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2 10:11:12 출처:cri
편집:李仙玉

[왕안석 편-4] 실패로 돌아간 변법

(사진설명: 왕안석 기념관 일각)

제4회 실패로 돌아간 변법

‘그 누가 뜬구름처럼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알겠는가(誰似浮雲知進退) 이 땅에 비를 내리고서야 구름은 산중으로 돌아가네(才成霖雨便歸山).’왕안석은 희녕(熙寧) 7년(1074년)에 처음으로 수상(首相)에서 파면되고 강령지부(江寧知府)로 있다가 희녕 8년(1075년) 어명에 따라 수상직에 복귀했다. 그리고 회녕 9년(1076년), 왕안석은 두 번째로 수상직을 내려놓고 강령에서 여생을 보냈다. 왕안석의 이 나아감과 물러감은 모두 변법 때문이었고 그는 변법시행에 대한 추구를 시종 포기하지 않았다.

송신종(宋神宗)은 왕안석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왕안석과 송신종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변법을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신법을 시행했지만 왕안석은 벼슬을 내려놓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높은 벼슬을 하기에 자신의 건강이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수상직을 나이도 젊고 능력도 좋은 한강(韓絳)에게 넘기고 자신은 은퇴를 선택했던 것이다.

아들 왕방(王䨦)이 병사하자 왕안석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변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만들어 전해 병상에 누운 왕안석의 마음은 더욱 슬펐다. 어느 하루, 왕안석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사람들이 방이 어려서부터 심성이 모질어 당신과 백순(伯淳)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변법이 원로들의 반대를 받는다는 말을 듣자 ‘한기(韓琦)와 부필(富弼)를 참형에 처하면 신법이 시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요.”

아내의 말에 왕안석이 화를 냈다.

“그 때 방은 금방 아홉 살인데 내가 어찌 나랏일을 그 애가 듣게 했겠소?”

“사람들은 또 당신이 병상에서 매일 밤 방이 족쇄를 차고 울면서 지옥의 고통을 토로하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그래서 당신이 하는 수 없이 방의 명복을 위해 우산원(牛山園)의 저택을 사원에 기부했다고 말하고 다녀요.”

“나는 벼슬길에 올라선 후에도 불학에 빠져 매일 고승과 불교 교리를 논했소. 그래서 남아 도는 건물을 사원에 기부한 것인데 설마 그것도 그들의 입방아에 오른다는 말이오? 기부가 그들에게 나를 비방하는 빌미를 주었다는 말이오?”

그로부터 왕안석은 산중에 은둔하며 산수를 감상하고 시를 지으며 스스로 즐겼다. 그 때 만약 누군가가 산중에서 왕안석을 만났다면 짚신을 신고 단삼(單衫)을 입고 대나무 갓을 쓴 그를 시골의 농부로 여기지 절대로 천하를 뒤흔들고 천고의 위업을 개척한 재상으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왕안석을 관심한 송신종은 그를 수상의 신분으로 강령에 머물게 했으며 서국공(舒國公)에 봉한 후 곧 또 형국공(荊國公)으로 책봉하고 식읍 2600가구를 내렸다.

원풍(元豊) 8년(1085년), 송신종이 붕어하자 철종(哲宗)이 보위에 오르고 태후가 나랏일을 보았다. 그리고 수상(首相)은 사마광(司馬光)이 맡았다.

그날, 자신의 저서 <자설(字說)> 정장을 금방 마친 왕안석은 황제의 붕어소식을 듣자 피를 토하고 혼절했으며 그로부터 다시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원우(元佑) 원년(元年, 1086년), 왕안석은 잠결에 누군가 ‘사람이 죽으니 그가 펴던 정치도 끝이구나. 태후가 모든 신법을 폐지했다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말을 들은 왕안석은 오장이 타 들어가고 숨이 막혀 그 길로 신종제를 따라갔다.

변법이 실패로 돌아가고 위인이 세상을 뜨고 문명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金)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번화하던 동경(東京)은 잿더미가 되고 광활한 북방의 강토는 오랑캐의 땅이 되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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