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1 10:06:03 출처:cri
편집:李仙玉

[왕안석 편-3] 끈질긴 변법의 꿈

(사진설명: 왕안석의 석상)

제3회 끈질긴 변법의 꿈

머나먼 고원에 날이 저물고 창망한 대지에 찬바람이 불었다.

전투를 알리는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군사의 함성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왕소(王韶) 장군이 거느린 용맹한 송(宋)나라 군대는 하늘에서 내린 듯 갑자기 나타나 토번을 공격했다. 하주(河州)를 되찾고 민주(岷州)를 되찾은 송나라는 서북(西北)의 다섯 주 전부를 다시 회수했다! 송나라 군사는 2천여 리(里, 1리=0.5km)에 달하는 국토를 확장하고 강(羌)인 30만이 송나라에 귀순했다. 송나라는 서하(西夏) 남침의 길을 차단하고 서하 공격에 가장 유리한 전선을 열었다.

“서북의 첩보입니다! 서북에서 첩보가 왔습니다!”

왕안석은 첩보를 알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머리를 돌려 곁에서 달게 잠자는 아내를 본 왕안석은 그제야 첩보를 알리는 그 외침소리가 머나먼 기억에서 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개 선비인 왕안석이 갑옷을 입고 고원의 전장에 나갈 수가 없었고 그것은 단지 과거 왕안석의 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왕안석이 변법을 추진하는 것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며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군대를 강하게 하기 위해 왕안석은 장병법(將兵法)과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을 시행하고 군기감(軍器監)을 두었다. 장병법의 시행으로 군대를 개편하고 군대의 자질을 향상하며 병사와 장교가 서로 모르던 기존의 구 제도를 개변해 송나라 군사의 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당시 서하가 토번과 결탁해 송나라 국경을 범했을 때 왕안석은 전장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하황(河湟)을 수복하고 서하를 통제하기 위한 작전전략을 제정했으며 왕소장군을 토번공격에 보내 대승을 거두고 하황일대의 강인을 귀순시키는 전례 없는 전과를 따냈다.

왕안석은 첩보가 전해지고, 천 리 밖에서 작전전략을 제정하여 전장의 승리를 거둔 자신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황제가 몸에 지녔던 옥패를 풀어 자신에게 하사하던 당시의 그 순간을 다시 보는 듯 했다.

자나 깨나 왕안석의 머리 속에는 온통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생각밖에 없었으며 수상(首相)에서 면직되어 강령지부(江寧知府)로 좌천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변법을 잊지 못했다. 왕안석은 탐관오리들이 변법의 시행을 사욕을 챙기는 도구로 활용하여 백성을 위한 법을 백성을 해치는 법으로 만든 일, 조정의 원로와 대신들이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를 빌미로 변법이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의 원망을 유발했다고 억지로 둘러댄 일, 심지어 절친이었던 사마광(司馬光)과 소동파(蘇東坡)마저 정적(政敵)이 된 것을 생각하니 마음 속 깊이 슬픔을 느껴 저도 모르게 며칠 전에 지은 시 <비래봉에 올라(登飛來峯)>를 읊었다.

비래산 위 천 길이나 높은 탑(飛來山上千尋塔)

듣기로 닭 울면 해돋이 본다고 하는데(聞說鷄鳴見日昇)

구름 가려 못 보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不畏浮雲遮望眼)

내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라네(自緣身在最高層)

집요한 왕안석은 초심을 잃지 않고 온 세상의 비방을 받는 자신의 처지도 걱정하지 않고 황제만 지지하면 반드시 변법을 끝까지 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랬기에 그는 “구름 가려 못 보는 게 두렵지 않은 것은(不畏浮雲遮望眼) 내 몸이 가장 높은 곳에 있어서라네(自緣身在最高層)”라는 시구를 썼던 것이다.

