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아름다운 장사)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아흔 여덟 번째는 산수의 도시이자 천 년의 고도(古都)인 장사(長沙)이다. 중국에는 산 좋고 물 맑고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면서도 현대적인 분위기가 짙으며 고전과 모던함이 함께 하고 과거와 오늘이 어울리며 화려함과 소박함이 융합되고 전통과 낭만이 함께 하는 도시가 있다. 그 도시가 바로 장사이다.
호남(湖南) 성 소재지 장사는 상강(湘江)의 기슭에 위치해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하고 육로가 얼기설기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장사는 3천여 년 전의 하상(夏商)시기에 고삼묘국(古三苗國)에 속했고 서주 때부터 장사라 불렀다.
2천여 년 전의 춘추(春秋) 시기에 장사는 점차 초(楚) 나라 남부의 중요한 도시와 초나라의 주된 식량 생산지가 되었다. 기원전 221년 진(秦)이 장사군(長沙郡)을 두고 기원전 202년 한(漢) 나라는 공신인 오예(吳芮)를 장사왕(長沙王)으로 책봉하고 장사국(長沙國)을 세웠다.
(사진설명: 멀리서 본 마왕퇴한묘)
오예가 기존의 성읍을 기반으로 성을 축조했는데 이 성이 바로 ‘임상고성(臨湘古城)’이다. 이로 인해 장사는 예로부터 ‘초한명성(楚漢名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장사에는 고성의 유적과 고대의 무덤, 고찰, 오래된 정자와 정원 등 명승고적들이 아주 많아 곳곳에서 과거의 흔적과 조우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부터 장사에서는 많은 문화재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가 바로 세상을 놀라게 한 마왕퇴한묘(馬王堆漢墓)와 삼국손오기년간독(三國孫吳紀年簡牘)이다.
(사진설명: 마왕퇴한묘의 시신)
장사 도심에서 4km 거리의 마왕퇴에 위치한 마왕퇴한묘는 한나라 초반의 장사국 승상 이창(利蒼)과 그 가족의 무덤으로 도합 3기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2호 무덤은 이창의 무덤이고 1호 무덤의 주인은 이창의 부인 신추(辛追)이며 3호 무덤에는 이창의 아들이 묻혀 있다. 세 무덤 중 1호 무덤의 여자 시신이 완전하게 보존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시신의 피부는 연한 갈색에 노란 색을 띠며 윤택이 흐르고 탄력성도 유지한다. 오관이 뚜렷한 시신의 입에는 16개의 치아가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감정 결과 시신의 나이는 50세 정도였다. 이 시신은 시신의 보존과 고대 조직학, 병리학, 의학 등 연구에 중요한 과학적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사진설명: 마왕퇴한묘에서 출토된 백화)
이 밖에 이 무덤에서는 견직물과 약재, 칠기, 악기, 목기, 도기, 죽간을 비롯한 3천여 점의 부장품도 출토되었다. 1호 무덤과 2호 무덤의 관에는 모두 비단에 그림을 그린 채색의 백화(帛畵)가 덮여 있고 3호 무덤에는 백서(帛書)와 병기도 묻혀 있었다.
비단에 쓴 책 백서에는 3폭의 지도도 망라되어 있는데 이 지도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전해지던 최초의 지도에 비해 1300여년이나 앞선, 세계적으로 가장 오래된 지도이다.
마왕퇴한묘의 발견과 발굴은 고고학에서 획기적인 시대적 의미를 가지며 한나라 초반의 정치와 경제, 문화, 과학기술 연구에서 아주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사진설명: 삼국손오기년간독)
1996년 장사 도심의 주마루(走馬樓) 22호 우물을 정리하던중 출토된 수만 장에 달하는 삼국손오기년간독(三國孫吳紀年簡牘)은 232년~237년 사이 장사군(長沙郡)의 보관서류이다.
