도겸(陶謙)을 공격했고 198년 조조가 팽성을 점령했다. 군웅(群雄)이 할거하던 동한(東漢) 후반에는 5년 남짓한 동안 이어진 군벌혼전이 서주에서 벌어졌다.
307년~312년에는 남과 북에 할거한 세력이 황하를 경계선으로 서주를 다투며 대치국면을 형성했다. 450년 북위(北魏) 황제가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남진해 서주성에 주둔하고 학살을 감행했다.
(사진설명: 서주회해전역열사기념탑)
근대의 항일전쟁시기의 유명한 전역인 대아장(臺兒庄)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져 중국 군대는 일본군을 크게 격파했고 해방전쟁시기 3대 전역 중 하나인 회해(淮海) 전투도 서주를 중심으로 벌어져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해방군이 국민당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현재 서주에는 항우(項羽)가 군사를 사열하고 말을 훈련시키던 희마대(戱馬臺)와 십면매복(十面埋伏)의 현장 구리산(九里山), 유방(劉邦)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던 가풍대(歌風臺), 한왕(漢王)이 말을 타고 검을 휘두르던 발검천(拔劍泉), 남조(南朝)의 황제가 북벌(北伐) 시 지은 대두사(臺頭寺) 등 각자 사연을 품은 많은 전쟁고적이 남아 있다.
서주에는 진포(津浦) 철도 항일 전쟁 기념정과 마파(馬坡) 항일 열사릉, 회해전역(淮海戰役) 열사기념탑, 회해전역기념관 등을 망라한 현대의 전쟁사적지도 많다. 이런 명소들은 이 고성의 전쟁사와 현대 군인들의 풍채를 잘 보여준다.
(사진설명: 희마대의 항우동상과 건물)
항우희마대(項羽戱馬臺)는 서주성의 호도산(戶都山)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206년 항우는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을 두었다. 당시 항우는 이 곳에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올라서서 말을 훈련시키는 것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희마대는 고건물을 모방해 지은 두 채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밖에 풍부한 역사자료와 패업웅풍정(覇業雄風鼎), 중구대(重九臺), 계마장(系馬桩) 등 항우의 비장한 삶을 보여주는 명소들도 적지 않다.
4천 년의 문명사는 서주에 많은 문화유산과 명승고적을 남겼다. 서주의 하늘에서 눈부신 빛을 뿌리는 이런 유산들 중 가장 밝은 별은 ‘한대3절(漢代三絶)’로 인정되는 한나라 병마용(兵馬俑)과 한나라 무덤, 한나라 석상을 대표로 하는 한나라 문화재이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초왕릉)
한나라 문화유산은 고대 중국인들의 비범한 창조력과 심오한 지혜를 보여주며 높은 예술적 감상능력과 고고학적 가치를 자랑한다. 서한(西漢)과 동한(東漢)의 4백년 동안 도합 13명의 초왕(楚王)과 5명의 팽성왕(彭城王)이 서주에 있었으며 오늘날도 서주성의 주변에는 한나라 무덤이 숲을 이루고 이미 출토된 한나라 무덤은 200여기가 넘는다.
중국에서 보기 드물게 풍부한 한나라 문화유산을 보유한 서주에서 도심의 동쪽, 사자산(獅子山) 에 위치한 초왕릉(楚王陵)은 서한 때 서주에 있던 제3대 초왕 유무(劉戊)의 무덤이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이 왕릉은 산을 기반으로 조성되었으며 지하궁전의 구도도 아주 복잡하고 규제도 특이하다. 묘도(墓道)와 천정(天井), 이실(耳室), 측실(側室), 부장무덤 등 부분으로 구성된 초왕릉은 한나라 무덤의 웅장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는 또 금루옥의(金縷玉衣)를 망라해 2천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어 감탄을 자아낸다.
(사진설명: 서주에서 출토된 채색의 한병마용)
한나라 병마용은 사자산 초왕릉의 일부분이다. 사자산 서쪽 기슭에서 출토된 한대병마용(漢代兵馬俑)은 섬서(陝西) 서안(西安)에서 출토된 진(秦) 병마용에 이은 또 하나의 중차대한 고고학 발견이다.
