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6 10:37:44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0] 수주: 염제 신농씨의 고향

(사진설명: 아름다운 수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백 번째는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고향 수주(隨州)이다. 중화민족의 비조 신농제의 고향인 수주성에는 신농정(神農井)과 관제묘(關帝廟), 염제신농비(炎帝神農碑) 등 신농제와 연관된 명승고적이 아주 많다.

그 밖에 고대 수주성 외곽의 뢰고돈(擂鼓墩) 고분의 군락은 2500년 전인 전국(戰國) 시기의 무덤이다. 1978년 이 고분들 중 하나인 증후을(曾侯乙)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옛적에 ‘한수 동쪽(漢東)의 나라’라 불린 수주는 장강(長江) 유역과 회화(淮河) 유역의 교차지대, 호북(湖北) 성의 북부, 강한(江漢) 평원과 중원(中原) 평원이 접목한 요충지에 위치한 호북 북부의 주요 도시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대홍산 금정)

서주(西周) 시기부터 춘추전국(春秋戰國) 시기까지 수주에는 여(厲)와 수(隨), 당(唐)을 망라한 3개의 제후국이 있었고 전국시기의 후반에 이 곳에 수현(隨縣)을 두었으며 서위(西魏) 때인 535년 수현을 수주(隨州)로 승격시켰다.

581년, 수국공(隨國公)으로 책봉된 북주(北周)의 대사마(大司馬) 양견(楊堅)이 정제(靜帝)를 밀어내고 보위에 올라 수국공이라는 자신의 직위명칭에 따라 국호를 수(隨)라고 했다.

하지만 수(隨)자에 갈 주(走)자가 들어 있어 자신의 강산이 오래 갈 수 없을까 우려하여 수(隨)자가 따른다는 의미를 가졌다는 이유로 기존의 국호 따를 수(隨)에서 나라 수(隋)자로 바꾸었다.

(사진설명: 수주 박물관의 외관)

수주성 서남쪽에 남아 있는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는 넓은 범위와 풍부한 내용을 가진 한수(漢水) 유역의 굴가령(屈家嶺) 문화유적지이다. 1957년 이 곳에서 생산도구와 생활용품이 대량 출토되어 3천여 년 전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출토된 문화재들 중에는 돌로 만든 도끼와 돌 칼, 돌 낫, 그리고 도자기가 많은데 채색의 그림을 그린 검정바탕의 도자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와 동시에 완전하게 보존된 많은 벼 껍질도 발견되어 당시 장강 유역에서 벌써 벼농사를 했음을 말해준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곳은 희(姬)씨 성의 제후국 수(隨)나라였다. 편년체 사서인 <좌전(左傳)>에는 ‘한수 동쪽의 나라들 중 수나라가 가장 크다(漢東之國隨爲大)’고 기록되어 있다.

(사진설명: 신농제와 아름다운 수주)

수주는 중국인의 인문비조인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고향이다. 전설에 의하면 수주에서 북쪽으로 60km 거리의 구룡산(九龍山) 남쪽 기슭에 열산(烈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신농제는 이 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일명 열산씨(烈山氏)라고도 부른다.

5천여 년 전 신농씨는 수종을 데리고 수주(隨州) 장려산(長厲山)에서 출발해 많은 곳을 다니면서 오곡(五谷)을 재배하고 백초(百草)를 맛 보며 질병을 치료하고 농사를 가르치며 역법을 만들고 통상을 가르치며 고대 문명을 창조했다.

수주에서는 그 때 그가 기거한 동굴을 신농동(神農洞)이라 이름하며 지금까지 보존해 내려온다. 동굴 입구가 북쪽을 향한 신농동은 상단이 넓고 하단이 좁은 독특한 누각의 모양을 가진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신농대전)

온갖 모양의 바위가 산재해 카르스트 지형을 형성하는 동굴에는 또 ‘정오에 시장을 열고 물건을 교환한다’는 신농제의 주장을 실천한 곳이라고 전해지는 ‘일중가(日中街)’ 유적도 남아 있다.

수주성에서 동북쪽으로 30km 거리에는 리산파(犁山坡)와 순전(舜田), 용피언(龍陂堰), 파산채(耙山寨), 순정(舜井) 등 순(舜) 임금이 농사를 지었다는 유적지도 남아 있다.

염제 신농씨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호북에서는 해마다 ‘중국 호북 열산 염제 신농제’를 개최한다. 그리고 신농동 유적지 주변에 신농묘(神農廟)와 신농기념관, 기념광장, 열산대종사(烈山大宗祠) 등 건물을 지어 열산은 해내외 염황자손(炎黃子孫)들이 참배하는 성지가 되었다.