다시 잠 잘 생각이 없어진 왕안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펼쳐 들었다. <상군서(商君書)>를 펼치니 갑자기 상앙(商鞅)이 나무를 남문으로 옮기며 신뢰를 쌓은 고전이 생각났다. 상앙이 백성들의 신뢰를 얻어 자신은 화를 당해도 그의 변법은 성공해 진(秦)나라가 일약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으뜸이 되어 세상을 통일한 것을 생각하며 왕안석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변법이 성공할 수만 있다면 내 몸이 찢어진다 해도 한이 없겠다. 하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기가 왜 이렇게도 힘들까?”

상앙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며 왕안석은 칭송시 <상앙(商鞅)>을 즉흥적으로 읊었다.

자고로 백성을 부리려면 성실히 신용을 지켰고(自古驅民在信誠)

한마디 말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것보다 무겁네(一言爲重百金輕)

오늘날 사람들이 상앙의 개혁을 비방할 수 없으니(今人未可非商)

그는 정책을 법령으로 정하면 반드시 실행하였네(商能令政必行)

이론적인 면이 강하나 시구에서 상앙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보이는 왕안석의 이 시는 여전히 대가의 걸작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정재시화(艇齋詩話)>는 ‘왕안석의 절구는 세상에서 가장 절묘하다’고 높이 평가했다.

왕안석이 조식을 마치자 동경(東京)에 사는 그의 동생 안국(安國)이 들어와서 말했다.

“조정에 큰 일이 났어요. 여혜경이 변법을 조롱하는 소동파(蘇東坡)를 처형할 것을 폐하께 주청을 드렸고 변법을 반대하는 몇몇 대신들이 좌천되거나 유배를 갔어요.”

왕안석이 놀라며 되물었다.

“태조께서 역모죄가 아닌 이상 대신을 처형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여혜경이 미치지 않았느냐? 소동파는 이제 와서 변법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운 시책을 내놓을 때마다 한바탕 비웃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가 뭐라고 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혜경이 그 사람들이 왜 그런 일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안국이 냉소했다.

“그 사람들이 다 형님의 문하생들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그들이 견해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나라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요.”

“너 지금 내가 잘못 했다는 것이냐?”

“사람들이 고집쟁이 형님을 욕하는 거에요. 맞잖아요? 형님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가 고집을 부린 건 사실이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느냐? 하지만 나는 혜경에게 그렇게 지나치게 하라고 하지 않았다.”

“‘천지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天變不足畏) 조상의 법칙은 반드시 따르지 않아도 되며(祖宗不足法) 사람들이 왈가왈부해도 걱정하지 말라(人言不足恤)’는 형님이 하신 말이 아니에요?”

“이 말이 어때서?”

“이 세상에 두려운 게 없는 사람을 무슨 수로 구속하고 사람이 무법천지가 되면 무슨 일인들 못해내겠어요? 아무튼 형님이 여혜경을 잘못 가르쳤어요.”

동생의 말에 왕안석은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나는 잘못이 없다. 제멋대로 한 혜경이 잘못이다. 당장 폐하께 소를 올려 소동파에게 죽음을 내리지 말라고 주청 드리겠다.”

“폐하께서는 형님의 말만 들으시니 진작에 썼어야죠.”

왕안석은 일필휘지로 단번에 황제에게 올리는 소를 썼다. 왕안석이 송신종(宋神宗)에게 올린 이 소는 전문 소동파(蘇東坡)를 구하기 위해 썼으며 그 중 ‘성세에 어찌 인재를 죽이겠습니까(岂有盛世而殺才士乎)’ 라는 말은 길이 전해지는 천고의 명언이 되었다. 왕안석은 편견을 버리고 공정을 기해 정적(政敵)을 구함으로써 정치가로서의 넓은 흉금과 기개를 보여주었다. 당시 소동파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벌써 자백했지만 왕안석의 이 소로 인해 처벌을 면하고 황주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좌천되는 경미한 벌만 받았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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