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6 12:43:46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6] 한중: 漢 나라의 전쟁터

(사진설명: 아름다운 한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백여섯 번째는 한(漢) 나라의 전쟁터 한중(漢中)이다. 진령(秦嶺)과 대파산(大巴山)이 둘러선 가운데 한수(漢水) 강이 흐르면서 조성된 벨트 모양의 분지에 위치한 한중은 한수강과 가릉강(嘉陵江) 2대 수계를 보유한다.

새북(塞北)의 이 아름다운 도시는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 수많은 역사문화 유적지와 역대의 명인 스토리로 한중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다.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물산, 강남을 방불케 하는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고성 한중은 ‘서북의 강남’이라는 미명을 가지는 한수 중류의 아름다운 보석이다.

(사진설명: 전통과 모던이 함께 하는 한중)

한중은 옛적에 남정(南鄭)이라 불렀는데 전국(戰國) 시기 초(楚)나라가 한수강 중부에 군(郡)을 두고 ‘한중(漢中)’이라 이름하여 현재까지 이른다. 기원전 206년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 의해 한중왕(漢中王)에 책봉되고 남정에 도읍을 두면서 한중은 한(漢) 왕조의 발상지가 되었다.

한중에 이른 유방은 동진(東進)해서 초나라를 멸할 일념으로 단을 축조하고 한신(韓信)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한 후 겉으로는 한중에 안주하는 척하면서 대계를 준비했다.

한중의 인적 및 물적인 힘과 자원을 모으며 준비를 마치자 유방은 잔도를 만드는 척하면서(明修棧道) 몰래 군사를 진창으로 파견해 기습공격으로(暗渡陳倉) 일거에 관중(關中)을 평정하고 천하를 다투어 제왕의 업적을 이루었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고한대)

유방은 보위에 오른 후 국호를 ‘한(漢)’이라 했고 현재도 사용되는 ‘한인(漢人)’과 ‘한족(漢族)’, ‘한자(漢字)’, ‘한어(漢語)’, ‘한학(漢學)’ 등 명칭도 모두 그때로부터 기원한다.

한중에는 현재도 고한대(古漢臺)와 배장단(拜將壇), 음마지(飮馬池), 장량묘(張良廟) 등을 비롯해 한나라 때의 많은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그 중 고한대와 배장단, 음마지는 모두 기원전 206년 유방이 한중에 군사를 주둔할 때 남긴 유적이다.

한중 도심에 위치한 고한대는 유방이 한중에 머물 때의 궁중 유적이다. 높이 8m, 부지 7천 ㎡의 단 사면에 벽돌과 돌로 성을 쌓은 흔적이 남아 있으나 성안의 한 나라 때 건물은 고증할 길이 없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망강루)

고한대 유적에는 천여 년 전의 송(宋)나라 때부터 육속 많은 정자와 누각 등 다양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건물로는 망강루(望江樓)와 계음당(桂蔭堂), 경오지(鏡吾池), 세심정(洗心亭), 청휘정(淸暉亭), 죽림각(竹林閣) 등이다.

고한대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망강루는 높은 처마에 날아갈 듯 건듯 들린 지붕을 한 예스럽고 우아한 고건물이다. 망강루의 단 위에는 돌 북이 하나 있는데 이는 유방이 사용하던 상마석(上馬石)이라고 전해진다.

시검석(試劍石)이라고도 부르는 이 돌은 높이 103cm, 지름 105cm 의 상단이 평평한 둥근 돌인데 초록빛을 띤다고 해서 ‘월대창옥(月臺蒼玉)’이라 불리며 한중 8경에 속한다. 현재 고한대는 한중시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사진설명: 장량묘의 일각)

한장유후사(漢張留侯祠)라고도 부르는 장량묘(張良廟)는 1800여년 전의 동한(東漢) 후반에 한중왕(漢中王) 장노(張魯)가 ‘초한 3걸(初漢三傑)’ 중 한 사람인 장씨가문의 조상 장량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장량묘는 부지 1만 4천 ㎡의 넓은 면적에 북방의 궁전 특색을 지닌 건물을 짓고 남방 특색의 정원을 조성했다. 산세를 따라 조성된 아름다운 정원에 정자와 누각, 전각 등 다양한 건물이 높고 낮게 위치해 독특한 구도와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장량묘의 제일 앞에는 청색의 벽돌로 쌓은 산문(山門)이 웅장함을 자랑하고 그 뒤에 차례로 조성된 아홉 개의 정원에 삼청전(三淸殿)과 대전(大殿), 백석정(拜石亭), 수서루(授書樓) 등 건물이 줄지어 장관이다.

