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7 12:52:29 출처:cri
편집:李仙玉

[고성-107] 복양: 용의 제일 도시

(사진설명: 아름다운 복양)

중국의 유명한 고성(古城) 시리즈 중 백일곱 번째는 용의 제일 도시 복양(濮陽)이다. 복양의 역사는 7,8천년 전의 배리강(裴李崗) 문화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2천여 년 전의 진한(秦漢) 후부터는 동군(東郡), 선주(澶州), 개주(開州) 등으로 불렸다.

복양에는 서수파(西水坡) 유적과 위도고성(衛都古城) 유적, 춘추척성(春秋戚城) 유적, 오대선주성(五代澶州城) 유적, 창힐릉(倉頡陵), 자로모사(子路墓祠), 회란비(回鑾碑) 등 많은 유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하남(河南) 성의 동북쪽, 하북(河北)과 산동(山東), 하남 세 성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복양은 중원(中原)의 중심에 자리 잡고 황하(黃河) 강과 인접한 오랜 세월을 겪은 고성이다.

(사진설명: 창힐릉의 일각)

옛날에 제구(帝丘)라 불린 복양고성은 상고시대에 중국 5대 제왕 중 한 명인 창힐(倉頡)과 그의 부족이 생활하던 곳으로 ‘힐욱유도(頡頊遺都)’라 불리기도 한다.

춘추(春秋) 시기 제후국 중 하나인 위(衛)나라는 기원전 629년부터 338년간 이 곳에 도읍을 두었고 14차례에 걸친 제후국들의 회맹(會盟)도 이 곳에서 있었으며 14년간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역설하던 공자(孔子)는 10년간 이곳 위나라에 머물렀다.

기원전 200년대 진(秦)나라가 이 곳에 복양현(濮陽縣)을 둔 때로부터 이 곳은 줄곧 황하강 중하류 일대에서 상업이 번창하고 농업이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사진설명: 척성 유적지의 일각)

그 후 황하강이 수차 물길을 바꾸거나 범람하면서 혹은 전란으로 인해 복양고성은 수차 무너졌다가 다시 복원되기를 반복하다가 현재는 고성유적과 역사거리만 남아 있다.

1천여 년 전 오대(五代) 때에 축조한 복양고성은 성벽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듯 둥글게 조성되어 ‘와호성(臥虎城)’이라 불리기도 한다. 복양고성의 성벽은 둘레가 10.2km, 고성의 부지는 21㎢에 달한다.

현재 성벽은 무너지고 터만 남았지만 길게 뻗은 성벽의 흔적이 역력하고 성안에는 지금도 오대(五代) 때 조성한 복양고성의 도시구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진설명: 복양노성의 일각)

복양옛성(濮陽老城)은 사패루(四牌樓)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4대 거리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의 구도와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다. 거리 양쪽의 가게와 가옥들은 청색의 벽돌에 회색의 기와로 단아한 모습을 자랑한다.

건물마다 네 귀퉁이가 건듯 들린 지붕이 예스럽고 대들보와 기둥에 즐비한 조각과 그림, 생동한 벽돌조각, 우아한 문루(門樓), 높은 문지방 등은 모두 명과 청 왕조 때의 풍격을 띤다.

복양옛성 사거리에 위치한 사패루는 더욱 예스러우면서도 소박해 보인다. 중심각(中心閣)이라고도 하는 이 건물은 6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복양의 대표적인 고건물이다.

(사진설명: 척성역사문화구역의 일각)

8.6m높이에 길이와 너비 각각 6.6m의 네모난 사패루는 사면의 돌기둥이 지붕까지 닿아 있으며 지붕을 덮은 초록색 기와가 푸른 빛을 낸다. 지붕 중심에서 사면으로 흘러 내린 지붕마루에는 각각 8마리의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처마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이 달려 바람이 불면 청아한 소리를 내고 누각의 내부에는 조각과 벽화가 즐비하다. 누각 상단의 사면에는 ‘힐욱유도(頡頊遺都)’와 ‘선연구도(澶淵舊都)’, ‘하삭보장(河朔保障)’, ‘북문쇄약(北門鎖鈅)’ 등 글자가 새겨진 네 개의 편액이 걸려 고성의 역사를 말해준다.