권서(券書)와 사법문서, 장부로 분류되는 간독에는 오(吳) 나라의 정치와 경제, 군사, 문화, 조세, 호적, 사법, 관직 등 여러 분야의 내용이 적혀 있어 당시 사회상을 진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간독의 수량은 이에 앞서 중국 전역에서 출토된 간독의 총량을 초과하며 내용도 풍부하여 갑골문(甲骨文)과 돈황석실문서(敦煌石室文書)의 발견에 이은 20세기의 또 한 차례의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정된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악려서원의 건물)
장사에서는 예로부터 유명한 인물이 많이 났다. 초(楚) 나라 대부 굴원(屈原)과 서한(西漢)의 문인 가의(賈宜)가 좌천되어 장사에 머물렀고 당나라 서예가 회소(懷素)를 비롯한 많은 명인들도 장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역대의 명인들이 장사에 남긴 인문경관 중 가장 대표적인 명소가 귤자주(橘子洲)와 악려서원(岳䕻書院)이다. 장사 악려산 자락에 위치한 악려서원은 송나라 때 장사 태수(太守) 주동(朱洞)이 976년에 설립한 것이다.
고대의 전통적인 서원 건물이 완전하게 보존된 악려서원은 당시 중국 4대 서원 중 으뜸이었고 세계적으로 가장 이른 고등학부이다. 1018년 송진종(宋眞宗)제가 ‘악려서원’ 편액을 하사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귤자주)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朱熹)와 송나라 교육자 장식(張栻)이 악려서원에서 학문을 설파하며 당시 전국적으로 영향력이 큰 ‘호상학파(湖湘學派)’를 창설하여 장사의 영향력을 더욱 과시했다.
악려산 자락을 감돌아 흐르는 상강(湘江)에 길이 5km의 모래톱이 있는데 그 모래톱이 바로 귤자주이다. 305년에 형성된 이 모래톱은 자연경관과 인문경관이 어우러진 유명한 명소이다.
오늘날 귤자주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귤송정(橘頌亭)에는 높이 5m, 길이 8m의 시비가 세워져 있고 그 시비에는 모택동(毛澤東) 주석의 시 <귤자주∙장사(橘子洲∙長沙)>가 새겨져 있다.
(사진설명: 높이 솟은 열사탑)
장사는 혁명전통을 보유한 도시이기도 해서 ‘혁명의 성지’라 불린다. 1840년 아편전쟁 후 장사의 지사들은 분발해 나섰고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여섯 군자 중 한 명인 담사동(譚嗣同)은 근대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등과 함께 장사에서 유신(維新) 활동을 했다.
신해(辛亥) 혁명의 지도자들 중 한 명인 황흥(黃興)은 유천화(劉天華) 등과 함께 장사에서 화흥회(華興會)를 설립하고 봉기를 조직하며 청 왕조를 전복하는 활동에 종사했다.
그 후 황흥은 손문(孫文) 선생과 연합해 동맹회(同盟會)를 설립하고 광주(廣州) 봉기와 무창(武昌) 봉기를 지휘했다. 현대 역사에서 장사는 또 신민주주의 혁명의 발원지 중 하나이다.
(사진설명: 자수대학 사적지 일각)
모택동(毛澤東)과 채화삼(蔡和森), 유소기(劉少奇) 등 프로레타리아 혁명가들이 일찍 장사에서 공부하고 혁명활동에 종사해 장사는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전파한 곳 중 하나이다.
근대의 중국혁명역사는 장사에 많은 문화재와 사적지를 남겼다. 그 중 시무학당(時務學堂)은 무술변법 운동기간 유신파들이 세운 신식 학교이고 남학회(南學會)는 담사동 등이 세운 신학(新學)을 배우는 단체이며 신민학회(新民學會)는 모택동 등 혁명가들이 세운 진보단체이다.
그 밖에도 장사에는 중국 여성권리 운동의 선구자 추근(秋瑾)의 무덤과 호남성 농민협회 사적지, 호남성 임시 소비에트 정부 호남 자수(自修) 대학교 사적지 등이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전통과 모던이 함께 하는 장사)
또 청나라 군사가이자 호남군의 두령인 증국번(曾國藩)과 청나라 시인 하소기(何紹基), 청나라 후반의 혁명가 진천화(陳天華), 근대 중국의 민주 혁명가들인 황흥(黃興)과 채악(蔡鍔)도 장사에 잠들었다.
수려한 경치의 장사는 ‘산수의 도시’라는 미명을 가진다. 악려산이 도시를 지켜서고 상강이 도시를 흘러 지나며 유양하(瀏陽河)가 동쪽으로 도시를 감돌아 흐른다.
아름다운 산수의 장사에는 귤자주와 달섬이 강심에 자리잡고 도시 곳곳에 12개의 공원과 수많은 녹지가 보석처럼 박혀 예스러운 고성과 조화를 극치를 이룬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