지하에서 2천여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 한나라 군대의 모습은 심히 장관이다. 4천여 점의 병마용이 질서 있게 줄지어 있는데 그들 중에는 넓은 옷소매의 긴 두루마리를 입은 관리직도 있고 군모를 쓰고 무기를 든 병졸도 있다.
서주에서 출토된 한대병마용의 종류는 10여가지에 달해 군사 중심도시로서 서주의 역사를 증명하며 서한 시기 채색도자기의 높은 제조기술도 설명한다.
(사진설명: 구산한묘의 입구)
서주성 서북쪽의 귀산(龜山) 자락에 위치한 귀산한묘(龜山漢墓)는 나란히 위치한 무덤 두 개가 서로 연결된 부부의 합장무덤이다. 이 무덤의 주인은 서한 제6대 초왕 유주(劉注)와 그의 부인이다.
바위산 중턱에 조성된 귀산한묘는 대표적인 동굴무덤으로 도합 15개의 묘실을 가지고 있으며 묘도와 묘실의 총 면적이 700㎡에 달해 산 전체가 거의 다 비어 있다.
귀산한묘에는 지금까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적지 않다. 묘실이 산 전체를 거의 다 비우고 그 묘실로 통하는 남쪽의 묘도는 상하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커다란 석판 26개를 동전 하나 들어갈 틈 하나 없이 묘도의 사면에 꽉 박았다.
(사진설명: 귀산한묘의 묘도)
2천여 년 전 한나라 장인들은 산의 지질구조를 어떻게 장악했으며 이렇게 무거운 석판으로 어떻게 묘도의 사면을 장식했는지는 지금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초왕 묘실의 북쪽 벽에는 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묘실의 안벽에 나타난 성인 크기의 그림자인데 옷소매가 넓은 한나라 의상을 입고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손님을 맞이하는 듯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이 그림자는 ‘손님을 맞이하는 초왕’이라 불린다.
그리고 더 신기한 점은 이 그림자는 묘실의 문을 열고나서부터 서서히 바위 벽에 드러난 것이며 그림자가 나타난 부분의 바위가 다른 부분의 바위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사진설명: 한화석상 예술박물관의 일각)
바위의 석질(石質)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도 있지만 왜 한왕의 묘실에만 나타난 것인지는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런 수수께끼들은 귀산한묘에 더욱 신비감을 안겨주며 사람들의 발길을 끈다.
독특한 예술형식인 한화석상(漢畵石像)은 서한 중반부터 시작되어 동한후반까지 300여년 동안 지속된 예술이다. 중국에서 한화석상이 가장 집중적으로 출토된 지역 중 하나인 서주는 이에 기반해 다양한 한화석상 박물관을 세웠다.
그 중 서주 한화석상(漢畵石像) 예술박물관은 한화석상을 소장하고 전시하며 연구하는 전문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1,500여 점의 한화석상이 소장되어 있다. 풍부한 제재의 이런 한화석상들은 농경과 방직, 가무와 잔치, 우화와 승선, 신선과 귀신 등 한나라 정치와 경제, 사상, 문화, 민속 등 사회의 이모저모를 보여준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서주)
예로부터 산천이 아름답고 인재가 많이 나는 서주는 영웅호걸의 땅이었다. 중국 양생학의 비조 팽조(彭祖)와 한(漢) 나라 개국황제 유방(劉邦), 서초패왕 항우(項羽), 대문호 소동파(蘇東坡), 수(隨)나라 후반 농민봉기군 두령 장대표(張大彪) 등이 모두 소주에 발자취를 남겼다.
오늘날의 서주에는 고층빌딩이 숲을 이루고 잔디가 푸르며 도심과 주변에 운룡산(雲龍山)과 천산(泉山) 공원을 망라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명소들도 많다.
서주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는 또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자랑하는 문화명소가 별처럼 산재해 그 속을 거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서주에 심취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