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0 10:39:18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2] 뇌주: 영남의 옛 고을

(사진설명: 아름다운 뇌주)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백두 번째는 영남(嶺南)의 옛 고을 뇌주(雷州)이다. 중국 대륙의 남쪽 변두리에 위치한 뇌주는 초월(楚越) 문화와 토착(土着) 문화, 이민(移民) 문화, 해양문화, 중원(中原) 문화가 어우러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성이다.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유구함으로 인해 명승고적이 많고 인문경관이 풍부한 뇌주는 예로부터 ‘영남(嶺南)의 옛 고을(古郡), 바다 북쪽의 기이한 경관(奇觀)’이라는 미명을 가진다.

중국 대륙 최남단의 뇌주반도에 위치해 동쪽으로 태평양과 이웃하고 서쪽으로 북부만(北部灣)과 나란히 하는 뇌주고성은 호수와 산을 거느린 아름다운 경치의 도시이자 뇌주반도의 정치중심이기도 하다.

(사진설명: 공중에서 본 뇌주고성의 일각)

뇌주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2000여년 전의 전국(戰國) 시기에 ‘조자웅(楚子熊)이 월(粤)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이 곳에 석성(石城)을 쌓았으며’ 서한(西漢) 때인 기원전 111년 이 곳에 군사를 주둔했다.

그로부터 뇌주는 2000년 동안 줄곧 군(郡)과 주(州), 혹은 부(府), 현(縣)의 소재지였다. 특히 당(唐) 나라 이후 뇌주성의 위상이 날로 높아졌고 송(宋)과 명(明) 나라 때는 대 규모로 성곽을 증축했다.

성곽의 군사방어기능을 강화하면서 뇌주는 정치 중심이자 군사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뇌주성에는 당시의 십자거리와 기루(騎樓) 식 건물, 전통 가옥 등이 남아 눈부셨던 어제의 뇌주를 보여준다.

(사진설명: 뇌주의 부두)

뇌주성은 예로부터 유명한 바다항만이다.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뇌주성 밖으로는 남도하(南渡河)가 감돌아 흘러 바다로 가고 성의 남쪽에는 내항(內港)과 외항(外港)으로 나뉜 뇌주항이 있다.

이 뇌주항은 2000여년 전 서한(西漢) 때에 개항해 당시의 해상 선로를 보유했다. 하여 뇌주는 당(唐) 나라 때 중국 남해의 ‘해상 실크로드’의 기항 중 하나가 된 대외무역의 중요한 항만 소재지였다.

예로부터 많은 인재가 난 뇌주는 유명한 문화의 도시이기도 하다. 당나라의 진문옥(陳文玉)은 박식하고 재능이 남달랐다. 조정이 수차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연로한 부모를 핑계로 벼슬길에 오르지 않다가 631년에 동합주(東合州) 자사(刺史)가 되었다.

(사진설명: 뇌조사의 석조 패방)

진문옥의 노력으로 동합주는 풍요로운 땅이 되고 현지의 장(壯)족과 요(瑤) 족 등 여러 민족 백성들은 평안한 삶을 누렸다. 634년 당나라 조정은 ‘동합주’를 뇌주라 개명했고 그로부터 뇌주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사용된다.

뇌주반도의 개발에 큰 기여를 한 진문옥은 현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당태종(唐太宗)도 그의 공을 크게 치하해 표창장을 내리기도 했다. 진문옥 사후 뇌주인들은 그를 ‘뇌조(雷祖)’라 존칭하며 그의 사당을 세워 길이 길이 그를 기린다.

뇌주고성에서 서남쪽으로 5km 거리의 영방산(英榜山)에 위치한 뇌조사(雷祖祠)는 지금까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당 나라 때인 642년에 신축된 뇌조사는 아름다운 경치로 뇌양(雷陽) 8경 중 하나에 들었다.

(사진설명: 뇌조사의 정전)

현재까지 보존된 뇌조사는 나란히 줄지은 세 개의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원에 질서 있게 위치한 중산문(中山門)과 정전(正殿), 별채, 후전(後殿), 동서무(東西廡), 종고루(鐘鼓樓), 비랑(碑廊) 등 건물들이 독특한 지방 색채를 띤다.

중심선의 제일 앞에 위치한 산문은 건듯 들린 지붕이 예스럽고 두 번째 정원에 위치한 정전은 앞쪽의 배정(拜亭), 동쪽 및 서쪽의 별채와 함께 ‘凸’모양을 나타낸다.

특히 정전의 심플한 맞배지붕이 완만하게 뻗어 내리며 긴 처마를 조성해 짙은 지방적 특색을 보여준다. 다양한 건물들이 중심선을 따라 배치되며 부지가 1만 ㎡에 달하는 뇌조사는 영남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당이다.