‘힐욱유도’는 복양이 한 때 창힐의 도읍이었음을 말하고 ‘선연구도’는 복양의 옛날 이름을 말하며 ‘하삭보장’과 ‘북문쇄약’은 북송(北宋) 때 복양이 북송의 도읍 변량(汴梁)을 지키는 군사요충지였음을 말한다.

(사진설명: 자로묘사의 일각)

자로묘사(子路墓祠)는 공자(孔子)의 유명한 제자인 자로의 무덤과 사당을 말한다. 자로묘사의 축조연대는 미상이지만 <수경주·하수(水經注·河水)>의 기록에 의하면 1400년 전 북위(北魏)의 지리학자 역도원(酈道元)이 <수경주>를 쓸 때 이곳은 벌써 자로의 무덤이었다.

보수를 거친 자로묘사는 묘총과 묘비, 석상생(石像生), 형전(亨殿), 석방(石坊), 산문(山門) 등을 거느린 복양의 대표적인 능묘가 되었다. 그 중 형전과 산문은 청나라 건물의 양식을 띠고 대전과 곁채는 명나라 건물의 풍격을 보인다.

한(漢) 나라 때 축조했다고 전해지는 자로의 무덤은 봉분의 높이가 43m, 지름이 29m에 달한다. 묘총의 주변에는 돌 기둥과 돌 문, 비석, 돌 사자, 돌 거북 등이 자로를 지킨다.

(사진설명: 출토된 용의 무늬)

복양은 용의 고향이기도 하다. 1987년 8월 17일 복양시는 서수파(西水坡) 황하 강물 인수로를 정비하던 중에 앙소(仰韶)문화 유적지 45번 무덤에서 조개로 만든 용과 호랑이모양의 부장품 3세트를 출토했다.

6400년 전의 것으로 측정되는 이 용은 고고학자들로부터 ‘중국 제일의 용’이라 불린다. 전문가들은 이로부터 6천여 년 전 복양은 부계씨족 사회에 진입했으며 중국 용문화의 발상지임을 알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중대한 발견으로 인해 당시 언론과 사학계가 들썩했고 중국의 용토템 역사는 3천년이나 앞당겨졌으며 복양은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미명을 가지게 되었다.

(사진설명: 창힐릉의 일각)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의 복양에서는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문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이 곳에는 사패루와 자로묘사, 중화제일용 등 명소 외에도 많은 인문경관이 보존되어 있다.

전욱(颛頊)과 창힐(倉頡)이 묻힌 이제릉(二帝陵)과 674년에 신축한 보조사(普照寺), 6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문묘(文廟) 대성전(大成殿) 등 유적지와 문화재들은 복양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두터운 역사책이자 눈부신 화폭이다.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는 유적과 문화재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명인도 잉태하기 마련이다. 복양도 마찬가지로 창힐을 비롯해 많은 역사명인들을 낳아 사서에 복양 고유의 편장을 남겼다.

(사진설명: 용의 고향 복양)

중국의 조상 중 한 명인 전욱이 이 곳에서 <전욱력(颛頊歷)>을 만들어 처음으로 1년을 365일로 확정했고 창힐이 이 곳에서 문자를 창제해 노끈매듭으로 기록하던 중국인들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우(禹) 임금의 아들 하계(夏啓)가 이 곳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구정(九鼎)’을 주조했다.

그 밖에 전국(戰國) 시기 유명한 군사가 오기(吳起)와 진(秦)나라의 개혁가 상앙(商鞅), 당(唐) 나라 천문학자 승일행(僧一行), 북송(北宋)의 수리학자 황초(黃超),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집필한 여불위(呂不韋) 등도 모두 복양에서 태어났다.

복양은 이런 문화재를 더 잘 보존하기 위해 도심에 척성(戚城) 문화보호구역을 나누어 유적과 문화재를 한 곳에 집중했다. 춘추시기 위(衛)나라의 중요한 읍이었던 척성 유적지에는 현재 전욱현궁(玄宮)과 용궁(龍宮), 역사 전시실, 자로묘사 등 다양한 볼거리가 모여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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