(사진설명: 증후을 무덤 유적 박물관)

멱수(汨水)강과 개수(漑水)강 합류 지점의 기슭에 뢰고둔(擂鼓墩)이라고 하는 둔덕이 있는데 춘추(春秋) 시기 초(楚) 나라 영윤(令尹)이 일으킨 난을 평정하기 위해 초장왕(楚庄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쫓아와 이 둔덕에서 북을 울려 진군명령을 내렸다고 해서 이름이 뢰고둔이다.

오늘날 이 뢰고둔은 이름에 깃든 사연보다 이 둔덕에서 전국초반의 많은 무덤을 발견한 것으로 인해 더욱 세상에 높은 명성을 떨쳤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무덤이 바로 주(周) 왕실의 제후국 중 하나인 증국(曾國) 임금 증후을(曾侯乙)의 무덤이다.

뢰고둔의 동쪽 언덕에 위치한 증후을 무덤은 수직 암갱(岩坑)에 나무관을 사용했다. 이 무덤의 지하궁전은 ‘방 세 개에 거실 하나’를 거느린 호화로운 아파트를 방불케 한다.

(사진설명: 증후을 무덤 유적지 박물관의 덧널)

붉은 사암 속에 조성된 지하궁전은 동서길이 21m, 남북너비 16.5m, 깊이 13m, 면적이 220㎡에 달하며 묘도(墓道)가 없고 무덤의 단면이 한자로 ‘복(卜)’자 모양을 형성한다.

그 중 동쪽의 방에 무덤 주인의 관을 중심으로 부장자의 배관 여덟 개가 놓여 있고 서쪽 방에는 배관 세 개가 놓여 있다. 북쪽 방에는 병기와 죽간 등 물품이 있고 가운데 홀은 무덤 주인의 음악실과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인 듯 많은 예악기(禮樂器)가 배치되어 있었다.

무덤의 관은 171개의 거대한 직사각목으로 덧널의 바닥과 옆면, 뚜껑을 만들었으며 덧널과 관 사이에는 습기 방지를 위해 3만 kg의 목탄을 넣었다. 증후을 무덤은 고대의 과학수준을 보여주는 보고이자 정교하고도 장관을 이루는 고대 예술의 전당이다.

(사진설명: 증후을 편종)

증후을 무덤에서는 악기와 청동기, 병기, 금기, 옥기, 칠기, 목기, 죽간 등 약 1만 5천여 점의 문화재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고 완전하게 보존된 타악기 편종(編鍾)이 가장 장관이다.

‘세계의 기이한 경관 중 유일무이한 보물’이라 인정되는 편종은 도합 65개에 총 무게는 2,500kg에 달한다. 청동으로 주조한 정교한 이 편종은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합리적인 설계에 의해 만들어졌다.

1981년 뢰고둔 2호 무덤에서 또 28개의 작은 융종(甬鍾)과 8개의 큰 융종을 망라한 36개의 편종이 출토되었다. 2호 무덤에서 출토된 편종 중 8개의 큰 종은 증후을 편종과 음이 전적으로 일치해 전문가들은 이 두 편종이 같은 음악체계에 속한다고 인정하면서 이 편종을 증후을 편종의 ‘자매종(姉妹鍾)’이라 부른다. 이 두 세트를 합치면 종의 수가 100개에 달하고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이 편종은 완전하고도 웅장한 타악기임에 손색이 없다.

(사진설명: 증후을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기 학)

1970년대 <동방홍(東方紅)> 1호 위성이 우주에서 지구를 돌며 들려준 음악 <동방홍(東方紅)>이 바로 편종으로 연주한 것이다. 1987년 12월에는 또 증후을 편종 우표와 음성 우표첩을 발행해 음향 우표의 선례를 열었으며 다시 한 번 편종이 세계에 알려지게 했다.

호북성 가무단이 편종소재를 활용해 창작한 ‘편종악무(編鍾樂舞)’는 노래와 무용, 음악을 접목하며 증후을 무덤에서 출토된 편종을 모방·제작한 고대 악기로 음악을 연주했다.

이 프로그램은 ‘금(金), 석(石), 사(絲), 죽(竹), 포(匏), 토(土), 혁(革), 목(木)’ 등 여덟 가지 음으로 화음을 내며 천고의 절창을 다시 연주해 고대 중국인들의 예술적 풍모와 당시의 사회상를 세상에 선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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