(사진설명: 예스러운 무후사)

삼국시기 한중은 위(魏)와 촉(蜀) 두 나라 군사의 전장이었다. 한(漢)의 장군 황충(黃忠)이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의 목을 베고 한(漢)의 장군 조운(趙雲)은 한수강가에서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유비(劉備)는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이라 자처했다.

삼국시기 유명한 재상 제갈량(諸葛亮)도 한중에 8년간 주둔했다. 그는 그 동안 조위(曹魏)를 격파하기 위한 북벌(北伐)을 여섯 번이나 하면서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234년 오장원(五丈原) 군중에서 삶을 마감했다.

한나라는 제갈량의 유언에 따라 그를 정군산 자락에 묻었다. 현재도 정군산에는 여전히 제갈량의 무덤인 무후묘(武侯墓)가 있고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무후사(武侯祠)도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보사잔도)

한중 무후사는 중국의 많은 무후사 중 축조연대가 가장 이른 동시에 유일하게 황제의 어명으로 세운 것으로 ‘천하제일무후사(天下第一武侯祠)’라 불린다. 배치가 합리적이고 구도가 엄밀한 무후사는 섬서(陝西)의 남부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건물의 군락이기도 하다.

고대의 유명한 전장이었던 한중에는 현재도 많은 전쟁유적이 남아 있다. 그 중 세계적인 기적으로 인정되는 포사잔도(褒斜棧道)는 가장 처음 건설하고 규모가 가장 크며 사용 시간이 가장 긴 잔도이다.

250km 길이의 포사잔도는 한중과 관중(關中)을 연결하는 진령(秦嶺)의 한 계곡으로 한중에서 북쪽으로 25km 거리의 계곡 남쪽 입구가 포구(褒口)이고 북쪽의 출구가 사구(斜口)여서 이름이 포사도이다. 기원전 314년에 처음으로 건설되어 그 뒤에 수차 복구된 이 잔도로는 수많은 대군과 병거가 오갔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석문수리 풍경구)

포사잔도의 남쪽에 석문(石門)이라는 이름의 인공터널이 있었다. 2000여년 전의 한(漢) 나라 초반에 조성된 이 터널은 세계적으로 가장 일찍 조성한 인공 터널이다.

한 나라 이후 이 석문은 막히면 다시 뚫고 하면서 수차 복원하다가 1970년대 석문댐을 건설하면서 물에 잠기게 되었다. 현재 이 곳에 조성된 석문수리풍경구에는 댐과 보사잔도, 고대의 잔도를 모방해 신축한 잔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잔도의 주변 바위에는 한나라 때부터 역대의 관원과 명인들이 남긴 글이 새겨져 있다. 일부는 잔도의 개통과 복원공사에 관한 내용을 새긴 것이며 또 일부는 잔도방문 기념글이나 여행기를 남긴 것이다.

(사진설명: 아름다운 한중)

100쪽이 넘는 이런 석각 중 한 나라 때의 마애석각이 13쪽에 달하는데 당(唐) 나라와 송(宋)나라 때 벌써 유명세를 타서 역대의 고고학자와 서예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으며 ‘석문십삼품(石門十三品)’이라 불린다.

중국의 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지만 강남과 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한중은 북방의 호방함과 강남의 수려함을 두루 갖춘 풍수가 좋은 땅으로도 인정된다.

한중에는 남호(南湖)와 홍사호(紅寺湖), 남사하(南沙河), 천대산(天臺山), 따오기 생태원, 불평(佛坪) 판다 자연 보호구 등 다양한 생태구역이 있어 좋은 생태환경을 자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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