(사진설명: 뇌주고성의 일각)

당 나라 후에 뇌주는 역대 왕조의 죄를 지은 신하들이 좌천되거나 유배 오는 곳이 되었다. 송(宋) 나라의 관리들인 구준(寇準)과 소동파(蘇東坡), 소철(蘇轍), 임백우(任伯雨), 조정(趙鼎) 등이 모두 뇌주로 좌천되었다.

그들은 뇌주에 머무는 동안 학교를 차리고 선진적인 중원(中原) 문화를 전파하며 뇌주의 문화 발전에 좋은 기반을 마련했다. 그들이 차린 학당(學堂)과 서원(書院)은 많은 인재를 키웠고 그런 인재들은 뇌주의 문화와 교육에서 한 몫을 담당했다.

뇌주인들은 역사적으로 뇌주를 위해 기여한 이런 선현(先賢)들을 기리기 위해 구준과 소동파 등 10명의 선현을 기리는 사당 십현사(十賢祠), 소동파와 소철 두 형제가 해후를 즐긴 호숫가에 세운 소공정(蘇公亭), 구준의 사당 구공사(寇公祠) 등 건물을 지었다.

(사진설명: 뇌주의 서호공원)

뇌주에는 문화고적도 많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명소들로는 삼원탑(三元塔)과 뇌조사(雷祖祠), 복파묘(伏波廟), 천녕사(天寧寺), 십현사(十賢祠) 등을 꼽는다.

뇌주고성의 서북쪽에 위치한 서호(西湖)는 원래 이름이 나호(羅湖)였다. 송나라 때인 1022년 뇌주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좌천된 구준(寇準)이 호숫가에 살았고 그 후 많은 명인들이 구준의 거처를 찾으면서 나호는 점차 명소가 되었다.

1097년 소동파가 좌천되어 담주(儋州)로 유배를 가는 길에 뇌주에 이르러 동생 소철과 만나 둘이서 나호에서 뱃놀이를 즐기며 시를 썼다. 그 후 사람들은 두 문호를 기념하기 위해 나호를 서호(西湖)라 개명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삼원탑)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는 아름다운 서호의 기슭에는 소동파와 소철을 기념해 지은 소공정과 십현사, 준원서원(浚元書院), 래천정(萊泉井), 용왕묘(龍王廟) 등 고건물이 자리해 뇌주 8경을 이룬다.

뇌주성 남쪽의 영산(靈山)에 우뚝 솟은 삼원탑(三元塔)은 원래 계수탑(啓秀塔)이라 불렀다. 1614년 명(明) 나라 때 뇌주의 추관(推官) 구양보(毆陽保)가 앞장서서 탑의 축조를 주도했다.

탑을 축조하기 위해 기반을 파다가 뱀 알 3개를 발견하고 해원(解元)과 회원(會元) 장원(壯元) 등 ‘삼원급제(三元及第)’의 뜻을 따서 삼원탑이라 개명했다. 누각 양식의 벽돌 탑인 삼원탑은 높이가 57 m에 달하는데 내부에 계단을 만들고 외부에 난간을 만들어 탑에 올라서면 뇌주성이 한 눈에 보인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천녕사)

천녕사(天寧寺)는 당(唐) 나라 때인 770년 개산조사(開山祖師)가 신축하고 그 후 역대에 걸쳐 개축하거나 증축했다. 현재의 건물은 청(淸) 나라 때 개축한 청나라 풍의 고건물이다.

산발을 따라 조성된 천녕사는 남쪽을 바라보는데 왼쪽으로 뇌주성과 이웃하고 오른쪽으로 서호와 인접한다. 산 좋고 물 맑은 천녕사는 무성한 숲과 예스러운 고건물, 아늑한 분위기로 유명하다.

천녕사는 광동 소관(韶關) 곡강(曲江) 기슭의 남화사(南華寺), 유원(乳源)의 운문사(雲門寺)와 함께 당나라 때 영남의 유명한 사찰로 인정된다. 1097년 소동파는 뇌주를 경유하면서 천녕사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천녕사의 주지스님과 매일 불교 교리를 논의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뇌주)

그러던 어느 날 소동파는 주지스님이 마련한 술을 한 잔 마시고 승방 밖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와 아늑한 환경에 매료되어 ‘만산제일(萬山第一)’이라는 편액을 써서 주지스님에게 선물했다.

부지 7천 ㎡가 넘고 건평이 4,500㎡에 달하며 건물 50여 채를 거느린 천녕사는 뇌주반도 제일의 사찰이다. 중심선을 따라 남쪽에서부터 석조 패방(牌坊)과 산문(山門), 천왕각(天王閣), 대웅보전(大雄寶殿), 장경각(藏經閣) 등 건물이 줄지어 장관이며 중심선의 양쪽에는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승려들의 숙소건물이 대칭을 이룬다.

뇌주의 지방문화는 독특하고 색채가 눈부시다. 그 중 광동의 4대 방언가요에 드는 뇌주가(雷州歌)는 중국의 131개 방언가요 중 하나로 뇌주반도 사람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남국 예술의 기이한 꽃’이라 불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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